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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티베트 탁창로차와가 총카파에게

“태양 같은 지혜 앞에 저의 오만함도 시들었습니다”

총카파 질시하던 사캬파 학승
‘현관장엄론’ 주석서 보고 감복
31살의 총카파를 태양에 비유
티베트 최고 고승 될 것 확신

8살 때 동진 출가한 총카파는
종파 넘나들며 현·밀교 공부
‘보리도차제론’ 등 저술 통해
새로운 티베트불교 만들어

“태양과 같은 당신의 지혜가 떠올랐을 때 반야경과 ‘현관장엄론’이라는 꽃이 활짝 핀 것을 보고, 제 마음의 오만함도 시들어버렸습니다. 심오하고 광대한 지혜의 보고(寶庫)에 경배합니다.”

1387년, 사캬파의 유능한 번역관인 탁창로차와(sTag tshang lo tsa ba)는 총카파(Tson kha pa, 1357~1419)라는 31살의 젊은 승려가 못마땅했다. 총카파는 어느 종파에 소속되지 않은 채 숱한 고승들을 찾아다니며 학문과 수행을 익혔다고 했다. 24살 되던 해부터 유식, 중관, 논리학, 구사론 등을 강설한다는 얘기도 들려왔다.

인도불교의 전통을 잇는 티베트불교. 당시 티베트에는 현교(顯敎)와 밀교(密敎)가 대립하고 있었다. 공개적인 가르침을 중시하는 현교는 이론적인 측면에서 밀교보다 훨씬 방대한 지식을 구축하고 있었다. 반면 스승과 제자 간에 은밀한 가르침을 통해 성불에 이르려는 밀교는 영성과 육체의 잠재능력 계발에 있어서 현교를 훨씬 능가했다.

인도 후기불교가 그랬듯 티베트에서도 밀교가 현교보다 우세했다. 밀교는 현교가 이론에만 치중해 불교의 본래 목적인 해탈과 괴리됐다고 비판했고, 현교는 밀교가 감미로움에 빠져 계율을 도외시하고 자신의 체험만을 절대시한다고 맞섰다. 그들은 물과 기름처럼 대립했고 학파들 간의 반목과 갈등도 깊어졌다.

탁창로차와가 속해있는 사캬파는 닝마파처럼 밀교만 지향하지는 않았다. 대학자인 사캬판디타(1182~1251)를 거치며 사캬파는 계율을 중시하고 현교도 함께 공부하는 학파로 변모하고 있었다. 사캬판디타가 입적한 지 100여년이 흘렀지만 탁창로차와를 비롯한 사캬파 승려들에게 그의 위상은 절대적이었다. 사캬판디타의 학문적 명성이 원나라는 물론 인도에까지 널리 퍼졌고, 모든 티베트인들을 몰살시키겠다던 몽골의 권력자들을 티베트불교 외호자로 만든 데에도 그의 역할이 컸다. 사캬판디타는 티베트 승려들이 뛰어난 문서작성 능력을 갖추고 있음을 역설하는 동시에 해박한 불교이론과 매혹적인 수행법으로 그들의 마음을 바꿔놓았던 것이다. 게다가 그의 조카인 팍파(1235~1280)가 원의 황제 쿠빌라이의 스승이 되는 등 사캬파의 전성기를 이끌 수 있었던 배경에도 사캬판디타라는 고승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새파랗게 젊은 총카파가 기존의 기라성 같은 학설들을 비판적으로 해석해 자기견해라고 내놓고 있으니 탁창로차와로서는 내심 불쾌했다. 그가 틈만 나면 총카파를 공개적으로 비판하고 나섰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 총카파의 모습을 그린 그림으로 드레풍사원의 보관돼 있다.

이런 탁창로차와에게 어느날 샤카파의 한 승려가 총카파의 저술이라며 내용 검토를 요청했다. ‘선석금만(善釋金鬘)’이라는 제목으로 ‘현관장엄론(現關莊嚴論)’을 주석한 책이었다. 사캬파의 대표적인 학승이자 번역관으로 경과 논에 두루 밝았던 탁창로차와는 코웃음을 쳤다. ‘현관장엄론’이 어떤 논서인가? 인도불교의 대학승으로 세친과 더불어 유식사상의 기틀을 다졌던 무착(無着)의 대표 저술 중 하나가 아니었던가. 이 책이 비록 유식계통의 논서로 분류되지만 중관사상에 대한 이해는 물론 설일체유부, 경량부 등 당시 인도 불교학파들의 견해들이 곳곳에 반영돼 있었다. 더욱이 현교는 물론 밀교의 교리와 실천수행의 교리적 단서들이 다수 포함돼 있는 까닭에 현교와 밀교를 아우르는 폭넓은 지식 없이는 접근이 어려운 까다로운 논서였다. 그런데 겨우 서른 남짓의 젊은 승려가 여기에 대해 풀어쓰고 자신의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는 게 아닌가.

탁창로차와는 이번 기회에 총카파의 경론 이해가 얼마나 섣부른지 알려주고 싶었다. 그는 책을 집어 들었다. 그러나 그의 편견이 깨지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책을 읽어나갈수록 그의 눈이 점점 커지고 허리는 꼿꼿해졌다. 총카파는 성불이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세상의 현상에 대한 지식과 수행실천, 궁극적인 경지인 불지(佛智)의 구현을 순차적으로 제시했다. 또 붓다가 증득한 지혜를 진언이나 수인(手印) 등을 통해 상징화하고, 수행자는 그것을 자신의 세계에 구현해 다시 이타적 존재로서 만다라에 구현됐던 대자대비의 정신을 실천하는 것임을 명확히 했다. 총카파는 ‘현관장엄론’의 전체적인 체계를 꿰뚫고 있었으며, 그것을 자신의 철학적 관점에서 하나하나 풀어가고 있었다.

탁창로차와는 깊은 한숨을 토해냈다. 그동안 자신이 얼마나 무지하고 아만에 가득 차 있었는지 새삼 깨달았다. 총카파가 보여준 세계는 단순한 지식의 차원을 훌쩍 넘어서 있었다. 경론에 대한 폭넓은 이해와 더불어 자신이 직접 체험한 수행의 세계가 곳곳에 드러나 있었다. 게다가 현교와 밀교의 소통이라는 시대적인 고민까지 깊이 담겨 있었다. 탁창로차와는 총카파가 이 경지에 이르기 위해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떠올리자 경외감이 솟구쳤다.

그에게 총카파는 더 이상 젊은 학승이 아니었다. 티베트를 대표하는 고승이었으며 티베트불교의 새로운 흐름을 이끌어갈 진원지였다. 탁창로차와는 총카파에게 편지를 썼다. 총카파의 지혜를 태양에 비유한 뒤 그의 명쾌한 해설로 인해 ‘현관장엄론’의 진면목이 확연히 드러날 수 있었음을 찬탄했다. 그동안 자신이 가졌던 오만함을 거두고 심오하고 광대한 총카파의 지혜에 경배한다는 말도 써내려갔다. 탁창로차와는 총카파가 밤하늘의 북극성처럼 티베트불교의 이정표가 될 것이라 확신했다.

현교와 밀교를 통합한 티베트 최고 고승이자 달라이라마로 대변되는 겔룩파의 시조 총카파. 그는 1357년 10월10일 암도 지방의 총카 계곡에서 유목민의 육형제 중 넷째로 태어났다. 훗날 그가 총카(Tson kha)의 사람(pa)이란 의미의 총카파로 불린 것도 이곳이 고향이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관세음보살을 품는 꿈을 꾼 뒤 태어난 총카파는 어릴 때부터 지혜롭고 자비로웠다. 불쌍한 사람이나 가족이 없는 이들을 보면 늘 도우려 애썼다. 카규파의 최고 지도자인 제4대 카르마파가 이 마을을 지나가던 중 어린 그를 보고 “이 아이는 만 중생에게 큰 이익을 베풀 성스런 아이”라며 재가불자 계율인 우바새계를 주었다. 그가 본격적인 사문의 길을 걸은 것은 8살 때 카담파의 최고 고승인 된둡린첸의 권유에서 비롯됐다.

현교와 밀교에 두루 밝았던 된둡린첸은 그에게 롭상닥파(Blo bzang grags pa)라는 법명을 주고 자신의 모든 지식을 일일이 전수했다. 미륵의 5법, ‘입보리행론’, 논리학 등 현교의 가르침을 차근차근 익혀나간 총카파는 이미 12살 때 당대 논사들과의 토론에서 이길 정도로 불교 이해가 깊었다. 총카파가 16살이 됐을 때 더 이상 가르칠 게 없었던 스승은 그를 인근 지역 가장 큰 디쿵사원으로 보냈다. 총카파도 배움이 있는 곳이라면 천릿길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는 디쿵사원에서 경론과 보살행을 배웠으며, 디쿵의 유명한 의사인 쿤촉겔포로부터 의술을 배워 수많은 환자들을 직접 보살폈다. 그러면서도 틈틈이 시학(詩學)과 수학도 익혀 발군을 능력을 발휘했다.

몇 해 뒤 총카파는 다시 츠앙 지역 대사원에서 유명한 스승들로부터 ‘현관장엄론’과 ‘반야경’ 등과 관련된 12종의 주석서와 인도 유식파의 개조인 미륵의 논서들을 익힐 수 있었다. 총카파는 당대 티베트 최고의 학승이라는 사캬파의 렌다와(1349~1412)도 직접 찾아갔다. 렌다와는 19살의 청년이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불교에 이해가 깊은 총카파를 보고 놀라워했다. 그는 총카파에게 아비달마, 반야, 구사, 중관, 인명학 등 자신이 아는 모든 지식을 가르쳤다. 훗날 렌다와는 제자인 총카파가 자신의 불교 이해를 훨씬 넘어서자 이제 자신이 총카파의 제자가 되겠다고 선언한 것도 총카파라는 인물이 당대를 넘어 파드마 삼바바(Padma Sambhava)에 버금가는 위대한 인물임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총카파의 구도행은 그치지 않았다. 그는 불법을 배워가면서 모든 불법의 근간이 계율에 있음을 절감했다. 그는 율학의 대가인 콜모룽파사원의 카시바 로셀을 찾아가 율학을 배우고 인도 고승들의 율장 주석서를 아예 외우다시피 파고들었다. 총카파는 24살 되던 해부터는 미륵의 5법, 중관의 논리학서들, 사백론, 입중론, 입보리행론, 아비달마집론, 아비달마구사론, 비나야수트라, 지식논평석 등을 가르쳤다.

이 무렵 티베트에 총카파를 지도할 스승은 없었다. 특히 사캬파의 뛰어난 번역관인 탁창로차와의 공개적인 찬탄은 젊은 총카파를 최고의 선지식 반열에 오르게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홀로 공성의 문제와 씨름하던 총카파에게 다가온 인물이 라마 우마파였다. 그는 문수보살을 친견해 직접 가르침을 들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진 특별한 수행자였다. 총카파는 우마파를 매개로 문수보살로부터 공관(空觀)에 대한 법문을 들을 수 있었고, 그의 권유대로 절, 참회, 만달라 공양 등을 통해 공덕을 쌓아 마침내 공성(空性)을 성취할 수 있었다.

▲ 총카파의 제자인 잠양초제가 스승의 가르침을 펴기 위해 라사 서북쪽에 창건한 드레풍사원.

이후 총카파는 잘못된 이론과 이해·실천에 대해 과감하게 비판하기 시작했다. 그의 법문은 늘 거침없었지만 경론에서 한 치도 어긋나는 법이 없었다. 1392년, 36살의 총카파는 겔룩파를 창건해 청정비구집단으로서의 티베트불교를 개혁하는 데 앞장섰다. 특히 총카파는 68게송으로 이뤄진 ‘보리도등론(菩提道燈論)’을 집필해 현교와 밀교의 조화를 추구했던 아티샤(Atiśa, 982~1054)를 각별히 존경했고 그를 따르고자 했다. 때마침 디쿵사원의 로첸 등 여러 학승들이 ‘보리도등론’의 주석서를 지어달라는 부탁을 받아들여 집성한 것이 티베트불교 역사상 최고 걸작 중 하나로 꼽히는 ‘보리도차제대론(菩提道次第大論)’이다. ‘람림첸모(Lam rim chen mo)’라고도 하는 이 책은 1402년 총카파가 시대적 사명과 정법 구현의 의지를 가지고 쓴 것으로 단순한 철학서가 아니라 철저히 실천을 위한 서적이었다.

여기에는 불교에 귀의하는 방식에서부터 불교수행자가 실천해야 할 지관명상의 수행단계에 이르기까지 소승과 대승의 모든 수행법, 밀교의 독특한 수행법에 대한 본질과 순서를 상사도, 중사도, 하사도의 3가지 근기로 나눠 상세히 설명한 방대한 문헌이었다. 종파를 넘어 수많은 고승을 찾아다니며 직접 체험하고 수많은 문헌을 섭렵했던 총카파가 아니라면 엄두조차 낼 수 없었다.

총카파는 후학들을 이끌면서도 끊임없이 책을 썼다. 그것은 티베트불교를 바꾸는 길이라는 그의 확신에서 비롯된 일이었다. ‘설정차제주석’ ‘비밀집회탄트라’ ‘비밀도차제론’ ‘정리대해’ ‘보리도차제중론’ ‘중관밀의선명소’ ‘선설심수’ 등 현교와 밀교를 아우르는 역작들을 연이어 집필될 수 있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겔룩파의 14대 달라이라마(1935~)가 “비구로서 굳은 신념, 꾸준한 노력, 광범위한 공부의 섭렵, 그리고 한 번 들으면 이지 않는 명석한 두뇌의 소유자”라고 찬탄했던 총카파. 그는 63살 되던 1419년 10월25일 이른 아침에 제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공성을 관찰하며 입적했다. 그 순간 16살 소년의 모습을 한 문수보살이 출현하는 이적이 일어났다. 총카파가 ‘비밀집회탄트라’ 성자류 구경차제에서 밝혔듯 그 스스로 ‘광명’의 경지를 체득했기에 가능한 현상이었다.

한편 탁창로차와가 티베트 최고의 학승인 총카파에게 보낸 편지는 겔룩파 승려인 투칸 롭상최키니마(1737~1802)가 쓴 총카파 전기에 수록돼 있다.

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참고자료 : ‘깨달음에 이르는 길’(총카파 저, 청전 역, 지영사), ‘티벳밀교’(출팀 깰상, 마사키 아키라 저, 차상엽 역, 도서출판 씨아이알), ‘쫑카빠의 유가행 수행체계 연구’(차상엽, 동국대대학원 박사학위논문), ‘쫑카빠의 유식공 연구’(이효주, 동국대대학원 석사학위논문), ‘현관장엄론 수행체계의 밀교사적 위상 고찰’(정성준, 천태학연구 제10집)

[1294호 / 2015년 5월 1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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