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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재가불자, 왜 승가에 편입되려 하나”

기자명 법보신문
  • 기고
  • 입력 2015.05.13 17:35
  • 수정 2015.05.24 19:46
  • 댓글 90

조계종 교육원장 현응 스님 본지 기고문서 지적

조계종 교육원장 현응 스님이 법보신문에 기고한 ‘재가불자의 길을 묻다-출가자와 재가자의 관계’에서 오늘날 한국의 불자들이 승가에 편입되기를 희망하는 태도에 대해 비판했다. 스님은 “한국의 인구에서 조계종단 스님 숫자는 0.02%로서 극소수인 출가자가 그들에게 적합한 형태로 불교를 만들어가고 있지 않은지 생각해봐야 한다”며 “명상과 삼매 위주의 불교, 세밀한 교리탐구 위주의 불교는 출가자에게 적합한 형태로 진화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특히 스님은 “재가불자 역할이 사찰과 불교자산 관리하는 일이라 지나치게 강조하면 재가불자의 역할을 축소해 호도하는 일이다. 재가불자들이 굳이 2000년 전 인도의 무소유승단을 외호하듯 출가승려를 외호해야 한다는 의무감에 사로잡힐 것은 없다”며 “0.02%의 종무원을 제외한 대다수 재가불자들은 이제 홀가분하게 사찰과 출가 승려를 떠나 대승불교의 현장인 사회현장 속으로 들어가 바라밀을 행해야할 것”이라고 밝혔다.      편집자 주

■조계종 교육원장 현응 스님 기고 전문

조계종 승려 전체 국민 0.02%
출가자 적합한 형태로 진화된 것
애초 출가목적은 도인이 되는 것
승납 10년 넘으면 80%가 자산관리

재가자 사찰·자산관리 운영 주장은
재가불자역할 축소·호도하는 일
승려는 특수직 수행하는 전문인
재가자 ‘외호’ 의무감 벗어나야

재가불자의 본령은 바라밀행
반야·자비 실현해야 할 장소는
사찰 아닌 중생계인 사회현장

▲ 조계종 교육원장 현응 스님은 “대승불교는 재가불자들이 불교의 중심이라는 강한 주장을 전면에 내세우는 불교이며, 보살행을 통해 중생계를 불국정토로 만들자는 불교”라며 “그래서 ‘비구’라고 불리는 출가승려가 중심이 되는 불교에서 ‘보디사트바(보살)’가 중심이 되는 불교로 바꾸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 재가불자들의 신심과 신행활동의 적극성은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어릴 적부터 불공 가는 어머니를 따라 절에 가본 경험이 있거나, 소풍과 여행으로 경치 좋은 명승지에 자리 잡은 사찰에 방문한 경험을 가진 상당수의 한국인은 자연스럽게 불자로 자처하게 되는 단계에 이르곤 한다.

재가불자라는 의식을 하는 정도가 되면 5계, 8계, 10선계, 보살계 등 수계를 하게 되고, ‘○○거사’ ‘△△보살’이라는 법명을 가지고 법회 등 각종 활동을 위해 사찰을 찾는다.

삼보에 귀의하고 불보살을 신앙하는 불자들, 불공과 기도를 하는 불자들, 사찰순례를 하고 스님들에게 설법을 듣는 불자들, 시민선방에서 참선하는 불자들, 안거결제에 참여하는 불자들, 재가자이지만 출가자 중심의 승가에 편입되고 싶어 하는 불자들(재가불자의 일부는 약 15년 전부터 ‘재가불자들도 승가에 포함된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과문한 탓이지만 이런 정도의 왕성한 신행활동을 하는 재가불자를 가진 나라들이 있을까 싶다. 그런데 오늘날 이러한 한국 재가불자의 모습은 ‘재가불자와 출가승려’의 길을 동일한 성격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즉 재가자와 출가자는 불교의 교리를 이해하는 수준의 깊고 옅음의 차이, 준수해야 되는 계율의 규모와 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동일한 목표를 구현하기 위한 길을 가고 있다는 것이다. 재가자는 초보적인 것이고 점차 완성도가 높아지면 출가 승려의 단계에 이른다는 소박한 생각이다.

그러나 대승불교적 시각으로 보면 이는 순진한 생각이다. 대승불교는 재가불자들이 불교의 중심이라는 강한 주장을 전면에 내세우는 불교이며, 보살행을 통해 중생계를 불국정토로 만들자는 불교이다. 그래서 ‘비구’라고 불리는 출가승려가 중심이 되는 불교에서 ‘보디사트바(보살)’가 중심이 되는 불교로 바꾸어져야 한다고 말한다.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서나 출가자는 극소수이다(한국의 인구에서 조계종단 스님 숫자는 0.02%임). 그런데 극소수인 출가자가 그들에게 적합한 형태로 불교를 만들어가고 있지 않은지 생각해봐야 한다. 명상과 삼매 위주의 불교, 세밀한 교리탐구 위주의 불교는 출가자에게 적합한 형태로 진화된 것이라 생각된다.

재가불자들은 약 2000년 전, 이러한 출가자에게 적합한 불교보다는 일반대중에게 적합하고 필요한 불교를 만들어갔다. 대승불교시대, 대중불교시대를 연 것이다. 일반대중이 받아들이고 실천할 수 있는 대승(대중)불교는 출가승려의 불교와 그 방법이 다르다. ‘대승’은 높은 경지를 뜻하는 질적인 표현이 아니라, 소수가 아닌 ‘대중적’이라는 양적인 표현이다.

출가자는 특정한 임무를 수행하는 집단으로서 내부규율인 계율생활을 해야 하는 생활상의 한계가 많다. 그래서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이 있고, 잘 할 수 있는 일과 그렇지 못한 일이 많다. 그리고 출가자의 불교는 많은 제약과 한계 속에서 특수한 형태로 진화할 수밖에 없으며, 사회생활을 떠나 있기에 방관적이고 논평적일 수밖에 없다.

이에 반해 ‘재가불자의 불교(대승불교)’는 생활(직업) 속에서 불교의 가치를 구현하고, 불교의 윤리의식으로 사회의 평화와 번영을 이뤄가기 위해 사회적 노력을 하는 것이다. 대승정신의 재가불자들은 스스로를 보디사트바로 내세우길 좋아하지, 승가의 일원이 되는 것을 꿈에도 바라지 않을 것이다.

한국의 출가승려가 대승불교권에 살고 있어서 비록 대승경전을 많이 읽고 보디사트바의 길을 흠모하더라도 그 길을 걸을 수 없다. ‘빽빽한 중생계의 숲에 들어가 그 차별상을 잘 알아서 보시, 애어, 이행, 동사섭의 바라밀을 펼치면서 자비행을 한다는 것(화엄경 십지품)’은 그저 염불이나 설법으로서 밖에 할 수 없다. 우선 계율과 종단의 율법이 사회적 보살행을 제약하고 있다. 그리고 오늘의 첨단문명시대의 사회는 전문적인 학습과 각종 노력을 통해서 그 세부사항이나 전체 시스템을 알게 되는데, 사찰생활과 명상수행에 전념하는 출가승려는 사회를 제대로 알 수 있는 지식과 경험을 갖지 못한다.

대승불교는 이러한 문제를 2000년 전부터 통감하고 세상과 역사 속에서 작동되는 불교를 만들기 위해 대승불교를 표방했다. 재가불자가 앞장서는 사회적 보살행이야말로 대승불교 출현의 원인이다. 출가승려에게 사회적 보살행을 기대할 수는 없다. 오히려 출가승려는 ‘반야를 바탕한 자비방편행을 말하는 대승불교’를 ‘추상적이고 번다한 존재론’으로 굴절시켰고(중국 화엄종), 불교를 심층심리학의 영역으로 이해(중국 법상종)하는가 하면, ‘마음 깨치는 불교’(중국 선종)로 변절시키는 반대승적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출가 승려는 과거에도 그러했지만 오늘의 현실에서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2600년의 지난 모든 불교를 담지하여 다음 세대까지 전승하는 일, 즉 불교의 혜명(慧命)을 잇는 거룩하고 엄숙한 임무를 담당하는 일이다. 출가승려란 불교 선생님(스승)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학교의 선생님은 학생을 가르치는 일을 하지만 직접 사회활동을 하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출가승려도 불교의 역사와 교리를 가르치지만 직접 사회 속에서 실천하는 것은 아니다. 출가승려가 대승불교까지도 출가승려에게 적합한 내용으로 해석하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한국의 경우, 출가승려에게 또 하나 번거로운(좋은 것일 수도 있는) 임무는 지난 1700년간 한반도에서 형성된 불교의 유형적 자산을 관리하고 유지 전승하는 일이다. 이 일은 정말 고달프다. 조계종단의 스님들이 주로 이 임무를 담당하고 있다. 애초의 출가목적은 수도하여 훌륭한 도인이 되는 것이었는데, 종단 구성원의 책무상 승납 10년이 넘으면 80%이상이 사찰과 불교자산을 관리 운영하는 일을 맡게 된다.

생각지도 못한 일을 하게 되는 경우지만, 이 일은 하다보면 익숙해지기도 하고 한편으로 늘 마음으로 불편해 하기도 한 일이다. 하지만 현대사회에서 사찰운영과 불교자산을 관리하는 일은 매우 전문적인 능력을 요구한다. 출가승려에게 적합한 일이 아니다. 그래서 종무원의 보조를 받는다.

수년 전부터 종단에서는 출가자는 수도와 교화의 일에 전념하고, 재가불자가 사찰과 불교자산을 관리 운영해야 한다는 요구가 일어나고 있다. 그러나 재가불자의 역할이 사찰과 불교자산 관리하는 일이라 지나치게 강조한다면 재가불자의 역할을 축소하여 호도하는 일이 될 것이다. 사찰과 종단의 관리업무를 담당하는 종무원의 일 또한 중요한 재가불자의 몫이라 할 수 있지만, 그 숫자가 많아야 1만 명을 넘을 수는 없는 소수자의 일이라서 언필칭 2천만 불자라 하는 재자불자의 보편적 영역이 아니기 때문에 큰 의미는 없다.

재가불자들이 진심으로 나아갈 길은 어디인가? 바로 중생계이며, 구체적인 한국사회 현실이다. 화엄에서 말하는 그 ‘중생계의 빽빽한 숲’ 말이다. 거기서 10바라밀을 행하면서 보디사트바의 삶을 사는 일, 이것이 진정 재가불자의 나아갈 일일 것이다.

재가불자가 현실에 지치고 힘들 땐 사찰에 가서 불보살을 경배하며 불교의 가치와 원력을 되새기기도 하고, 출가자로부터 설법을 듣고 위로와 휴식을 취할 수도 있다. 집안에 애경사가 생기면 사찰에서 불공을 하거나 천도재를 행할 수도 있다. 그러나 보디사트바의 본령은 바라밀행이며, 재가불자가 반야와 자비를 실현하는 장소는 사찰이 아니라 중생계인 사회현장이다.

생활 속에서 보살행(각종 바라밀)을 행하기에도 바쁜 대다수 재가불자들이 사찰운영, 종단운영을 제대로 하고 있나 살핀다거나, 출가자의 계율준수를 감시하고 지적하는 그런 문제에 시간을 낭비하기에는 너무 아까운 일이다.

출가자와 재가불자의 바람직한 관계가 특별하게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출가승려는 재가불자를 보디사트바로서 존중하여야 할 것이고, 재가불자는 스님들을 삼보로서 존경을 표하거나, 그럴 수 없는 경우에는 불교관련 특수한 직무를 수행하는 전문인으로 예우하면 될 것이다. 대신 출가자와 재가불자는 각자의 역할과 나아갈 길이 있다. 출가승단은 경제적 측면에서만 국한해본다면 현재 물려받은 사찰과 불교자산을 관리운영하면서 각종 법회를 한다거나 노력을 해서 살아가는데 큰 문제가 없어 보인다. 출가승단은 불교자본가란 뜻이다. 재가불자들이 굳이 2000년전 인도의 무소유승단을 외호하듯 출가승려를 외호해야 한다는 의무감에 사로잡힐 것은 없다. 0.02%의 종무원을 제외한 대다수 재가불자들은 이제 홀가분하게 사찰과 출가 승려를 떠나 대승불교의 현장인 사회현장 속으로 들어가 바라밀을 행해야할 것이다. 한국사회에서 불교정신과 가치관이 작동되고 안 되고는 재가불자인 보디사트바에 달려있다.

[1295호 / 2015년 5월 2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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