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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골굴사 마애여래좌상

기자명 신대현

담백한 미소·물결치는 옷주름…신라 불상서 본 실크로드 문명

▲ 마애여래좌상에나타난 특유의 이국적 풍모는 실크로드 문명의 흔적이다.

세상에 나타난 숱한 종교와 사상들은 어느 특정한 민족이나 지역에서만 꽃피운 한계를 갖는 게 대부분이다. 세계를 아우르는 국제성과 영속성이 부족한 것이다. 아시아만 예를 들어봐도 중국의 도교와 노장사상, 일본의 신교와 신사(神社)문화가 그러했다. 반면에 불교를 비롯해 기독교와 가톨릭교 그리고 이슬람교 등은 어느 한 지역에만 머무르지 않고 세계로 전파되며 세계종교로서 더욱 발전되어 나갔고 지금도 찬란하게 꽃을 피우고 있다. 아마도 인류가 존재하는 한 영원히 함께 할 것 같다. 특히 불교는 인도에서 출발하여 세계로 전파되는 과정에서 다양한 민족과 지역의 고유성을 최대한 살리는 유연함과 포용성을 보여 왔다. 또 한 지역의 문화가 다른 지역으로 흘러가는 데에도 불교는 아주 탁월한 역할을 했다. 그래서 인도와 중국의 흔적이 우리나 일본에서 발견되는 게 전혀 이상하지 않으면서도, 또 우리 나름의 발달된 불교문화를 이루었다.

실크로드는 불교의 세계화 통로
중국·중앙아시아 국한돼 인식
고구려·신라 포함됐단 견해도
‘왕오천축국전’ 등 뒷받침 근거

인도서 온 광유선사 골굴사 창건
석굴사원, 남다른 이국적 풍모로
한국의 둔황석굴’ 칭해지기도

암벽의 마애불도 실크로드 영향
해외 학자들도 골굴사 답사 후
신라 실크로드 루트로 인정해

불교가 이렇게 여러 나라로 전파된 데는 ‘실크로드’가 꽤 큰 역할을 했다. 중국 대륙 한가운데를 지나 타클라마칸 사막의 남북 가장자리를 따라 파미르 고원과 중앙아시아 초원을 지나 지중해로 연결되는 길로, 기원전 1세기부터 9세기까지 천 년을 이어온 유구하고 장대한 국제교통로였다. 중국은 물론이고 우즈베키스탄, 아프가니스탄을 포함하는 중앙아시아 전역 그리고 터키 등 중동지방에까지 이 길은 뻗어있었다. 멀리 유럽의 심장부 로마까지 이어졌다는 연구는 있다. 기본적으로는 중국의 비단과 중동의 향료 등을 무역하기 위해 개척된 길이지만 넓게 보면 고대 동서양의 종교와 문화가 바로 이 길을 통해 서로 오가며 두 지역이 고루 발전하는 데 아주 큰 역할을 했기에 인류문명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축복이었다.

20세기까지만 해도 실크로드와 직접 관련된 나라를 중국과 중앙아시아로만 국한해 보는 경향이 많았다. 하지만 최근에는 고구려와 신라도 이 실크로드 문화의 한 구성원이었다는 점이 점차 구체화되고 있다. 문헌으로 보더라도 신라의 혜초(慧超, 704~787)스님이 실크로드를 따라 인도와 중앙아시아 각국의 불교 성지를 순례하여 쓴 ‘왕오천축국전’이 생생한 증거이며, 유물들도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고구려 고분 벽화에서는 중앙아시아의 자취가 숨김없이 드러나 있고 신라 황남대총에서 출토된 유물에도 북방 스키타이 계의 영향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것이다. 우리 불교 문화재 중에도 실크로드의 흔적이 남아 있는 예가 있는데 그 중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 경주 골굴사(骨窟寺) 마애여래좌상이다.

▲ 골굴사 석굴사원 원경.

골굴사는 경주 양북면 기림사 옆, 동쪽 동해가 바라다 보이는 함월산 높은 곳에 자리한다. 643년 인도 범마라국(梵摩羅國)에서 건너온 광유(光有)선사가 기림사와 함께 창건했다고 전한다. 창건주가 바로 인도에서 실크로드를 통해 신라에 왔으므로 골굴사에 이국적 풍모가 담겨 있는 것은 당연했으니 석굴사원이 바로 그것이다. 석굴사원은 저 유명한 돈황석굴(燉煌石窟)처럼 실크로드 상에 자리한 중국이나 인도의 사원에서 아주 많이 나타난다. 석굴사원이란 암질이 약한 바위에 굴을 뚫어 만든 사원을 말하는데, 바위를 뚫었지만 석굴 자체를 별도의 석재로 지은 것이 아니라 자연 암반을 이용해 조성했으므로 인공석굴이 아닌 자연석굴이라고 한다. 이에 대해서 경주 석굴암처럼 석재를 별도로 만들어 굴 형태로 지은 것을 인공석굴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에 인공의 석굴사원이 몇 군데 있지만 골굴사처럼 자연 석굴사원의 흔적이 역력하게 묻어난 곳은 여기밖에 없다. 골굴사 마애여래좌상이 갖는 큰 의미 중 하나가 실크로드 불교문화의 직접적 영향을 보이는 자연 석굴사원의 자취를 잘 간직하고 있다는 점이라고 할 수 있다. 골굴사에는 마애여래좌상이 새겨진 굴 외에 전부 12개의 크고 작은 석굴이 있어 중국의 돈황석굴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 같다. 더군다나 이곳 석굴이 우리나라에서 흔히 보이는 화강암이 아니라 그보다 암질이 약한 응회암이라는 점도 돈황석굴을 또 한 번 연상케 하는 점이다. 그래서 골굴사를 ‘한국의 돈황석굴’로 부르기도 한다.

골굴사 마애여래좌상은 높이 4m, 폭 2.2m 정도의 크기인데 이 불상의 양식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많은 학자들이 말해 왔으므로 이를 종합해 얘기하는 게 낫겠다. 대략 이렇게 정리되는 것 같다(문화재청 홈페이지 문화재해설).

▲ 골굴사 마애여래좌상의 얼굴.

“민머리 위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높이 솟아있고, 윤곽이 뚜렷한 얼굴은 가늘어진 눈·작은 입·좁고 긴 코 등의 표현에서 이전 보다 형식화가 진전된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입체감이 두드러진 얼굴에 비해 평면적인 신체는 어깨가 거의 수평을 이루면서 넓게 표현되었는데, 목과 가슴 윗부분은 손상되었다. 옷 주름은 규칙적인 평행선이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겨드랑이 사이에는 팔과 몸의 굴곡을 표시한 V자형 무늬가 있다. 암벽에 그대로 새긴 광배(光背)는 연꽃무늬가 새겨진 머리광배와 불상 둘레의 율동적인 불꽃무늬를 통해 흔적을 살필 수 있다. 평면적인 신체와 얇게 빚은 듯한 계단식의 옷주름, 겨드랑이 사이의 U자형 옷 주름 등이 867년에 조성된 봉화 축서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 및 목조광배와 유사한 작품으로 통일신라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위 설명에서 옷 주름이 규칙적 평행선을 이룬다는 것이나 연꽃무늬가 새겨진 광배와 불상 둘레의 불꽃무늬가 율동적이라는 표현은 이 불상의 특징을 잘 짚은 대목이다. 그래도 전체적으로 볼 때 이 작품만의 특징이 아주 정확하게 서술되었다고 말하기에는 다소 아쉬운 느낌이 든다. 설명 중에 나오는 ‘민머리’는 머리카락이 한 올 한 올 자세히 표현되지 않은 형태를 말하는데 이는 우리나라 불상의 전체적인 경향이지 이 불상만의 고유한 특징은 아니다. 또 이목구비를 말하면서도 ‘형식화’라고 지적했는데, 어느 시기에 유행되었던 작풍(作風)이 구태의연하게 반복되는 것을 형식화라고 할 때 이 불상이 따르고자 했던 원형을 언급하지 않고서 형식화라고 표현하는 것은 납득이 안 간다. ‘평면적인 신체’라는 것도 이 불상처럼 암질이 약한 바위에 새기는 조각 기법상 어쩔 수 없는 점이지 하나의 양식으로 그렇게 표현된 것은 아니다.

▲ 중국 돈황 막고굴의 소조 불상.

그래서 일반적으로 말해지는 설명만 갖고서는 이 불상이 갖고 있는 실크로드 문화의 흔적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그런데 다른 관점에서 보면 기존의 불상과는 다른 양식을 발견할 수 있다. 우선 이 불상의 상호는 담백한 미소를 짓고 있는데, 얼굴이 마치 동안처럼 젊은 것이 한눈에 보인다. 이런 모습은 바로 돈황 막고굴(莫高窟)의 소조 불상들에서 흔히 나타나는 일반적 특징이다. 광배의 불꽃무늬나 옷 주름은 기본적으로는 9세기 불상과 비슷하기는 해도 자세히 보면 시대적으로 앞서는 꽤 고식(古式)인 것을 느끼게 된다. 특히 물결치듯 같은 간격으로 곡선을 지어 표현한 옷 주름의 형태는 돈황석굴의 작풍과 일치하는 것임을 직감하게 한다. 수많은 예가 있지만 막고굴 259호굴의 여래좌상과 비교해 봐도 이는 확연이 드러난다. 그래서 이 작품의 시기를 그보다 훨씬 이전으로, 그러니까 인도에서 온 광유선사가 골굴사를 창건한 643년과 연관시켜 보려는 견해도 있을 수 있다. 미술의 양식을 해석하는 데는 다소 엇갈린 주장이 있을 수 있어 여기서 어느 쪽이라고 단정 지어 말하기는 어렵지만, 7세기이든 9세기이든 골굴사 마애여래좌상이 실크로드 미술의 영향을 받은 것은 분명한 것 같다.

‘동해구(東海口)’ 유적이란 말이 있다. 석굴암-골굴사 마애여래좌상(기림사)-감은사-문무대왕릉(해중릉) 등이 경주 감포 앞바다 동해를 바라보고 일직선상에 위치한 것을 말한다. 모두 같은 각도로 동해를 향하고 있는데, 정확히는 동짓날 바다위로 떠오르는 해의 방향과 일치한다고 해서 신비감을 더해주고 있다. 이런 배치는 우연하게 된 것이 아니라 일관된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 각 유적 및 유물마다 완성된 시기는 서로 다르지만 수백 년을 이어가며 신라 사람들이 한결같이 추구해온 가치, 곧 바다에 대한 염원이 이 유적들에 담겨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바다를 향하는 이유가 왜구 또는 일본에 대한 적개심 또는 우려의 표시로 보는 것은 지극히 좁은 시각이고, 확 트인 바다를 향하며 인도에서 실크로드를 통해 신라로 이어져온 불교를 세상에 더욱 널리 전파하려는 뜻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그런데 동해구 유적 중에 골굴사 마애여래좌상의 연대가 가장 빠르므로 동해구 유적들이 추구해 왔던 의미의 시작은 바로 여기서 비롯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최근에는 고대 실크로드 국가의 주요 일원이었던 우즈베키스탄의 고고역사 학자들이 한국에 와서 이 골굴사 마애여래좌상을 아주 관심 있게 살펴보고 간 적이 있었다. 그들 먼저 실크로드의 루트로서 신라를 꼽았고, 그 가장 뚜렷한 유적으로 이곳을 지목한 것이다. 이에 비해 정작 우리나라에서는 이 골굴사 마애여래좌상을 실크로드 유적의 하나로 보는 관점이 상대적으로 적은 것 같아 아쉽다.

실크로드를 통해 과거에 있었던 문화 교류의 역사를 살펴보고, 우리 문화와 세계문화의 현대적 소통과 그 영향을 이해하려는 것은 오늘날 문화 발전을 위해서도 아주 요긴한 일이다. 실크로드에는 고대의 다양한 문명 교류의 흔적이 담겨 있으며, 우리의 역사도 그 중 한 획을 그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신라는 그동안 감춰져왔던 실크로드의 숨은 조력자이자 인류의 문화와 문명을 획기적으로 발전시킨 위대한 고대 ‘동서양 교류의 시대’를 완성했던 방점일 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자취가 바로 골굴사 마애여래좌상에 담겨 있다.

신대현 사찰문화연구원 대표 buam0915@hanmail.net

[1294호 / 2015년 5월 1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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