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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전 학교폭력 피해, 부처님 손잡고 진짜 내 길 걸으며 극복

기자명 법보신문

총무원장상(대상)-김호준

▲ 일러스트=강병호 화백

부처님 앞까지만 데리고 가면 달라질 것이란 믿음이 있었다. 이런 저런 사연으로 배배꼬여 버린 소년들에게 부처님을 소개해주고 싶었다. 부처님을 만나 달라진 경험도 있었기에 소년들에게도 부처님의 위대한 유산을 안겨주고 싶었다. 소년들을 데리고 불지종가(佛之宗家) 통도사로 향했다. 학교에서 통도사까지 가는 일도 만만치 않았다. 소년들이 통도사 대웅전 부처님 전에서도 말썽을 피우지나 않을까, 다른 신도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을까 걱정됐다.

선생님의 갑작스런 뺨 체벌
꿈·희망·학업의지 잃고 방황
동물 좋아했던 마음도 시들
뺨맞던 소리 환청으로 남아
재수·삼수생 폭력에 주눅도

부처님에게 빌고 빌던 어머니
함께 절하며 흘린 뜨거운 눈물
선생님 꿈 새롭게 가진 계기

방황하는 학생들 지도하면서
부처님과 인연 맺어주며 환희

부처님은 부처님이셨다. 대웅전 안에서 문제만 피우던 소년들이 사라졌다. 교실에서 삐딱하게 앉아 교사에게 반항하던, 징계기간에도 담배 피우다 적발된, 무풍한송(舞風寒松) 길에서 걸음도 걷지 못했던, 대웅전 들어서기 전가지 날선 눈빛으로 원망하던 소년들은 없었다. 포단 위에 신심 가득한 보살님들 따라 절하는 작은 부처님들이 나타났다.

30년 전, 부처님을 만나고 다시 꿈을 찾은 소년이 떠올랐다. 소년은 부처님 가피로 17년째 교무실 책상유리 밑에 ‘반야심경’을 넣고, 책꽂이엔 ‘금강경’을 꽂고 선생님의 길을 걷는다. 소년은 통도사 아래서 17년째 고등학교 선생님의 길을 걷고 있다. 학교 학생부장 소임을 맡으며 교내 선도 프로그램을 운영 중이다. 수요일엔 통도사 무풍한송 길을 걸어 부처님 전에 절을 올리는 시간을 갖는다.

부처님을 만나기 전 소년은 늪에 빠졌다. 고등학교 시절 방황하며 공부를 못했다. 1985년 3월초 진주에 있는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당시 진주는 연합고사 적용지역으로 입학시험 커트라인 점수가 높았다. 경남권 서부지역 각 중학교에서 공부 좀 한다는 학생들이 모여들었다. 소년도 초등학교 입학 후 중학교까지 반장, 부반장 소임을 수행하는 등 자신감이 있었다. 책임감 있게 임무를 행한다는 담임선생님들 의견도 늘 성적표 한 부분을 차지했다. 동네 어른들도 소년의 일거수일투족을 보며 높은 기대를 거는 편이었다.

그러나 1985년 3월16일 토요일 오전 10시5분 2교시, 늪이 소년을 삼켰다. 서부경남에서 공부 좀 한다는 학생들과 입학 후 친해진 시점이었다. 부푼 꿈을 안고 각지서 온 학생들이 주말을 맞아 수업 시작 전 떠들고 있었다. 수업에 들어온 선생님은 조용히 하라고 2~3차례 고함을 질렀다. 소년 뒤에 앉은, 산청에서 왔다는 친구가 소년을 불렀다. 소년은 돌아봤고, 그 때 소년의 인생은 늪에 발을 들여놓았다.

“고개 돌린 너, 나와!”

선생님께 불려 나가며 최소한 5대는 맞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시절엔 그랬다. 선생님들의 체벌은 다반사였다. 학생들은 왜 맞는지 생각조차 하지 않고 맞았다. 소년의 뺨으로 손바닥이 날아들었다. 1대, 2대, 3대, 4대, 5대…. 끝난 줄 알았다. 6대, 7대…. ‘이건 아닌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붉어지는 소년의 뺨은 생기와 자존감을 잃어갔다. 23대, 24대, 25대 그리고 58대…. 소년의 꿈은 산산이 흩어졌다. 소년의 뺨엔 꿈이 찐득하게 녹아내렸다. 가슴에 품었던 꿈이 조각났다. 소년의 꿈이 흥건하게 녹아내리는 교실은 침묵했다.

서울대 축산학과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국립종축원에서 일하고 싶었다. 우리나라를 축산대국으로 만들고 싶었다. 초등학교 시절 유일한 놀이는 노파들을 따라 들로 산으로 나가 나물 캐거나 나무하러 갈 때 따라 다니는 일이었다. 닭이 친구였다. 봄이면 병아리를 길렀다. 어미닭이 낳은 병아리가 부화해 자라는 모습을 관찰하는 게 놀이였고 취미였고 공부였다. 인근 농업고교생들이 보는 가금(家禽), 중소가축, 대가축 교과서를 구해 읽었다. 소년에겐 동화책들이었다. 농고 실습장을 방문해 농고생들이 가축 기르는 것을 지켜보는 게 일상이었다. 진주지역 고등학교에 진학한 것도 서울대 축산학과 진학을 향한 여정이었다.

하지만 뺨에 손바닥이 58차례 지나간 후, 소년은 예전의 소년이 아니었다. 소년은 뺨 58대를 맞고 꿈이 녹아내린 흔적을 훔치며 자리로 돌아왔다. 만난 지 2주일 지난 날, 다른 친구들 앞에서 만신창이가 됐다. 부끄럽고 두려웠다. 학교생활을 어떻게 이어갈지 깜깜하기만 했다. 가방 들고 교문을 나섰다. 정처 없는 발걸음이 닿은 곳은 어릴 적 축산학도 꿈을 키웠던 고향의 농고 실습장이었다. 여물을 되새김질하는 소, 어릴 적부터 그렇게 좋아했던 닭들도 위로가 되지 못했다. 꿈이 녹는 날, 학업의지도 함께 녹아버리고 말았다.

환청이 귓가를 맴돌기 시작했다. 학교로 돌아왔지만 위로와 치유는 없었다. 문제아가 됐고 공부할 의지도 잃었고 학업을 이어갈 이유도 찾지 못했다. 그냥, 숨만 쉬었다. 학교에서는 재수생과 삼수생의 눈길이 기다렸다. 중학교 졸업 후 고등학교에 바로 진학하지 못해 학원에서 재수, 삼수를 하면서 나쁜 환경에 노출된 이들도 있었다. 어른들의 일탈을 일찍 경험한 것이다.

그들은 유흥비가 필요했다. 집에는 학교 인근 식당에서 밥을 사먹는다는 말로 거짓말하고 돈을 받아 써버리기 일쑤였다. 소년의 도시락은 그들의 허기진 배를 채웠다. 쉬는 시간이면 교실에서 도박을 했다. 그들의 기세에 눌린 학생들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축구 도박에 이용되기도 했다. 다른 반과 내기 축구를 해서 이기면 돈을 가로챘고, 지는 날엔 상대편 반에게 돈을 주지 않았다. 그들의 요구에 응하지 않은 학생들은 세면장으로 불려가 맞았다. 부모님 품을 떠나 청운의 꿈을 간직한 학생들이 두들겨 맞는 것이다. 때리는 학생들 숫자는 늘 많았다. 소년은 그들의 위세가 두려웠고, 울분을 느끼기도 했다. 그럴 때면 58대의 환청이 소년의 귓가를 더욱 세차게 때렸다.

소년은 고해(苦海)가 된 학교가 두려웠다. 저 멀리 달아난 교과진도가 두려웠다. 의미 없이 자율학습 머릿수를 채워야 하는 현실이 싫었다. 야간에 선생님들이 빠져나간 자리에 권력자로 군림하는 재수생, 삼수생이 두려웠다. 귓가를 맴도는 58대의 환청이 떠나지 않아 괴로웠다.

소년이 자라 중년이 된 후에도 환청은 귓가를 맴돌았다. 군에 입대한 후에도 혹시 모를 운명의 손찌검을 당할까 노심초사했다. 그 뿐이던가. 직장에 와서도 첫 몇 년 동안은 3월16일 무렵이면 그 환청이 들렸고, 몸은 움츠러들었다.

학업을 포기한 지 1년 반이 지난 날 키는 180cm, 몸무게는 58kg에 불과했다. 소년은 마음도 몸도 말라갔다. 어릴 적 꿈을 가슴에 심어 물 주고 거름 주며 실하게 키웠던 소년은 더 큰 꿈을 꾸기 위해 온 곳에서 가지가 부러졌고 뿌리마저 썩어갔다. 다른 학생들은 두꺼운 수학 정석 참고서를 몇 번이나 반복할 때 소년은 숨이 멎는 순간을 궁리하고 궁리하고 또 궁리했다. 어머니는 아들을 위해 부처님 전에 기도하고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부처님은 쪼그라든 몸을 폈고, 허우적대던 늪을 말려버렸다. 고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 보충수업에 참석하지 않은 날이었다. 소년은 153cm 작은 체구의 어머니 뒤를 따랐다. 소년은 절로 향하는 어머니 등만 바라봤다. 어깨도 펴지 못하고 고개를 숙인 채. 말을 잃은 소년의 얼굴에는 비애가 패였다. 바닥으로 추락한 성적, 고해(苦海)로 변한 학교, 괴물 같은 재수생과 삼수생들의 횡포가 빚어낸 얼굴이었다. 세상 만물이 자신을 외면하고 자신은 더 이상 가치 없는 존재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꽉 채운 나날을 보냈다. 현실 모든 것이 예리한 칼날로 변해 자신을 향하는 듯한 고통에 시달렸다. 자신을 이렇게 만든 사람들에 대한 원망, 세상에 대한 부정만이 그나마 소년의 삶을 지탱했다.

어머니와 도착한 운흥사. 갈맷빛 산 위에 있는 하얀 바위가 소년을 보고 웃었다. 입학 후 꿈이 녹아 흘린 상처가 아물지 못한 채 덧나고, 고름 나고, 늪에 빠진 팔과 다리는 지쳐 나올 의지를 상실한 소년에게 바위는 웃음을 보였다. 바위가 웃었다.

어머니는 법당에서 소년에게 삼배를 올리라고 했다. 소년은 절했다. 부처님도 소년을 향해 웃었다. 포단에 얼굴 묻은 소년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소년의 등이 들썩거렸다. 58대의 환청이 들렸다. 남들처럼 가방 들고 다니며 도시락 먹고, 수학정석과 성문종합영어를 들고 씨름해야 하는 출발선에서 주저앉아 버린 자신이 불쌍했다. 어머니도 포단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아들의 잃어버린 고등학교 생활, 늪에서 옴짝달싹하지 못하고 생기를 잃은 아들의 얼굴을 차마 마주하기가 서러웠다.

소년은 부처님을 만난 뒤 자신과 남과 세상을 향해 드러냈던 이빨을 감출 힘을 얻었다. 58대의 환청도 멀어져갔다. 눈물로 진주를 빚어 부처님 전에 올리는 어머니를 본 후, 함께 입학생 동기들과 같은 날 교문을 나서야겠다는 결심이 섰다. 1988년 2월13일, 졸업장을 받았다. 어머니는 인문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도 대학조차 못 간 아들 졸업장이 그렇게 좋았다. 아들은 고등학교 시절 마라톤 출발선에서 넘어졌다. 일어날 생각도 하지 못하고 앞서간 사람들이 일으킨 먼지를 뒤집어쓰고 엎어져 있었다. 부처님 전에 눈물로 기도 올렸던 어머니는 진주(珍珠)로 돌아온 아들의 졸업장이 대견했다. 어머니는 부처님을 몰랐다. 아들에게 환청이 생긴 후에야 부처님을 만났다. 교문을 나서면서 아들은 어머니에게 다짐했다. “옴마, 내 다음에 이 학교 교생으로 꼭 올끼다.” “그리 해라.” 짧은 어머니 답은 젖어있었다.

소년에게 다른 꿈이 생겼다.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는 학생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었다. 꿈이 무너진 곳에서 새로운 꿈의 씨앗을 심은 것이다. 1998년, 소년은 꼭 10년 만에 약속을 지켰다. 졸업한 모교의 교문에 교생이라는 신분으로 들어섰다.

“부처님, 선생님이 될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1999년 봄엔 보습학원 강사를 하면서 임용고시를 준비했다. 학원가는 길에는 절이 있었다. 산길을 가면 집과 학원 거리를 반으로 줄일 수 있었다. 공부할 시간을 저축할 수 있어 힘들어도 산길을 택했다. 학원가는 길에, 집에 돌아오는 길에 절을 찾았다. 매번 어린 영혼들의 손을 잡아주는 존재로 살고 싶다는 염원을 부처님에게 꺼내놨다. 학생들에게 자신과 타인 그리고 삶을 긍정하고, 자신이 가치 있는 존재임을 깨닫게 돕고 싶다고 했다. 절하고 절했다.

부처님 가피로 불지종가 아래서 교단에 섰다. 초심이 흔들릴 때면 부처님 전에 고한 염원을 실천하는 선생님으로 살고 있는지 물어본다.

소년 뺨에 물든 상처, 30년 전으로 돌아가 소년을 안고 볼을 쓸어주고 싶다. 잘 견뎠노라고. 그 시절 겪은 아픔은 진짜 자신의 길을 걷기 위한 소중한 공부였다고.

[1295호 / 2015년 5월 2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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