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사형수로 만난 부처님, 3000일 참회기도 끝에 새 삶

기자명 법보신문

포교원장상(최우수상)-경오(법명)

▲ 일러스트=강병호 화백

“경오(耕悟·법명)씨, 상고 판결문이 왔습니다.”

수갑 찬 손을 창살 사이로 내밀었다. 근무자가 전해주는 판결문을 손에 쥔 순간, 알 수 없는 감정들이 나를 휩쓸고 지나갔다. 2심까지의 재판결과가 사형이었기에 삶에 대한 희망은 접어버렸지만, 혹시나 하는 일말의 기대감이 판결문을 읽게 만들었다. 기대가 무너지기까지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상고를 기각한다’는 내용이다. 그날 이후 나는 사형수의 삶을 시작하게 됐다. 목숨을 내어놓고 사는 삶, 희망이란 단어를 가슴에서 지워야 하는 삶, 그렇게 후회와 고통 속에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꽃피는 3월에 나는 사형수가 됐다.

돈의 유혹에 빠져 사람을 해쳐
사형 선고된 후 두려움에 고통

부처님께 참회하란 어머니 말씀
3000배 올리면서 삶 되돌아봐

소중한 인연 통해 불법 배우고
절·사경하며 피해자들에 참회


부처님 가피로 무기수로 감형
끝없이 속죄하면서 살아갈 것

사건이 있었던 날이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방탕하고 무절제한 생활에 빠져 가족들을 실망시키고 허송세월하던 시기였다. 불빛을 쫓는 나방처럼 자극적이고 정신을 황폐하게 만드는 쾌락만을 추구했다. 그때는 옆에서 놀아주는 친구가 우선이었고, 주변에서 충고를 해주는 사람들은 모두 귀찮은 존재로 느껴졌다. 그러다 돈의 유혹에 빠져 사람을 해치는 어리석은 짓을 저질렀다. 그날 이후로 나의 삶은 긴 어둠의 터널 속으로 들어갔다.

매일 아침 눈을 뜨지만 살아있다는 느낌을 가질 수 없었다.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죽음 앞에서 혼이 나가버린 사람처럼 존재할 뿐이었다. 그래도 가족들은 나를 사람 죽인 살인범, 죽음을 기다리는 사형수로 보지 않고 여전히 착한 아들, 좋은 오빠로 대해주었다. 구치소에 있으면서 숨통이 트이는 순간은 뭐니 뭐니 해도 접견시간이었다.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생활 중에 가족들의 위로와 사랑이 나를 안정시켜 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처음 접견장에 갔을 때는 괴로움뿐이었다. 왼쪽 가슴에 사형수를 나타내는 붉은 수번을 달고 손목엔 수갑을 찬 채로 접견실로 들어갔다. 그 모습을 본 아버지와 여동생은 그 자리에서 바로 무너져버렸다. 부모의 눈에 수갑 찬 아들의 모습이, 또 여동생의 눈에 초췌한 오빠의 모습이 좋게 보일 리 없었을 터이니, 그렇게 괴로워하는 가족의 모습에 나 또한 고통이 심했다. 물밀듯이 밀려오는 후회와 자책으로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사형수로 사는 것도 사는 것이라고 시간은 변함없이 흘러갔다. 그러던 중 사형집행 소식을 듣게 됐다. 구치소는 온통 어수선했고 접견을 다녀온 사람들이 누가 죽었다는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나는 얼이 빠져 뒤 마려운 강아지마냥 방 안을 계속 서성거렸다. 창밖으로 직원의 모습만 보여도 가슴이 내려앉아 어찌할 바를 몰랐다. 마약에 취해 돈 때문에 다른 이의 소중한 목숨을 앗은 내가 정작 스스로의 목숨은 무엇보다 아끼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였던 것이다. 그 모습이 부끄러웠지만 나로선 죽고 싶지 않다는 마음뿐이었다. 그렇게 한동안 정신을 차릴 수 없었고 넋이 나간 사람처럼 살았다.

“경오야, 부처님께 참회하고 빌어. 엄마 마지막 소원이야.”

불현듯 어머니의 부탁이 떠올랐다.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죽기 전에 뭔가 해야 할 일이 생긴 것이다. 부랴부랴 교무과 불교담당을 만나 면담을 했고, 오랜 세월 사형수교화를 담당해온 노병섭 법사님을 만났다. 그렇게 시작된 불교공부는 조금씩 내 마음에 자리 잡기 시작했다. 하루는 꿈속에 처참하게 죽어간 피해자들이 나타났다. 나를 향해 다가오는 그들을 피하기 위해 발버둥을 쳤지만 몸을 옴짝달싹 할 수 없었다. 잠을 깨고 나서도 가슴이 진정되지 않았다. 나는 법사님께 꿈 이야기를 했고, 법사님은 3000배 정진을 해법으로 내놓았다. 진심을 담아 참회를 하면서 한 배 한 배 정성을 쏟아야 한다고 했다. 사실 그동안 내 처지를 비관해 원망과 후회만 할 줄 알았지 한 번도 진심을 담아 참회를 해 본적이 없었다.

다음날 일찍 일어나 냉수로 몸을 정갈히 하고 법당으로 갔다. 오전 9시부터 부처님께 절을 올리기 시작했다. 옆에선 법사님이 참회진언을 해주셨다. 어느새 나의 눈엔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 내렸다. 절이 어느 정도 진행되자 다리는 후들거렸고, 수갑 찬 손목은 천근이나 된 듯이 들어올리기도 벅찼다. 2000배를 넘기면서 몸에 한계가 왔다.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몰록 생겨날 즈음 법사님의 호통이 내리쳤다.

“피해자를 생각하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 소릴 듣는 순간 다시 마음을 다해 절을 하기 시작했다. 아침 일찍 시작한 3000배는 오후 늦게 점검시간이 다 되어서야 끝이 났다. 수갑 때문에 손목은 다 까지고, 온 몸은 물먹은 솜처럼 무거웠지만,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 편안했다. 절을 하면서 나를 낮추고 참회하는 수행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방에서는 주로 ‘법화경’을 독송하고 사경했다. 부처님의 말씀을 글로 옮기다보면 죽음에 대한 공포가 희미해지는 게 느껴졌다. 지금은 세상에 안 계시지만 노 법사님의 가르침에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공부 중에 부처님의 가피로 소중한 분들과 인연이 닿았다. 불교여성개발원에서 여러 법사님들이 불자사형수들과 함께 공부하기 위해 구치소를 찾은 것이다. 그분들과의 만남은 삶을 바라보는 시각을 바꿔놓았다. 누구라도 경원시하고 두려워하는 사형수들을 죄의 무게로 바라보지 않고 똑같은 사람으로 동등하게 대해주었다. 외부인에게 쉽게 마음을 열지 못했던 나는 그분들의 진실한 보살행에 마음을 다해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매주 한 번씩 법사님들께 ‘금강경’을 배우면서 삶과 죽음에 대한 지나친 집착을 버릴 수 있었다. 법사님들은 불자 사형수들에게 1000일 기도를 제안했고, 우리는 흔쾌히 기도에 동참했다.

그렇게 1000일 기도를 회향하고 다시 2000일 기도를 입재했다. 법사님을 모시고 ‘금강경’에 담긴 깊은 뜻을 배우고, 방으로 돌아와서는 사경에만 몰두했다. 죽음을 목전에 두고 하는 공부라 그만큼 절박했다. 불교공부를 하면서 내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었다. 마약에 취해 가정을 등한시한 것도, 성실하게 살 생각은 안하고 일확천금만 바란 것도, 급기야 돈의 유혹을 이기지 못해 사람을 죽인 것도, 모두가 스스로 짓고 스스로 거두는 누구의 탓도 아닌 내 탓이었다. 가난한 부모를 원망하고, 살아가는데 도움을 주지 않는 형제들에게 입에 담지 못할 악담을 퍼부었고, 세상을 비판하는 것으로 하루를 보냈다. 부처님의 말씀이 담긴 경전을 공부하면서 과거의 내 모습이 부끄럽게 느껴졌다.

사형수로 산지 십년차를 넘기면서 삶 자체가 고맙게 감사하게 느껴졌다. ‘이젠 형이 집행돼도 기꺼운 마음으로 갈 수 있겠다’ 생각했다. 2000일 기도는 순조롭게 진행됐다. 열의를 가지고 지도하시는 법사님들과 한 마음으로 공부에 매진하는 도반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돌이켜보면 그 어느 시간보다 내 자신과 삶에 대해 진지하게 마주할 수 있었던 순간이었다. 어느새 2000일 기도도 막바지로 향하고 있었다. 수용자가 관규를 위반하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기도기간에는 더더욱 몸과 마음의 처신에 신중을 기했다. 그렇게 2007년이 지나갔고, 2008년 새해가 밝았다.

2008년 1월1일…. 냉수욕을 하고 여느 때와 다름없이 ‘금강경’을 독송하고 있었다. 그때 직원이 갑자기 방문을 열었다.

“경오씨, 옷 입고 나오세요. 과장님과 면담이 있습니다.”

순간 여러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휴일에 급작스런 만남이라니….’ 직원을 따라 문밖을 나와 보안과장실로 걸음을 옮겼다. 직원의 안내로 보안과장님과 마주하게 됐는데 “무기징역으로 감형됐습니다. 축하합니다”라는 말을 건네는 것이었다. 도무지 무슨 상황인지 어안이 벙벙했다. ‘감형이라니. 마약에 취해 무고한 생명을 앗아버린 나 같은 놈에게 감형이라니….’ 믿기지 않는 현실 앞에서 눈물만 흘렸다. 감형장을 받아들고 방으로 돌아올 때는 발이 바닥에 닿지 않는 듯 둥둥 떠다니는 기분이 들었다. 이미 소식을 들어 알고 있었던 여러 직원들이 축하와 격려를 해 주었다. 휴일이 끝나고 득달같이 달려오신 아버님은 나를 보자마자 눈물을 흘리셨다.

“고마워서 너무 고마워서 어쩌지를 못하겠구나. 이젠 건강해야 한다. 그래야 나중에 밖에서 같이 살지. 수번도 바뀌고 좋구나.”

나의 왼쪽 가슴에는 사형수를 상징하는 붉은색 수번 대신 노란색 수번이 박혀 있었다. 나는 눈물만 흘릴 뿐 어떤 말도 하지 못했다. 자식이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 모르는 상태에서 매일 매일을 어떤 마음으로 사셨을지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감형 소식에 누구보다 기뻐하셨던 또다른 분들이 계셨다. 바로 2000일 기도를 같이 해주신 불교여성개발원의 법사님들이다. 부처님의 가피에 감사함을 전하는 법회를 모시던 중에 몇몇 법사님들은 눈물을 흘리셨다.

방을 확정수들이 생활하는 곳으로 옮겼다. 이곳에 잠시 있다가 앞으로 오랜 세월을 지내야 하는 교도소로 옮겨가는 것이다. 사경과 108배는 장소와 관계없이 계속하였다. 공부를 하는 목적이 참회와 속죄에 있었기에 한시도 멈출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내 수번이 불리고 나는 호송버스에 몸을 실었다. 버스가 서서히 움직이니 구치소의 거대한 정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가슴이 뛰었다. 죽어서나 이 문을 나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살아나가게 되다니. 내 삶의 한 부분을 구치소에 남기고 버스는 부산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부산교도소에 도착해 방을 배정받고 양재공장에 출역을 했다. 일을 하며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에 ‘정말 열심히 살겠다’는 각오를 다졌다. 얼마 후 불교종교실로 방을 옮겨 조금 더 체계적으로 공부를 시작했다. 이곳에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고 익히고 행하려는 마음으로 모인 수용자들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공부에 매진하고 있었다. 새벽 일찍 아침을 여는 불교방은 참회의 108배로 하루를 시작하고 있다. 그 시간만큼은 모두가 마음을 다해 부처님 전에 참회의 절을 올리고 있다. 그렇게 교도소생활에 적응하던 중에 슬픈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아버님의 부고를 접한 것이다. 뇌출혈로 갑자기 쓰러지셔서 급히 수술을 받으셨지만, 끝내 명마를 이기지 못하시고 돌아가시고 말았다. 모든 게 아버지의 가슴에 수많은 대못을 박은 내 탓으로 느껴져서 얼마간 밥도 제대로 넘길 수 없었다. 다시는 아버지를 뵐 수 없다는 생각에 가슴이 미어졌다. 그저 부처님 전에 세상근심 다 털어버리고 극락왕생하시길 빌고 또 빌었다.

구속 당시 어렸던 아들과 딸이 이제는 훌쩍 커서 성인이 되었다. 못난 아비를 끝까지 버리지 않고 감싸주어서, 나를 하염없이 부끄럽게 만드는 아이들이다. 원인 없이 결과가 있을 수는 없는 법이다. 미래의 모습 또한 현재를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살아 있는 동안 피해자에 대한 속죄는 멈추지 않을 것이며, 진정한 참회 없이는 무엇 하나 이룰 수 없다는 사실을 가슴에서 놓지 않겠다. 나의 잘못으로 지금도 고통 받고 계실 피해자 가족들에게 무릎 꿇고 사죄를 올리며, 끝없이 속죄하며 살아갈 것을 약속드린다.

[1295호 / 2015년 5월 2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