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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신라 조각승 양지의 출신·연대 문제

사실적 인체표현 조각양식의 발단 풀어 낼 열쇠

▲ 양지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경주 사천왕사지 출토 녹유소조상편. 인체 근육의 해부학적 표현과 사실적 신체비례, 자연스러운 자세 등이 돋보인다.

‘양지(良志)’는 불교조각사 연구자들을 흥분시키는 이름이다. 서양 조각사에 페이디아스(Phidias, 대략 B.C.480~430)가 있다면, 우리에겐 양지가 있다. 그는 ‘삼국유사’에 수차례에 걸쳐 등장하는데, 이에 따르면 선덕여왕 시기에 활동한 조각승이다. 작품을 통해 이름을 남긴 작가는 많지만, 정식 역사서에 그 이름과 행적을 남긴 예술가는 손에 꼽을 정도이다. ‘삼국유사’에는 양지와 함께 백결선생(百結先生, 음악가), 솔거(率去, 화가), 우륵(于勒, 가야금), 김생(金生, 서예)이 언급되어 있다. 이들은 그야말로 그 시대를 대표하는 예술가들이었다. 아무래도 ‘삼국유사’는 불교사관에 입각했기 때문에 양지는 그 중에서도 더욱 특별히 다루어지고 있다.

불교조각사에 두각나타낸 양지
역사적 기록·작품 남아 ‘주목’
삼국시대와 다른 유형의 신호탄

빈민·고승·서역인 출신 논쟁
활동시기 추정에도 차이 있어
흙으로 빚어낸 높은 예술성 탓

기록에 의하면 양지는 영묘사의 장육삼존상과 천왕상 및 건축에 들어간 기와, 사천왕사의 팔부신장, 법림사의 삼존불과 좌우 금강신 등을 만들었다고 하며, 그 외에 영묘사와 법림사의 편액 글씨도 그가 썼다고 한다. 이 중에서 사천왕사 터로 알려진 유적에서는 일제강점기에 녹유소조상편이 발굴되어 양지의 작품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석장’이라는 이름이 쓰여진 자기가 발견된 절터는 그가 살았던 석장사터로 밝혀져, 그곳에서 출토된 조각들도 모두 그의 작품으로 간주되고 있다.

▲ 경주 석장사지 출토 신장상편. 발 끝에 힘을 잔뜩 준 것이 그대로 느껴지는 역동적 표현이다. 양지가 머물렀던 절이기 때문에 이 역시 그의 흔적이 담겨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양지는 이렇듯 문헌사료와 유물 모두가  남아있을 뿐만 아니라 그 작품성까지 매우 뛰어나다. 물론 그의 작품성이 뛰어났기 때문에 사료에도 기록되었을 것이다.  그의 작품들은 인체의 사실적 표현에 기초한 역동성을 보여주며, 삼국시대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유형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사실 문헌사료나 남아있는 작품은 그 수량으로 볼 때 빈약한 것이긴 하지만, 워낙에 남아있는 고대 자료가 드문 한국미술사의 상황에서는 이러한 정보들이 소중할 수밖에 없다. 때문에 이들을 둘러싼 논의도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1973년에 처음 쓰여진 양지를 주제로 한 논문에서 우선 문제가 된 것은 양지의 출신성분에 관한 것이었다. 발단은 ‘삼국유사’에 그의 조상이나 고향은 알 수 없다고 기술되어 있는 점이다. 만약 양지가 어느 정도 명망있는 집안 출신이었다면 당연히 그의 가문과 고향이 언급되어 있었을 것인데, 그것을 모른다는 것은 그가 평민 이하의 집안에서 태어났음을 암시한다는 주장이 제기된 것이다. 특히 ‘삼국유사’에서 백결선생이나 김생은 그 집안이 빈천하여 가계를 알 수 없다고 밝히고 있기 때문에, 양지 역시 그러한 이유로 가계를 알 수 없다고 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이에 대한 반론은 단지 그의 출신과 고향을 알 수 없다는 것이 곧 그가 빈한한 출신이라는 의미는 아니라는 주장이다. 더불어 ‘삼국유사’에서 양지를 찬하며 기술한 “師可謂才全德充 而以大方 隱於末技子也”의 뜻을 “원래는 고승이었으나 그 큰 뜻을 기예에 숨겨 표현하였다”의 의미로 해석하여 양지의 장인으로서의 면모보다 우선 고승으로서의 지위부터 고려해야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어 전혀 새로운 주장도 제기되었다. 이는 양지의 신분이 빈한하여 가계를 모른다고 한 것이 아니라, 그가 바로 외국인, 정확히는 서역, 즉 중앙아시아 출신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처용가’를 지은 동해 용왕의 아들 처용 역시 원래는 서역사람일 것이라는 주장도 있어서 그리 놀랄만한 일도 아니다. 이런 주장이 제기된 것은 양지의 예술성이 흙을 빚어 만드는 소조(塑造)에서 특히 빛났기 때문인데, 그 기법이 주로 중앙아시아에서 유행했다는데 원인이 있다. 그러나 기법은 비록 소조기법이지만, 표현양식은 인체를 충실히 재현하는 당나라 시대의 사실주의적 경향이 보여서, 서역 출신으로서 중국에서 활동하다 신라로 들어온 장인일 것이라고 하였다.

아울러 고승으로서의 양지에 대해 지나친 비중을 두는 것도 경계하였다. 양지는 영묘사의 거대한 소조 불상을 만들 때 마법처럼 자신의 지팡이를 날아가게 하여 마을사람들의 시주를 받아오게 했는데, 이것이 그가 밀교승이었다고 보는 근거가 되기도 했었다. 그러나 만약 그가 고승이었다면 ‘삼국유사’의 고승열전인 ‘의해(義解)’나 밀교승에 대한 기록인 ‘신주(神呪)’ 편에 기록되었을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양지는 불교미술과 연관된 ‘탑상(塔像)’편에 등장한다. 따라서 그는 고승 이전에 예술가였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같은 외국인이라도 만약 양지가 중국인이었다고 주장했다면 당시 학계나 일반의 반발이 심했을 것이다. 그러나 서역인이라는 주장은 한편으로는 신라사회의 국제성을 보여주는 한 측면으로서 긍정적으로 평가되는 분위기였다.

▲ 경주 석장사지 출토 탑상전. 불상과 탑이 새겨지고 그 사이에 ‘연기법송’ 문장이 새겨져 있다. 이 역시 양지가 벽돌에 탑과 삼천불을 새겨 탑을 세웠다는 기록에 따라 양지의 작품으로 보고 있다.

이러한 비판적 견해들에 대한 재반론도 이어졌다. 우선 양지의 가계를 알 수 없다고 한 문장에 대한 해석은 평민, 혹은 그 이하의 천민일 수 있다는 의미이며, 신분이 높은 귀족이나 고관의 집안은 아니었다는 의미인데, 지나치게 ‘천민’이라는 문제에만 천착하여 비판을 했다는 지적이었다. 특히 천민일 가능성도 고려해야하는 것은 국문학의 대가 양주동 선생의 견해도 뒷받침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양주동 선생은 백성들이 양지를 위해 만들어 불렀다는 ‘삼국유사’에 실린 노래를 해석하면서 ‘양지’라는 이름이 ‘아치’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이는 ‘양아치’에서와 같이 신분이 비천한 일꾼을 일컫는 말과 유사하고 전문적인 기술을 지닌 사람이란 뜻의 ‘바치’와도 통한다고 하였다. 따라서 양지는 그런 신분이 낮은 장인집단 출신일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아울러 양지가 서역인이라는 설에도 의문을 제기하였다. 서역인 설에서도 스스로 제기하고 있는 바와 같이 기법은 서역에서 유행한 기법일지 몰라도 양식적으로는 당 양식이다. 특히나 양지는 글씨도 잘 썼다고 했는데, 과연 서역사람이 중국에서 활동하는 동안 서예까지 통달해서 “잘 쓴다”는 평을 받을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을 제기했다.

이러한 출신성분 논의는 무슨 미술사적 의미가 있을까? 우선 양지 스타일이라고 할 수 있는 사실적 표현기법의 발생과정을 서로 다르게 보고 있다. 양지가 빈한한 출신이었다고 보는 견해는 그가 기와도 제작했다는 내용을 근거로 사실상 양지의 소조불상 제작기법이 신라의 기와제작 기술로부터 자생적으로 형성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隱於末技子也”의 문장을 “자신의 신분상의 한계를 예술성으로 승화시켜 고승의 지위에 오르게 되었다”는 뜻으로 보았다.

반면에 그의 신분을 장인이 아닌 고승의 지위로부터 살펴보는 시각에서는 양지의 창작행위가 일종의 중생들을 위한 교화행위로서 읽힌다. 고승인 양지가 불교의 교리를 중생들에게 전파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서 예술을 택한 것이 된다. 과연 양지는 예술을 통해 고승이 된 것일까, 아니면 고승으로서 예술을 방편으로 삼았던 것일까?

▲ 감은사지 동탑 출토 금동사리함의 사천왕(북방다문천). 그 생김새가 사천왕사지 녹유소조상편에 등장하는 갑옷 및 인체표현과 유사하여 양지의 작품 혹은 영향으로 추정되고 있다.

한편 양지를 서역인으로 보는 견해는 사실적 인체표현의 소조 기법이 자생적인 것이 아니라 외부로부터 유입된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특히 사실적인 인체표현기법이 비교적 갑작스럽게 신라사회에 유행했던 점을 들어, 자생했다기보다는 외부로부터의 급속한 유입에 무게를 둔 결과였다.

양지의 출신성분 뿐 아니라, 그의 활동연대도 문제가 되었다. ‘삼국유사’에서는 그를 선덕여왕대의 사람으로 평가하고 있는데, 그 당시는 사천왕사지 출토의 녹유소조상에 보이는 사실적 인체표현이 아직 등장하기 전임을 지적했다. 따라서 실제 양지의 활동연대는 문무왕~신문왕에 걸치는 신라의 통일 무렵일 것으로 보았다.

사천왕사는 문무왕대에 삼국을 통일한 신라가 당나라와 전쟁을 치루며 세운 사찰이었기 때문에 여하간 그 창건 연대는 문무왕대 이후이다. 이 사찰에서 밀법을 행한 밀교승 명랑(明朗) 법사에 관한 내용은 ‘삼국유사’ 신주편의 ‘명랑신인’에 등장하는데, 이 절에 봉안된 작품을 만들었다는 것은 양지가 밀교와도 무관하지 않았음을 암시하기도 한다.

그러나 ‘삼국유사’의 기록을 신뢰하자는 반론도 있었다. 기록의 “선덕왕대”를 말하자면 양지가 데뷔한 시기 정도로 보았을 때 그때부터 문무~신문왕대까지 대략 50여년 정도가 양지의 활약시기였다는 것이다. 또한 선덕여왕이 발원했다는 영묘사의 장육상도 양지 작품인데, 이러한 그의 초기작품이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은 상태에서 사실적 표현기법이 문무왕대에 처음 비롯되었다는 주장은 재고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양지의 활동 시기에 대한 논쟁은 통일신라에서 새로운 조각양식이 언제 어떻게 시작되었는가를 푸는 중요한 열쇠가 되었다. 이러한 양지에 관한 여러 주장은 같은 ‘삼국유사’의 기록이라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얼마나 다양한 견해가 제기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 논의는 사천왕사지에서 발견된 녹유소조상의 도상 논쟁으로 이어졌는데, 이 이야기는 다음 회로 넘긴다.

주수완 고려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  indijoo@hanmail.net

[1296호 / 2015년 5월 2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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