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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선도산 마애불의 양식판단 문제

시대 전환기에 조성된 불상…쇠퇴기·발전기 해석 논쟁

▲ 경주 선도산 마애아미타삼존불. 본존불 현존높이 5.7m. 7세기 중반. 학자에 따라 삼국시대 양식의 마지막 작품으로, 혹은 통일신라시대 양식의 시원적 작품으로 본다.

한 문화의 미술적 흐름이란 무수히 많은 작품들이 점점이 모여 이루어지는 것이겠지만, 관심을 받는 대부분의 작품은 몇 개로 분절된 시대를 대표하는 소수의 사례들이다. 또한 그 시대를 대표한다는 것은 절정기에 다다른 작품들을 일컫는 경우가 많다. 아울러 역사상 몇몇 작품으로 대표되는 각각의 시대는 나름대로의 흥망성쇠를 겪기 마련이다. 예를 들어 서양미술사에서는 로마네스크, 고딕, 르네상스, 매너리즘, 바로크 등등 몇 개의 양식으로 시대를 구분하고 있고, 각각의 양식은 발생기, 발전기, 전성기, 쇠퇴기로 다시금 구분되는 식이다. 동양미술에서는 이러한 구분을 대체로 왕조별로 정의내리기 때문에 각 시대별 양식적 특징이 잘 드러나지 않지만 기본개념은 비슷하다.

현존 보살상 가운데 최대 규모
산 정상 아미타불 조성한 원력
거대 화강암 협시불서도 드러나
신라인에게 선도산은 극락 상징

7세기 중반 조성연대엔 이견 없어
삼국 통일 무렵으로 시각차 존재
삼국·통일신라시대적 요소 공존

이렇듯 각 시대의 전성기 작품은 가장 완성된 모습이자 그 시대를 대표하는 예술품으로서 분명한 특징을 지니고 있지만, 문제는 발생기와 쇠퇴기의 작품들은 그 특징이 모호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실상 우리가 접하는 대부분의 작품은 바로 이런 어중간한 시기에 걸쳐있는 작품들이다. 이전 양식에서 보자면 이 시기는 쇠퇴기의 양식이고, 이후 양식에서 보자면 발생기 양식으로 볼 수도 있다.

▲ 경주 배동 전(傳)선방사 삼존석불 본존불. 투박한 조형성으로 삼화령 불상보다 앞선 작품으로 보는 견해도 있지만, 새로운 수나라 양식을 반영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미술사학이 정립되기 이전에도 미술품에 대한 연구는 있었지만, 이는 소위 말하자면 명품 위주의 미술비평이나 감정 수준이었다. 당시에는 명품 이외의 작품은 단지 명품을 빛나게 해주는 조연에 불과한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본격적인 ‘학(學)’으로서의 미술사가 정립되면서 비로소 이러한 마이너 성격의 작품들은 메이저 작품들이 존재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했던 일종의 성장과정으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우리나라 불교미술사에 있어서도 점차 정보와 연구가 축적됨에 따라 이렇게 시대와 시대 사이에 걸쳐있는 중간적 시기의 작품들에 대한 연구가 등장했는데, 그 대표적인 사례가 아마도 경주 선도산 정상에 위치한 마애삼존불에 대한 연구가 아닌가 한다. 선도산은 경주 서쪽에 위치한 산으로서 석굴암이 위치한 동쪽의 토함산이 동악(東岳)이라면, 선도산은 서악(西岳)으로 불리는 곳이다. 아울러 선도산 아래에는 태종무열왕릉을 비롯한 진흥·진지·문성왕릉 등 무열왕계 왕릉을 비롯하여 서악 고분군, 금척리 고분군 등이 위치하고 있다. 때문에 선도산 마애불은 이들 무덤에 묻힌 왕족·귀족들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며 세워진 불상으로 추정되고 있다.

특히 서쪽은 해가 지는 방향으로서 죽음의 세계를 상징하는 방위였다. 불교에서 사후세계를 담당하는 아미타불의 극락세계 역시 서쪽에 위치하기 때문에 서방극락정토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신라인들에게 있어 서악, 즉 선도산은 극락세계를 상징하는 산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그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산 정상에 아미타불을 세웠던 것인데, 안산암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자연암괴를 깎아 본존 아미타불을 만들고, 양협시인 관음·세지보살은 다른 곳에서 채석한 화강암으로 만들어 세웠다. 본존의 높이는 파손된 얼굴 부분을 복원한다면 7m 가량 될 것으로 추정되고, 보살상의 높이는 4.6m 정도 되어 현존하는 보살상 중에서 최대 규모에 속한다. 그냥 걸어서 올라가기도 힘든 이 정상부에 저런 거대한 화강암 보살상을 끌고 올라와 세웠다는 것은 이곳에 아미타 삼존불을 반드시 세워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을 것임을 짐작케 한다.

▲ 선도산 마애불 좌협시보살상(관음보살). 높이 4.55m. 별도의 화강암석재를 옮겨와 만든 것인데, 신·구양식이 공존해있다.

이 마애불이 대략 7세기 중반을 전후하여 세워졌다고 보는데 이견은 없다. 그런데 그 7세기 중반을 즈음한 시기가 바로 삼국이 통일된 시기라는 점에서 학자들마다 미묘한 시각차를 보인다. 바로 삼국시대라는 시대단위와 통일신라라는 시대단위가 서로 접목되는 시점인 것이다. 때문에 선도산 마애불에는 삼국시대적인 요소도 보이고, 통일신라시대적인 요소도 보인다. 그러나 어디에 더 초점을 맞추는가 하는 문제는 작품 해석에 있어 중요한 문제일 수 있다. 먼저 제기된 것은 이 마애불을 통일신라시대의 새로운 양식을 비로소 반영하기 시작한 초기의 작품으로 바라보는 시점이었다. 비록 과거 삼국시대의 양식이 많이 남아있기는 하지만, 그와는 구분되어 통일신라시대의 양식적 근간이 되는 중국의 수·초당 시기 작풍을 많이 반영하고 있다고 해석한 것이었다. 그 근거로서 불상의 비례를 들었다. 중국 북제·주 양식을 반영한 신라의 불상들은 비례가 경주박물관 소장의 삼화령 삼존불처럼 머리가 몸에 비해 큰 어린아이의 비례를 닮았다고 하여 흔히 동형(童形)비례라고 하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이 비례를 대체로 1:2.5 내지 1:2.7 정도로 본다면, 선도산 마애불의 비례는 1:3.5로서 머리가 신체에 비해 많이 작아진 것이 특징이다. 물론 지금의 사람들이 추구하는 소위 8등신에 비하면 분명히 가분수이지만, 이전의 불상에 비해서는 머리가 현저하게 작아진 것이다. 이는 이후 통일신라시대에 유행하게 되는 1:4를 넘어서는 비율에는 아직 미치지 못하지만, 결국 1:2.5에서 1:3.5를 거쳐 1:4로 이르는 과정의 모습을 보여준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렇게 엄격한 비례에 의해 종교 예배상이 제작되었음은 인도의 불교·힌두교 미술에서도 이미 확인되고 있다. 동아시아의 불상도 예외는 아니었을 것이다. 따라서 일반적인 조각과 달리 종교미술로서 조각이라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불상의 비례문제는 한 시대의 미감을 보여주는 지표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 중요한 해석이었다.

이에 대해 선도산 마애불의 제작시기는 거의 유사하게 보면서도 이를 삼국시대 불상조각 양식의 마지막 쇠퇴기 양식으로 해석한 논문도 뒤이어 발표되었다. 이에 의하면 선도산 불상의 비례가 통일신라시대의 비례에 다가가고 있는 것 같지만, 이는 사람이 아래서 위로 올려다볼 때의 시각이고, 이를 정확하게 실측해보면 아직까지 삼국시대의 어린아이의 비례와 같이 머리가 큰 형태라는 것이다. 첫 번째 주장이 제기될 때인 1969년까지만 해도 두 협시보살상은 몇 조각으로 파괴되어 바닥에 놓여있었는데, 두 번째 주장이 제기될 때는 이를 새롭게 복원한 이후였다. 따라서 첫 번째 주장과 함께 제시된 협시보살상의 도면은 파편을 조합한 상상도인 반면, 두 번째 주장과 함께 제시된 도면은 복원 후의 실측도면인 셈이었는데, 그럼에도 두 도면이 사실상 유사한 비례를 보이고 있어서 비례 측정치가 잘 못 되었다고는 볼 수 없다. 다만, 설계상의 비례가 중요한 것인지, 아니면 관찰자가 체감하는 비례가 중요한지가 논쟁이 될 수 있겠다.
그 밖에 선도산 마애불을 삼국기로 보고자 하는 근거는 신라의 통일 직후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사천왕사나 감은사 등에서 출토된 미술의 양상은 당나라의 선진적인 조각양식이 다분히 반영되고 있는데 반하여 선도산 불상에서는 그러한 신조류를 느끼기 어렵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천왕사 등의 새로운 양식보다 이른 시기라면 이는 통일신라양식이 아닌, 삼국기 양식에 속하는 것으로 보아야한다는 것이다.

▲ 경주 삼화령 출토 석조삼존불상.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중국 북제·주 시기 어린아이형 비례의 영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

이러한 논쟁은 같은 7세기 중반의 불상을 놓고 얼마나 다른 시각에서 접근이 가능한가를 보여주었다. 전자는 구양식에서 신양식으로 발전해나가는 전환기로서의 의미를 강조한 것이라면, 후자는 구양식의 쇠퇴기 마지막 양식으로 본다는 점에서 과도기적 성격을 강조한 것이라 정리해볼 수 있다. 큰 시각에서 보기에는 여하간 7세기 중반에 제작된 불상이라는 점에서 결국 같은 견해가 아닌가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선도산 마애불 하나만 놓고보면 그렇지만, 대표적인 신라말 불상조각들의 양식적 흐름을 설정하는데 있어 전자의 해석에서는 삼화령불상-배동삼존석불-선도산마애불로 이어지는 것으로 보고 있는 반면, 후자의 해석에서는 배동삼존석불-삼화령불상-선도산마애불의 계통을 세우고 있다는 점에서 시각의 차이점은 점점 커지게 된다. 전자는 삼국시대양식(=중국 북제·주 양식)에서 통일신라양식(=중국 수·초당양식)으로 점점 발전하는 단계로 보고, 조형적 패러다임의 변화 자체에 초점을 맞췄다면, 후자는 이 모두를 같은 삼국시대 양식의 범주에서 넣고, 그 안에서 표현의 역량과 원숙도에 따라 선후관계의 설정을 시도한 까닭이다.

이러한 논쟁은 이후 한국미술사에 있어 변환기 양식에 대한 연구를 촉진시켰다. 석굴암에서 완성된 통일신라 전성기 양식이 해체되는 과정에서 복고적 양식을 지니고 만들어진 불국사 금동 비로자나·아미타불상의 편년문제로부터 통일신라 후기에 지방색 짙은 양식의 철불이 등장했던 배경에 대한 연구, 그리고 단순히 나말여초 시기로 비정되던 작품들을 ‘후삼국 양식’의 개념을 도입하여 해석하는 등 불교미술사는 보다 다양한 연구주제들의 등장으로 바야흐로 빈티지의 시기에 접어들게 되었다. 고

주수완 고려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  indijoo@hanmail.net

[1293호 / 2015년 5월 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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