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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중도-하

틀에 갖춰진 형식 논리 깨뜨리는 ‘파격의 논리학’

▲ 일러스트=김주대 문인화가·시인

이런 횡단적 사고의 방법을 흔히들 말하듯 ‘변증법’이라고 해도 좋을까? 변증법 또한 유와 무, 동일성과 차이 같은 상반되는 대립개념이 서로를 전제하고 필요로 함을 말하니까 말이다. 그러나 변증법은 이항적인 대립개념을 ‘종합’하여 더 ‘높은’ 단계로 고양시키며 ‘지양’한다. 두 대립개념을 종합하여 제3의 것을 만들어내곤, 그 안에다 이전의 두 범주를 보존해둔다. 그런 식으로 대립되는 두 개념을 ‘화해’시켜 종합적인 중간을 만들곤 거기에 ‘더 높은 것’의 자리마저 부여한다. 반면 중도의 횡단적 사유는 두 개의 이항적인 개념 모두가 무의미해지는 궁지로 몰고 간다. 고양된 제3의 개념 같은 걸 만들긴 커녕, 모든 개념을 무의미하게 만들어버린다. 높이 올라가는 대신 바닥없는 심연(Abgrund) 속에 밀어 넣는다. 개념적 구별을 떠받치고 있는 암묵적 가정이나 ‘근거(Grund)’를 깨버리고, 백척간두에서 한 걸음 더 나가라고 떠밀어버린다. 손에 잡힐 것 하나 남겨두지 않곤, “자 거기서 어떻게 해야 올라오겠는가?”라고 묻는다.

개에게 불성이 있다고 했다가
다시없다고 말한 조주 스님
질문자 고정관념을 무너뜨려
스스로 진리를 찾도록 한 방편
중도는 관념의 틀을 깨는 사고

예를 들어, 잘 알려진 것처럼, 조주 스님은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라고 묻는 학인의 질문에 단호하게 “없다”고 대답한다. 그걸로 끝이다. 있음과 없음을 종합해주는 고차원의 다음 범주 같은 건 없다. 그러나 더 놀라운 건, 똑같이 개에게 불성이 있냐고 질문한 다른 학인에게는 “있다”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거기서도 그걸로 끝이다. 어쩌자고 형식논리와 반대로 앞뒤 안 맞는 대답을 하고 있는 것일까? 조주 스님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없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그걸 거기서 따져 찾아내려 해본들 쓸데없는 짓이다. 그건 조주 스님의 견해를 알려주는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마도 앞의 질문을 했던 학인은 개에게도 불성이 있을 것이라고 믿고 있었을 것이다. 조주 스님은 그것을 감파했던 것이고, 그런 견해나 믿음을 그 자리에서 부수어버리기 위해 ‘없다’고 답한 것이었을 게다. 반대로 뒤의 학인은 개에게 무슨 불성이 있으랴 생각했던 이였을 것이다. 조주 스님의 밝은 눈은 그걸 감파했을 것이고, 그래서 “있다”라는 말로 그의 생각을 깨버렸던 것일 게다. 여기선 어떤 ‘종합’도 없다. 종합이 만들어낸 어떤 ‘견해’도 없다. 조주 스님의 대답은 자기가 생각한 답을 알려주려는 게 아니라, 마주선 학인이 갖고 있는 견해를 뿌리째 뽑아버려, 모든 견식이 통하지 않는 무의 심연 속으로 밀어 넣는 것이다. 그리곤 ‘자, 거기서 어떻게 하겠나?’라고 묻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의심의 힘으로 스스로 그 심연에서 벗어날 길을 찾으라고 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중도의 사유는 형식논리학은 물론 변증법적 논리학과도 아주 다른 것이다. 그것은 사유를 선규정하고 제한하는 틀, 인식의 격자(格子) 같은 것을 깨부수는 파격(破格)의 언행이란 점에서 차라리 ‘반논리학’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아니, 그 또한 사유의 틀을 깨주기 위해 수많은 선사들에 의해 반복하여 사용된 ‘파격’의 방법이란 점에서 ‘파격의 논리학’이라고 해도 좋을 것 같다. 중국의 선사들이 탁월하게 발전시켜온 이 파격의 방법은, 운동이나 지속 등에서 발견되는 중도의 ‘존재론’이나 사회적 차원에서 요구되는 중도의 ‘인식론’과 다른 차원에서 발전된, 모든 논리를 무력화시키는 기상천외한 ‘논리학’이다.
 
파격이란 격(格)을 파(破)하는 것이다. 이는 ‘대학’에 나오는 ‘격물치지(格物致知)’라는 말과 대조된다. 주희가 대학의 문구만으로는 부족하다면서, 몇 글자 보충하여 집어넣으며 해석했던 그 말은 이후 유학자 사이에서 사물의 이치에 도달하는 방법으로 간주되었는데, 여기서 ‘격’이라는 말은 사람에 따라 다르게 해석된 바 있다. 그런데 격이란 말이 ‘바로 잡음’을 뜻하는 것이든 ‘이치를 궁구하는’ 것이든, 대개는 바로 잡기 위한 틀이나 궁구할 이치를 전제한다. 격(格)이란 바로 그런 틀이나 이치를 뜻하는 말이다. 사유의 격자(格子), 인식의 격자다. 그런 틀이나 이치 안에서 아무리 바로잡아 봐야 틀 안에서 바로잡는 것이고 그 틀에 맞추는 것이며, 그 안에서 아무리 멀리 밀고가 봐야 틀이나 이치를 벗어나진 못한다. 반대로 틀의 작용을 완성해줄 뿐이다. 틀(格) 안에 사물이나 사태를 가둘 뿐이고, 틀 안에서 보던 대로 보고 생각하게 할 뿐이다. 파격(破格)이란 이 틀을 깨는 것이다. 눈 안에 들어선 격자, 사유를 직조하는 ‘이치’를 파괴하여 틀을 벗어나서 사유하게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선은 그 틀을 구성하는 두 개의 중심축을 깨고 사유를 직조하는 날실과 씨실을 해체해버리는 것이다.
 
석가모니께서 했다는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의미를 묻는 질문에,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그놈의 주둥이를 찢어 개에게 던져주었을 것이다”라는 운문 스님의 충격적인 대답은, 불조의 말이라면 어떤 것이든 옳다고 믿고 그걸 그럴듯하게 해석하려는 틀에 갇힌 사고를 깨주기에 충분했을 것 같다. 조주 스님이 달마 대사가 서쪽에서 온 이유를 묻는 학인의 질문에, 다시 말해 그가 전하려는 불법의 요체를 묻는 질문에 “뜰 앞의 잣나무”라는 뜬금없는 대답을 했던 것도, 그 질문이 어느새 가정하고 있는 불교적 지식이나 사고방식, 혹은 불법의 대의에 대한 관념을 무효화시키며 질문한 이의 사고틀을 깨려는 것이었을 게다. 원오 스님은 신풍 스님의 말을 인용하여 이렇게 쓰고 있다. “불조(佛祖)의 말씀과 가르침을 숙생(宿生)의 원수처럼 보아야 비로소 참선할 자격이 있다. 만일 [그것을] 뛰어넘지 못한다면 불조에게 속임을 당하게 된다.”(‘벽암록’(중), 25) 물론 “불조께서 사람을 속이려는 마음이 있었겠습니까?” 물을 수 있겠지만, 그 말을 받은 용아 스님 말대로 “강과 호수가 사람을 막아 세우려는 마음이” 없었음에도 막아 세우게 되듯이, 속이려는 마음이 아니라 불법을 전하려는 간곡한 마음이 있었어도 그 말에 매이고 사고의 틀에 매이게 되면 불조에게 속임을 당하게 된다고 하겠다.
 
이미 불조들이 노파심을 담아 일러준 말이나 글, 경전이나 논서를 불살라버릴 듯 비난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런 파격의 힘이 없다면, ‘색즉시공 공즉시색’을 말하고 ‘형상 없는 곳에서 형상을 본다’고 말하는 모든 답들은, 이항적인 대립개념으로 직조된 또 하나의 틀 안에서 말장난을 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개념을 적절히 섞어 말하면 양변을 떠나 말하는 것이 되리라고 믿는 것처럼 중도의 사유법에 반하는 것은 없다. 자신이 스스로 사유하는 게 아니라 얻어들은 개념이나 지식을 늘어놓는 것, 그것은 사유도 깨달음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런 답을 쉽게 입에 담았다간 양 볼에 귀싸대기를 맞거나 고함소리에 고막이 터져나갈 것이다.
 
따라서 파격의 논리학으로서 중도의 사유는 어쩌면 중간의 균형을 취하는 게 아니라, 개념에 달라붙은 균형을 깨고 양변보다 더 먼 극단으로 밀고 가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사고의 가장자리(邊)이자 한계지대를 이루는 틀 너머까지 밀고 나가는 것이고, 그러면서 그 틀(格) 자체를 파괴해버리는 것이다. 사고의 격자(格子)를 직조하는 두 개의 이항대립을, 사고의 날실과 씨실을 끊어버려 사고가 기대고 있는 양변이 사라져버리는 지점까지 말고 가는 것이고, 그러기 위해 양변보다 더 멀리 가는 것이다. 양변이 사라지는 곳까지. 가령 부처와 속인의 양변을 떠나는 것은 때론 부처처럼 살고 때론 속인처럼 사는 게 아니다. 부처보다 더 멀리 밀고가 부처가 사라진 지점에서 부처를 묻고, 속인들보다 더 멀리 밀고 가 속인을 보는 것이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가라던 임제 스님은 심지어 속인의 경계를 넘어서 무간지옥으로까지 밀고 가라고 말한다. “대덕들이여! 무간지옥에 떨어질 다섯 가지 업을 지어야 바야흐로 해탈하게 된다.” ‘헉! 불도를 깨친 분 입에서 어떻게 저런 말이 튀어나올 수 있는 거지? 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거지?’ 더 없는 당혹의 강도 속에서 이런 의문이 생겨나는 곳, 무간지옥 저편, 바로 거기가 선사들의 노파심이, 중도의 논리학이 치고 들어가는 곳이다. 혹시 이를 놓칠까 싶은 노파심에 임제 스님은 다시 묻도록 하고 대답한다.
 
“무엇이 무간지옥에 떨어질 다섯 가지 업입니까?”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를 해치며, 부처님의 몸에 피를 내고 화합승단을 깨뜨리며, 경전과 불상을 불사르는 것이 그것이다.”
 
“무엇이 아버지입니까?”
“무명(無明)이 아버지이니, 그대들 한 생각 마음이 꺼졌다 일어났다 하는 곳을 찾을 수 없어 허공에 메아리 울리듯 하여, 어디를 가나 아무 일 없는 것을 아버지를 죽인다고 한다.”
 
“무엇이 어머니입니까?”
“탐내고 사랑함이 어머니이니, 그대들 한 생각 마음이 욕계에 들어가 그 탐내고 사랑함을 찾아보아도 오직 모든 법이 빈 모양임을 볼 뿐이어서 어디에나 집착하지 않음을 어머니를 해친다고 한다.”
 
“무엇이 부처님 몸에 피를 내는 것입니까?”
“그대들이 청정한 법계에서 한 생각 마음에 알음알이를 내지 않아 어디나 칠흙처럼 캄캄한 것을 부처님 몸에 피를 내는 것이라 한다.”
 
“무엇이 화합승단을 깨뜨리는 것입니까?”
“그대들의 한 생각 마음이 번뇌에 매였음을 정확히 알아 허공처럼 의지할 데가 없음을 화합승단을 깨뜨리는 것이라 한다.”
 
“무엇이 경전과 불상을 불사르는 것입니까?”
“인연이 비고 마음과 법이 비었음을 보아서 결정코 한 생각이 되어 초연히 아무 일 없으면, 그것을 경전과 불상을 불사르는 것이라 한다. 대덕들이여! 만약 이를 체득할 수 있다면, 범(凡)이니 성(聖)이니 하는 이름에 구애되지 않을 것이다.”

이진경 서울과학기술대 교수 solaris0@daum.net

[1297호 / 2015년 6월 1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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