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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분별-하

분별 넘어설 때 비로소 각각의 가치가 드러나

▲ 일러스트=김주대 문인화가·시인

도를 깨친 이가 아닌 한, 자신의 척도를, 자기 생각을 내려놓는 일은 쉽지 않다. 그게 옳은 생각이고 많은 사람들이 공유하고 있는 생각일수록 내려놓기 어렵다. 도를 체득하지 않고선 분별을 떠나 사는 건 불가능한 걸까? 적과 동지를 가르고, 호오미추를 가르는 동물적 본성에 따라 살 수밖에 없는 것일까?

예술이란 관념을 버리면
모든 것이 예술이 되듯이
분별 떠난 분별 가능하면
모든 존재 의미 볼 수 있어

흔히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이라고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인간은 대개 생각하지 않는다. 특히 자신이 잘 알고 있는 것, 익숙한 것, 숙련된 것은 생각하지 않고 처리한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인간이란 생각하지 않기 위해 애쓰는 동물이다. 가령 우리는 어떤 일에 숙련되기 위해 노력하는데, 숙련된다 함은 어떤 일을 아무 생각 없이 할 수 있음을 뜻하지 않는가! 그런데 우리가 생각할 때가 있다. 생각할 수 없는 것과 만났는데 그걸 피해갈 수 없을 때다. 생각할 수 없는 것이 내게 들이닥치는 곤혹스런 상황에서 우리는 비로소 생각하기 시작한다. 분별 또한 그렇다. 생각 없이, 생각 이전에 간택하는 것, 그것이 분별이다.

따라서 분별은 생각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데, 생각하고 이해해야 할 때 비로소 정지된다. 그때 비로소 제대로 된 생각이 시작된다. 감각도 그렇다. 감지되었지만 무언지 알 수 없을 때, 낯설고 불편하지만 피해갈 수 없을 때, 그 낯선 것을 향해 감각을 세우며 유심히 보고 들으려 하게 된다. 알 수 없는 그것을 통해 자신의 감각을 넘어서게 되고, 자신이 ‘생각’을, 자신의 분별을 넘어서게 된다. 이처럼 생각할 수 없는 것과의 만남, 감각되었지만 무언지 알 수 없는 것의 감지를 통해 우리는 자신을 넘어서게 된다. 자신이 옳다는 믿음을 넘어서게 되고, 분별하는 자신을 넘어서게 된다. 이를 철학자 들뢰즈는 ‘초월적 경험론’이라고 명명한다. 여기서 ‘초월’이란 넘어섬을 뜻한다. 분별을 ‘넘어선’ 분별이 시작되는 지점이 여기 아닐까?

분별심을 내려놓는다는 것은, 내가 쉽게 판단하고 분별하기 힘든, 아니 섣불리 그래선 안 될 타자성의 영역이 존재함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타자성이란 내 인식이나 이해, 혹은 의지의 바깥에 있는 것을 뜻한다. 알 수 없는 것,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중요한 건 이해할 수 없는 것과 만났을 때 그것을 거부하고 밀쳐내는 게 아니라 그것을 이해하려고 귀 기울이고 마음을 여는 것이다. 흔히 ‘정의’란 올바른 분별의 기준이라 생각하고, 정의로운 판단이란 올바른 판단이라고들 한다. 그러나 이미 확립된 기준에 입각한 정의란, 양식이나 상식처럼 많은 이들이 공유하고 있는 분별의 척도를 뜻할 뿐이다. 철학자 데리다는 정의를 이와 아주 다른 것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우리가 갖고 있는 공동의 기준을 모두에게 공평하게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잘 알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타자성의 영역에 마음을 열고 그것을 최대한 이해하려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 타자성을 통해 지금 ‘정의’라고 믿고 있는 것을 수정하고 바꾸는 것이 정의라고. 이 역시 분별을 넘어선 곳에서 정의는 시작됨을 뜻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20세기 현대예술의 역사는 분별심에 대한 투쟁의 역사였다고 해도 좋을 것 같다. 그들은 다들 익숙해져 있는 감각이나 관념에서 벗어난 것을 사람들에게 들이밀고 들어갔다. 피카소는 앞에서 본 얼굴과 뒤에서 본 몸을 하나의 방향에 같이 그려 사람들의 시각적 분별을 난감한 당혹 속으로 밀어 넣었다. 뒤샹은 공장에서 생산된 변기를 전시장에 밀어 넣곤 예술작품이라고 주장하여, 예술과 비예술, 예술작품과 상품을 가르는 분별기준을 물속에 처박아 버렸다. 프랑스 작가 장 뒤뷔페는 “왜 여우의 털은 목에 두르면서 여우의 내장은 목에 두르려고 하지 않는 것일까?”라고 반문하며, 두터운 진흙으로 똥을 연상시키는 더러운 그림을 그려 전시했고, 이브 클랭은 작품 대신 텅 빈 전시장을 전시(‘텅 빔’)하여 ‘전시’나 ‘작품’이라는 관념을 와해시켰고, 그에 답해 아르망은 예술작품 전시하는 전시장에 작품 대신 쓰레기를 한 차 갖다 쏟아 부어 놓곤 ‘가득 참’이란 제목의 작품이라고 주장했다.

현대 음악도 그렇다. 루이지 루솔로는 도시나 공장의 소음을 음악이라고 ‘연주’하기도 했고, 에드가 바레즈는 망치소리, 사이렌 소리, 채찍소리 같은 걸 악기 소리와 섞어서 음악작품을 만들기도 했다. 그런 식으로 음악적 소리와 그렇지 않은 소리를 가르는 분별의 기준을 소음 속에 묻어버렸다. 그런 식으로 반복하여 예술에 대한 생각이나 감각을 깨면서, 예술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하게 했다. 덕분에 지금은 예술 아닌 것이 없게 되었다. 호오와 미추를 분별하는 예술이란 관념, 예술이란 척도를 깨어버리자, 모든 것이 예술이 될 수 있게 된 것이다. 분별의 척도가 사라지자, 어떤 것도 예술작품이 될 수 있는 잠재성을 가진 것이 된 것이다. 동물이나 인간을 기준으로 하는 분별의 척도가 사라지면, 식물은 움직이지 않아도 살 수 있으니 좋고, 동물을 움직일 수 있어서 좋음을 비로소 알게 된다. 그래서였을 게다. “색신은 부서지는데, 어떠한 것이 견고한 법신입니까?”라는 물음에 대룡 스님은 이렇게 답한다. “산에 핀 꽃은 비단결 같고, 시냇물은 쪽빛처럼 맑구나.” 들어보았는가, 장사스님이 봄기운을 본 소식을?

장사스님이 하루는 산을 유람한 후 문 앞에 이르자 수좌가 물었다.

“스님께선 어딜 다녀오십니까?”
“산을 유람하고 오는 길이다.”

유람하고 왔다니, 무언가 좋은 것을 찾아간 것 아닌가? 호오미추의 분별을 떠났다면 따로 좋아할 것이 어디 있을 것이고, 따로 아름다운 것이 어디 있을 것인가? 모두 아름다울진대, 따로 유람할 것이 또 어디 있단 말인가? 하여 수좌가 다시 묻는다.

“어디까지 갔다 오셨습니까?”

이는 원오스님이 착어대로, 수좌가 한 마디 “내지른” 것이다. “다녀온 곳이 있으면, 풀 속에 떨어”지기 때문이다.
 
“처음엔 향기로운 풀을 따라갔다가, 그리고 나선 지는 꽃을 따라 돌아왔느니라.”

향기로운 풀은 향기로워서 좋고, 지는 꽃은 지는 꽃이어서 좋다는 말이다. 고인 물은 고여 있어서, 흐르는 물은 흐르고 있어서 좋다고 함은, 특정한 하나의 척도로 분별하는 게 아니라 각자가 갖는 미덕을 그 각자를 기준으로 ‘분별’하는 것이니, 이미 분별을 떠난 분별이다. 이렇게 분별하면 모든 것이 아름답고 모든 것이 좋은 게 된다. 수좌가 ‘내지른’ 말을 멋지게 받아넘긴 것이다. 다시 응수하는 걸 보면 그 수좌도 이를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아주 봄날 같군요.”
“아무렴, 가을날 이슬방울이 연꽃에 맺힌 때보다야 낫지.”

분별을 떠난 분별은 각각의 것들이 가진 미덕이나 가치를 보는 것이다. 모든 것이 좋다고 하는 것은 모든 것의 거대한 존재론적 평등성을 보는 것이지만, 그게 언제나 모든 게 다 똑같이 좋다고 함을 뜻하는 건 아니다. 배를 띄우려는 이에겐 깊은 물이 더 좋고, 물을 건너려는 이에겐 얕은 물이 더 좋은 법이다. 그렇기에 분별을 떠난 이 또한, 어떤 조건에선 어떤 것이 ‘더 낫다’고 말할 수 있다. 아니, 분별을 떠났을 때, 어떤 조건에서 어떤 게 더 나은지 정확하게 ‘분별’할 수 있다. 이 또한 분별을 넘어선 분별이다. 분별심을 넘어선, 지혜로운 분별이다. 이것이 “경계에 끄달리지 않고 가는 곳마다 경계를 활용”(‘임제록’)하는 것일 게다. 대주스님이 “분별이 없는 본체 가운데서 항사묘용(恒沙妙用)을 갖추어서 능히 일체를 분별하여 알지 못하는 일이 없다”(‘돈오입도요문론’) 했던 것이 바로 이런 것일 게다.

이진경 서울과학기술대 교수 solaris0@daum.net

[1293호 / 2015년 5월 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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