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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증평 민속박물관-마애불상군-율리사지

석불 품은 호수서 무상을 보다

 

▲ 율리저수지에 뿌리박은 나무도 오늘 하루의 삶을 표현하려 진녹색을 내뿜는다.

"반가사유상도 자취 감추고
바위로 돌아갈 터
무상은 우주 관통하는 진실"

조용히, 천천히 걷고 싶어 입소문 나지 않은 평탄한 길을 택했다. 반가사유상 만날 수 있다는 얘기 한 토막 얼핏 들은지라 약간의 설렘만 품안에 넣어 두고 떠난 길이다. 미륵마을(남하리 3구)과 염실마을(남하리 2구)을 잇는 3km의 증평읍 남하리길은 어린 시절 무작정 걸었던 시골 길 그대로여서 정겹다.

 

▲ 미륵마을 돌봐온 미륵불과 석조입상.


증평민속체험박물관 바로 옆에 자리한 미륵마을의 ‘남하리2구 사지’에는 석조보살입상과 두 분의 석불입상만이 서 있다. 석조보살입상이라 하지만 미륵불로 보이는 이 석불은 1900년 초까지만 해도 두 동간 난 채 땅 속에 파묻혀 있었다. 법주사 월인 스님이 1949년 마을 사람들과 힘을 합쳐 철주를 박아 자신이 창건한 성주사에 온전하게 세웠는데, 사세가 기운 후 지금의 자리에 세워졌다고 한다.

보살이 들고 있는 건 희미하지만 연꽃임이 분명하다. 진흙 속에 뿌리를 내려놓고도 향기로운 꽃을 피워내는 처염상정(處染常淨)의 상징이요, 정토에 생명을 탄생시키는 화생(化生)의 근원이며, 극락정토를 상징하는 연꽃을 미륵불 손에 안긴 이유가 있을 터.

저 미륵 조각한 고려시대 장인은 연꽃 닮은 사람을 기다리며 새 세상을 꿈꿨을 게다. 이 땅을 정토로 바꾸자는, 이 땅에 발 딛고 사는 모든 사람이 살 만한 세상 일궈가자는 ‘혁명의 메시지’를 저 단단한 돌 속에 꾹꾹 새겨 넣었을 게다. 저 미륵, 그래서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소중하다. 그 혁명, 그 변화, 지금도 진행 중이어야 하지 않은가!

 

▲ 마애불상군 바위에는 삼존불과 여래, 반가사유상 다섯 불보살이 새겨져 있다.


한 곳에 다섯 불보살이 모여 있다는 마애불상군(남하리3구 사지)이 자리하고 있는 마을은 ‘염실마을’로 불린다. 조선중엽 나라에 쓸 무기를 만들던 염곡소(念谷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이전에는 이 마을도 미륵마을로 불렸을 게 분명하다. 삼존불과 여래, 그리고 반가사유상까지 품은 마을 아닌가! 어쩌면 ‘염실마을’로 굳어진 건 미륵마을의 미륵불 때문인지도 모른다. 남하리에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 하나 한 토막 들어보자.

미륵불은 애당초(조선 말, 근대 초까지는) 지금의 염실동네를 바라보고 있었다. 미륵불의 영험 때문인지는 몰라도 염실마을은 날로 번창해 갔고 미륵마을은 점점 쇠퇴해 가고 있었다. 한 스님이 미륵마을을 지나는데 마을 사람들이 물었다. ‘어찌 하면 우리 마을도 풍요로울 수 있습니까?’ ‘저 미륵님이 이 마을을 바라보게 하세요!’

누군가 그 미륵불 반대 방향으로 돌렸고, 미륵마을은 번창하기 시작했다. 염실마을 사람들의 소행이었을까? 누군가 저 미륵불 넘어뜨려 땅 속에 묻었다. 그렇게 수십년을 잠들어 있던 미륵불을 또 누군가 일으켜 세웠다. 그런데 이런! 미륵불이 두 동강 나 있는 게 아닌가. 저 미륵불 묻은 사람 화가 단단히 났던 모양이다. 지금의 자리에 세워질 당시만 해도 미륵불은 염실마을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옛 전설 생각난 듯 미륵마을 사람들은 다시 돌려 미륵마을을 바라보게 했다.

 

▲ 마애불상군 옆에 자리한 3층 석탑은 고려시대 조성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고려시대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마애불상군 옆 3층 석탑은 소박하나 바위에 굳건히 서 있는 모양이 나라 지키는 장군처럼 당당하다. 주위 꽃나무들도 탑의 고귀함에 반했는지 탑 쪽으로 가지 뻗어서는 자신의 향기를 내어주고 있다. 4월에 중순에 간다면 벚꽃에 흠뻑 취한 ‘고려 3층 석탑’을 볼 수 있다. 마애삼존불은 담백하다. 동네 할아버지처럼, 미륵마을에서 염실마을로 들어서는 길처럼 편하다. 여래입상은 삼존불 모신 큰 바위 옆면에 새겨져 있다.

▲ 4월 중순께 걸음 한다면 벚꽃에 흠뻑 취한 마애불상군과 3층 석탑을 볼 수 있다.

그런데 반가사유상은 어디 있단 말인가? 마애불상군을 보호하는 비각 안에는 큰 바위와 작은 바위 두 개가 있다. 잔디밭서 바늘 찾듯 두 바위 몇 번을 살펴도 반가사유상은 보이지 않는다. 설렘이 실망으로 돌아서려는 순간, 작은 바위에 뭔가 있는 듯하다. 자세히 보려 하니 잘 보이지 않는다. 한 발짝 뒤로 가 천천히 보았다. 있다!

의자에 앉아 반가좌(半跏坐)한 자세에 사유하는 모습. 보관(寶冠)을 표현한 선을 시작으로 턱을 괸 팔과 의자 아래로 내린 발도 보인다. 반가사유상이다! 600년의 시간을 건너는 동안 마주한 비바람에 씻겨 그 형상 희미해졌지만, 그 고고한 자태 느낄 만큼의 선은 아직 남아 있다. 그 앞에 앉았다. 고려 3층 석탑에서 넘어오는 꽃향기 음미하며 한참을 앉았다. 바람에 얹혀 오는 새소리가 이리 정겨울 수 없다. 그 자리 떠나면서 다시 한 번 합장했다. 저 바위 속 반가사유상 이내 자취 감추고 하나의 바위로 돌아갈 것이라 생각하니 아쉽다. 그래도 5년 안에 걸음 하는 사람, 무심히 바라볼 수 있는 사람 앞에 반가사유상은 나퉈 주시겠지!

율리석조관음보살입상을 만나러 가는 삼기저수지의 수변둘레길(총 3km)을 지자체는 ‘등잔길’이라 이름했다. 사랑을 나눈 선비가 어서 돌아오기를 밤늦게까지 등잔 들고 기다리다 망부석이 된 여인의 이야기를 기억하는 길이다. 이 둘레길에서 자주 만나는 인물 조형물과 시가 있는데 김유신의 후예이자 조선의 문인, 독서광으로 정평 났던 김득신과 그의 시다.

삼기저수지에서 보이는 저 구석산(조선 전기까지만 해도 지금의 구석산은 좌구산으로 불린 듯하다) 어딘가에 구석사(龜石寺)라는 절이 있었다. 학자들은 지금의 율리사지가 구석사일 것으로 보고 있는데 김득신의 삶과 연관시키면 일리 있어 보인다.

김득신은 스스로 구석산인(龜石山人)이라는 호를 지을 만큼 산사에 자주 들러 선승들과 담론을 나눴다. 그가 말년에 머물렀다는 밤티마을(율리)에서 율리사지까지는 대략 1.5km. 산길이라도 자주 왕래할 수 있는 거리다. 그러기에 현 율리사지가 구석사 옛 터일 개연성은 높다. 물론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구석사뿐 아니라 “좌구산에 장갑사가 있다”는 기록이 있으니 율리사지가 구석사의 옛 터라 단언하기는 어렵지만 말이다. 증평민속체험박물관에 있는 ‘율리 3층 석탑’이 저간의 사정을 알고 있으련만 아무런 말이 없다.

증평 남하리와 율리 석불을 친견하는 내내 떠 오른 부처님 말씀 한마디가 있었다. 무상이다! 삼기저수지 둘레길에 서 있는 율리석조관음보살입상을 만나며 무상은 더 처절하게 다가왔다. 1979년 삼기저수지 공사로 수몰될 위기에 처해 이 자리로 이운해 왔다고 하는데, 상호는 보기 흉할 정도로 훼손됐다. 이제 보내 드려야 할 듯싶다.

저수지에 뿌리박고 있는 저 나무도 언젠가 생을 다할 것이다. 그 사실 알기에 자신이 내 보일 수 있는 진녹색, 오늘 더 진하게 내뿜고 있는 것이리라. 무상은 우주를 관통하는 진실임을 새삼 느낀다.

본지 상임논설위원 penshoot@beopbo.com

[도움말]

 

길라잡이
들머리는 증평민속체험박물관. 염실마을로 향하는 2차선 도로를 따라 가다보면 포장도로가 끝나고 흙길이 나오는데 여기서부터 염실마을 길이다. 113번 버스종점을 지난 후 연광사를 바라보며 왼쪽 길로 틀어 3분만 걸으면 마애불상군과 3층석탑이 있는 남하리사지가 보인다. 마을사람들에게 길을 물을 때는 탑바위가 어디 있느냐고 묻는 게 좋다. 남하리경로당을 향해 내려오다 왼쪽으로 난 도로를 따라 600m 걸으면 다시 증평민속체험박물관이다. 증평민속박물관서 마애불상군까지는 약 1km. 둘레길 총 거리는 3km 정도. 증평민속박물관서 율리 삼기저수지까지는 약 6km. 삼기저수지 수변테크 등잔길(3km)을 따라 걷다 보면 율리석조관음보살입상을 볼 수 있다. 삼기저수지서 좌구산휴양림을 향해 1.4km 가면 율리휴양촌이다. 율리휴양촌을 끼고 왼쪽 절골로 들어서서 구석산을 향해 오르면 율리사지다. 증평민속체험박물관 043)835-4163

이것만은 꼭!

 
율리 3층석탑 : 고려중기에 조성된 탑으로 추정된다. 전체 높이는 1.75m. 전문가들은 두 기 이상의 석탑재가 섞였다고 본다. 구석산 정상부에 있던 탑을 옮겨 놓은 것이라 해 일각에서는 구석사 3층석탑으로 보고 있으나 아직 분명치 않다. 이 탑은 증평민속체험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남하리사지 반가사유상 : 마애불상군을 참배할 때 놓치기 쉬운 반가사유상이다. 마애삼존불을 바라보며 왼쪽 암석에 새겨져 있다.

 

 

 


 

 

[1296호 / 2015년 5월 2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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