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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중도-중

극단의 중간이 아니라 극단을 해체하는 사고

▲ 일러스트=김주대 문인화가·시인

사회적인 영역으로 들어서면, ‘양변’이라고 명명된 이항대립을 넘어서는 것은 또 다른 의미를 지니게 된다. 가령 여장을 한 남자는 남녀의 양변을 넘어서 있다. 물론 그가 ‘정말’ 남자인지 여자인지 명료하고 뚜렷하게 구별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렇게 함으로써 참과 거짓을 가려냈다고 믿는 순간, 우리는 그가 왜 남자이면서 여장을 했는지를 이해할 수 없게 된다. 그저 거기다 ‘거짓’이나 ‘악’과 같은 범주를 들씌우고 말뿐이다. 사실 거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남자이면서 남들과 다르게 여장을 했다는 점이고, 그렇게 한 이유를 아는 것 아닐까? 여기서 명료하고 뚜렷한 ‘진리’에 매여 있다면, 어쩌면 가장 중요한 것을 보지 못하게 되는 게 아닐까? 괴물도 그렇다. 늑대인간 같은 괴물의 매력은 사람인지 늑대인지 모호하다는 점, 그 경계를 침범하고 뒤섞으며 출현한다는 점인데, 그 본성을 드러내 뚜렷하게 하는 것은 그 매력을 지워버리는 것이 된다.

적과 친구될 수 없다 여기지만
적에게서 배울 줄 안다면 ‘친구’
중도는 하나만 고집하지 않고
종횡무진 자재할 줄 아는 사유

사실 여성적인 남성들이 얼마나 많으며, 남성적인 여성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세상사를 대충 보는 이라면, 신체적 특징 하나로 ‘어쨌든 그는 남성’임을 의심하지 않겠지만, 세심하게 볼 줄 아는 이라면 그저 남성적일 뿐인 사람과 여성적 섬세함을 가진 남성을 구별할 수 있을 것이며, 같은 사람인데도 조건에 따라 남성성과 여성성을 오가는 변화를 볼 수 있을 것이다. 괴물 같은 짓을 하는 인간 속에서 ‘인간’의 참혹한 본성을 볼 수도 있을 것이고, 그런 짓을 하도록 떠밀고 간 가슴 아픈 사정을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손쉽게 ‘남성/여성’ ‘인간/동물’ ‘선한 이와 악한 이’를 구별하여, 모든 일을 명료하고 뚜렷하게 판단하는 것은 사실 세간에서 흔히 행해지는 것이고, 데카르트처럼 ‘진리’란 이름으로 그렇게 하도록 가르쳐지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안목 있는 이, 지혜로운 눈을 가진 이라면 때론 겉으로 보이는 명백함 속에 가려진 안타까운 사정을 뚜렷하게 볼 줄 아는 이들이고, 때론 뚜렷한 소속들이 섞이며 출현하는 새로운 것의 특이성이나 매력을 명료하게 알아볼 줄 아는 이들이다.

이는 진위나 선악, 남녀나 인간/비인간이라는 극단의 두 범주로 귀속시키려는 한 볼 수 없는 것이다. 진위나 선악을 떠나서 사태를 본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 살인이고 악이라는 관념을 떠나지 못하는 한, 남도 아닌 남편을 살해한 사태를 이해할 순 없을 것이며, 인간이고자 하지만 인간이 될 수 없는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의 마음에 다가가긴 어려울 것이다. 진위나 선악의 양변(兩邊)을 떠난다는 것이 이런 것일 게다. ‘중도’가 지혜를 뜻하는 것이라면, 그런 이 때문이 아닐까? 중도(中道)란 진위와 선악 같은 양자의 ‘중간’에 서는 것이 아니라, 양자를 떠나서 사태의 ‘한가운데’로 들어가는 길이다. 극단의 두 범주를 벗어나야만 보이는 사태의 미묘한 실상에 섬세하고 정확하게 다가가는 것이다.

그렇다고 중도가 ‘분별을 떠나는 것’과 동일한 것은 아니다. 분별은 호오나 애증의 ‘감정’을 떠나서 사태를 보는 것이라면, 중도는 이항적인 두 극단의 ‘범주’를 떠나서 사태를 보는 것이니까. 선악, 진위가 그렇듯 이항적인 대립개념 또한 호오의 선택을 포함하지만, 중도는 호오의 선택을 비판하는 게 아니라, 이항적으로 대립하는 두 범주에서 하나가 다른 하나가 될 수 있음을 보거나, 두 개의 범주로 귀속시킬 수 없는 것이 있음을 보는 것, 혹은 상반되는 두 범주가 중첩되는 사태에 대해 그 의미나 이유를 질문하는 것이다.

중도는 양극단의 중간이 아니다. 선악의 중간이란 무얼까? 반쯤 선이고 반쯤 악? 조건에 따라 선이 악이 되기도 하지만, 그리고 악에 이유가 있을 수 있긴 하지만, 어떤 단일한 조건에서 악인 것은 악인 것이지 선악의 중간이라거나 선인 동시에 악인 그런 것은 없다. 유무의 중간이란 무얼까? 반쯤 있는 것? 유령 같은 존재를 말한다고 해야 할까? 유령에 대해, ‘그런 게 어디 있어?’라고 생각하는 이에게 유령은 허구일 뿐이고 없는 것이다. 반면 유령에 놀라 병들거나 죽은 이에게 유령은 있는 것이지 반쯤 있는 게 아니다. 유령은 반쯤 있는 게 아니라, 있다고도 없다고도 할 수 있는 그런 존재다. 거기서 중요한 것은 유령이 있나 없나가 아니라, 죽어서 없어야 할 존재가 산 자들 가운데 다시 나타난다는 사실이고, 그로 하여금 다시 나타나게 하는 이유를 통찰하는 것이다.

마찬가지 의미에서, 중도는 ‘중용’이 아니다. 중용이란 지나침과 부족함, 과다와 과소를 피해 중간을 취하는 것이고 그를 위해 절제하는 것이다. 쉽게 말해 ‘오버’하지 않는 것이다. 중간이나 중용은 극단을 반쯤 떠나는 것이다. 그러나 양 극단을 떠난다는 것은 선악, 유무 모두를 떠나는 것이지, 양 극단을 반쯤 떠나는 게 아니다. 그래서 석가모니는 양극단 뿐 아니라 가운데 또한 떠날 것을 설했다. “양 극단에 집착하지 아니하고 가운데에도 집착하지 않아야 한다.”(‘숫타니파아타’) 마조스님의 제자 대주스님이 “마음에 이미 양변이 없으면 가운데가 또 어찌 있을 것인가?” 묻는 것도 이런 의미에서일 것이다.

중도는 유무를 떠나는 것뿐 아니라, 진위를 떠나고, 선악을 떠나고, 남녀, 적과 친구 같은 모든 이항대립을 떠나는 것이다. 어디서나 이항적인 양 극단을 떠나라는 가르침이다. 그런 점에서 중도는 어떤 문제나 사태든 적용되고 관철되어야 할 ‘사유의 방법’에 가깝다고 보인다. 사태나 문장을 명료하고 뚜렷하게 하여 진위를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게 하려는 서구의 논리학적 사유방법과 반대로 양 극단이 서로 섞이거나 중첩되기도 하고, 하나가 반대 것으로 전변되는 아주 다른 종류의 ‘논리학’이다. 극단의 중간이 아니라 극단을 넘나들며 해체하는 횡단의 사고다.

예컨대 독일의 정치학자 칼 슈미트는 정치학이란 ‘적과 친구를 가르는 것’이라고 정의한 바 있다. 그러나 중도의 논리는 적에게서 배울 줄 안다면 적이 적인 채 그대로 친구가 될 수 있음을 본다. 적인 동시에 친구인 그런 적. 또한 ‘부처란 이런 것이다’라고 믿고 있는 한, 부처는 수행이나 사고의 진전을 가로막는 마구니가 됨을 본다. 그래서 임제스님은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가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고 가라”고 했을 것이고, 조주스님은 “부처가 있는 곳도 그냥 지나가라. 부처가 없는 곳은 얼른 지나가라”고 했을 것이다. 부처와 마구니의 양 극단(이항대립)을 이런 식으로 가로지르는 횡단적 사유, 그것이 중도의 사유다. “모름지기 작가종사라면 끈끈한 [양변의] 속박을 벗겨주며 [두 극단의] 못과 쐐기를 뽑아주어야 한다. 한 곳만을 고집하지 말고, 종횡무진 자재하여야 한다.”(원오, ‘벽암록’(중), 장경각, 24)

이진경 서울과학기술대 교수 solaris0@daum.net

[1296호 / 2015년 5월 2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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