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조선 말기의 사찰 숲
9. 조선 말기의 사찰 숲
  • 전영우 교수
  • 승인 2015.05.11 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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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가 남긴 기록 통해 대략적인 사찰숲 파악 가능

▲ 금강산 만물상 일대의 신록(2007년 5월 25일).

조선시대 말기(1910년)의 사찰 숲은 어떤 상황이었을까? 아쉽게도 각 지방의 사찰들이 어떤 숲을 얼마나 소유하고 있었는지 알 수 없다. ‘조계산송광사사고 산림부’와 같은 기록들이 여타 사찰에서도 전해졌으면 그 당시의 상황을 조금이라도 유추할 수 있겠지만, 현재까지 그와 유사한 자료는 발견되지 않고 있다. 따라서 조선 말기 1,300여 개소의 사찰이 관리(또는 소유)했던 숲의 상황을 확인할 방법은 없다.

1912년 일제총독부 남긴
‘조선임야분포도’서 확인

사찰숲 위치와 영역 표기
사찰의 산림 소유권 확인

황폐해진 사원 소유 산림
유림이 사찰숲 탐낸 이유


조선 전역에서 18세기부터 심화된 산림황폐는 인구 밀집지역인 남부지방이 더 심했다. 그래서 남부지방의 몇몇 사찰들은 권세가와 백성들의 탐욕에서 사찰림을 지키고자 자구책으로 봉산을 자임했다(법보신문 1290호 참조).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의 정확한 상태를 확인할 수 있는 기록은 비록 없지만, 향탄봉산으로 지정된 동화사, 송광사, 해인사, 김용사, 용문사(예천), 통도사, 안정사 등의 산림은 비교적 양호했을 것으로 추정하는 것은 무리가 아니다.

그러나 조선 말, 남부지방을 제외한 다른 지방의 사찰 숲에 대한 상황을 구체적으로 가늠하기란 쉽지 않았다. 적어도 1910년에 시행된 임적(林籍)조사 사업의 결과물인 ‘조선임야분포도(朝鮮林野分布圖)’를 직접 확인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 ‘조선임야분포도’. 일제 통감부의 임적조사사업(1910년)에 의해 제작된 지도로 사찰림의 경계가 청색선으로 표시되어 있다. (사진출처 : 일본 국립공문서기록관)

‘조선임야분포도’는 2009년 연합뉴스 기사로 소개되었다. 비록 인터넷 기사로 소개되었을망정, ‘임야분포도’의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조선 전역의 산림 상황을 한눈에 확인할 수 있는 색채 표시였다. 백두산을 중심으로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은 울창한 산림상태를 나타내는 녹색임에 비해 백두대간을 제외한 대부분의 남부지방은 어린나무와 민둥산을 뜻하는 누런색으로 표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기사로 소개된 작은 크기의 ‘임야분포도’로는 조선 말(1910년)의 임야 상황을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없었다. 근래 사찰 숲 연재 기사를 준비하면서 일본어 검색 사이트를 이용하여 ‘조선임야분포도’를 다시 검색하니 일본 ‘국립공문서기록관’에는 20만분의1 지도로 1912년에 제작된 ‘조선임야분포도’가 디지털 문서로 공개되고 있었다.

인터넷을 통해서 100여년 전에 제작된 조선의 ‘임야분포도’를 보는 기분은 묘했다. 100년 전은 물론이고 50년의 산림 기본 정보조차 갖추지 못한 우리 실정과 비교되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 100년 전의 자료를 아무런 제한 없이 접근할 수 있게 누구에게나 개방하고 있는 정보공개가 놀라웠다. 조선 말기의 산림 상황을 거칠게나마 기록하고 있는 지도를 일본의 공문서기록관을 통해서 보는 감회는 그래서 복잡했다.
‘조선임야분포도’의 왼편 공간에는 범례가 표기되어 있었다. 범례의 첫 예시는 숲의 종류를 성림지(녹색), 치수[어린나무] 발생지(황색), 무입목지(노란색)로 나누어 색깔별로 표시하였다. 범례의 두 번째 예시는 숲의 소유별 영역을 적색선(관리기관이 있는 국유임야 구역), 갈색선(관리기관이 없는 국유임야 구역), 청색선(사원이 관리하는 임야 구역)으로 역시 색깔별로 표시하였다.

‘사원이 관리하는 임야 구역’을 나타내는 청색선 영역의 ‘사찰 숲’이 그토록 찾고자 원했던 정보였기에, 그리고 국내 언론에 소개된 축소지도로는 도저히 확인할 수 없었던 자료였기에 나는 전율했다. 1910년 당시 개개 사찰의 사찰림을 마침내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디지털 지도상에서 먼저 삼보사찰인 해인사, 통도사, 송광사의 사찰림 경계부터 확인해 봤다. 각 사찰은 넓이와 모양이 제각각인 사찰림의 구역이 청색 선으로 표시되어 있었다. 그래서 방문한 적이 있던 김용사, 법주사, 보경사, 부석사, 청량사, 불영사, 동학사, 석남사, 쌍계사, 화엄사, 선암사의 위치를 차례로 짚어가니 역시 청색 선으로 둘러쳐진 다양한 모양의 사찰림 구역이 지도상에 표시되어 있었다.

▲ 표훈사, 유점사 등이 1910년 금강산 일대의 임야를 관리하였음을 증명하는 ‘조선임야분포도’의 금강산 부분. 청색선 영역이 사찰림 구역을 나타낸다.

지도상의 북녘 사찰을 다음 순서로 확인하는 것은 당연했다. 북녘의 유명 사찰들이 그 당시 남부지방의 어느 사찰보다도 더 넓은 임야를 관리하고 있음이 단번에 눈에 들어왔다. 표훈사와 유점사 등은 금강산 전역을, 보현사는 묘향산 전역을, 개심사 역시 칠보산 전역을 관리하는 것으로 표시되어 있었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1910년 이전까지만 해도 나라 전역의 산림에 대한 기초 정보조차 없었다. 그래서 나라 전체의 산림면적이 얼마나 되는지, 누가 그 산림을 소유하고 있는지는 물론이고, 어떤 수종들이 얼마나 많이 자라는지도 알 수 없었다. 국가가 소유한 산림면적조차 알 수 없었으니 사찰이 소유한 산림에 대한 정보가 없었던 것은 오히려 당연했다.

한반도 전역의 산림 기초 정보를 담고 있는 ‘조선임야분포도’는 1910년 실시한 임적조사사업의 결과물이다. 일제는 식민지 경영에 필요한 산림수탈을 목적으로, 가장 먼저 산림소유구분에 대한 정보를 구축하고자 했다. 소유구분이 불분명한 산림(특히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을 가능한 많이 국유화하여, 국유림의 벌채수익을 확보하고자 원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통감부 시절부터 계획했던 조선 전체의 임야를 소유별로 파악하고자 1910년 3월부터 시행한 사업이 바로 임적조사사업이었다.

임적조사사업은 소수의 조사원(일본인 14인, 지리에 밝은 조선인 14인)이 단기간(5개월)에 최소 경비(2만 원)로 수행되었다. 2인 1조의 조사원들이 하루에 적게는 16,000정보, 많게는 22,400정보의 임야를 조사했기에 정밀성을 요구하는 것은 애초부터 무리였다. 비록 이런 약점이 있었지만, 이전까진 누구도 시도해보지 못한 조선 임야의 소유현황을 파악한 사업이었기에 일본에 있어서는 식민지 경영상 의미가 지대했고, 조선 역시 산림 현황을 최초로 파악할 수 있었기에 결과적으로 중요한 사업이었다.

임적조사는 종전에 관유림이었던 임야(봉산·목장), 공산(公山)과 함께 사찰유림(寺刹有林)의 구역을 조사하여 20만분의 1 지도에 표시하는 한편, 하천, 도로, 도시, 마을, 사찰(명칭도 기입), 단·능·원·묘(명칭도 기입), 주요한 산악, 도경계, 농경지 구역 등도 함께 표시하였다. 또한 수종조사는 침엽수(소나무, 기타 침엽수)와 활엽수의 3종류로만 구분·표기하였다.

1910년의 임적조사사업 결과, 일제는 조선 전체의 산림면적(15,849,619정보)뿐만 아니라 국유임야(8,303,374정보), 사원이 관리하는 임야(165,402정보), 사유임야(7,380,843정보)의 소유구분별 임야면적도 개략적으로 파악하게 되었다. 사원이 관리하는 산림면적이 전체 산림면적의 1%로 파악된 이 조사는 국유임야와 사유임야도 마찬가지이겠지만, 조선시대 사찰의 산림 면적을 파악한 최초의 자료였다.

임적조사사업은 사찰림과 관련된 중요한 사실을 증언하고 있다. 임조조사사업에 ‘사찰’과 ‘사찰유림’이 조사 항목에 포함된 사실이나, 또는 ‘사원이 관리하는 임야’ 면적을 별도 항목으로 제시하고 있음을 상기할 때, 조선 말기(1910년)까지도 국가는 사찰림을 사찰이 관리하는 임야[寺刹有林]로 인정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조선시대 ‘사원이 관리하는 임야’와 ‘사찰이 소유하는 임야’ 사이에는 실질적인 차이가 없음은 송광사와 선암사 간의 장막동 산의 분쟁 사례(법보신문 1292호 참조)로 이미 확인된 바 있다.

임적조사결과, 사원이 관리하는 임야 165,402정보 중, 성림지는 96,721정보, 치수발생지는 34,411정보, 무립목지는 34,270정보였다. 사원이 관리하는 임야 중 나무가 없는 무립목지 34,270정보는 전체 사찰림의 20.7%였다. 이 비율은 국유임야의 무입목지 비율(19.7%)과 비슷하였고, 사유임야의 무입목지(30.3%)보다는 10% 포인트나 더 낮은 수치였다. 이러한 결과는 조선 말기에 사찰이 국가기관만큼 숲을 더 잘 보전·관리하고 있었음을 나타내는 증거라 할 수 있다. 조선 조정이나 양반 권세가들이, 또는 백성들이 조선 후기부터 사찰 숲을 탐냈던 이유도 이 조사로 더욱 분명해졌다.

전영우 국민대 산림환경시스템학과 교수  ychun@kookmin.ac.kr

[1294호 / 2015년 5월 1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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