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34. 괴산 각연사 비로자나불좌상

기자명 신대현

새로운 기법의 기념비적 작품…문화재청 낮은 평가 개선 필요

▲ 각연사 비로자나불좌상.

충청북도 괴산군에 유서 깊은 명찰 각연사(覺淵寺)가 있다. 각연사 둘레에 높다랗게 서서 병풍마냥 둘러싼 보개산(寶蓋山)도 이 지역의 명산이다. ‘보개’란 부처님 머리 위에 놓인 일산(日傘)인데, 1세기 무렵 인도에서 불상이 처음 나타날 때부터 표현된 오래된 장엄이다. 다시 말하면 우뚝 솟은 산들이 부처님이 있는 절 주위를 일산마냥 두르고 있다는 의미다. 이 보개는 조선시대에 와서 법당 안으로 들어와 불상 위에 장엄되는 ‘닫집’으로 형상화 되었다. 어떤 이는 각연사 주위 산들의 이름을 보면 칠보산·보배산·덕가산 등이지 ‘보개산은 없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연꽃마냥 펼쳐진 산들을 전부 아우르는 표현이 보개산인 걸 깜빡한 것 같다.

각연사, 유일 대사가 515년 창건
충북서 가장 오래된 사찰 중 하나
창건 설화 핵심은 비로자나 불상
사찰 역사·인물사 두루 드러나

광배·대좌·불신 모두 전해져
조각사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

조각가의 섬세하고 농익은 솜씨
시대상 반영된 변화도 담겨있어
문화재청 해설은 불상 가치 반감

각연사는 515년에 유일(有一)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이 해는 신라에 불교가 공인된 528년보다 13년이나 앞선다. 그래서 이 창건년대를 못미더워 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여하튼 법주사와 더불어 충청북도에서 가장 오래된 사찰이라는 데는 이론의 여지가 없을 것 같다. 절의 규모는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에 이르는 동안에 비약적으로 커졌는데, 특히 10세기 초에 통일(通一)대사가 중창주로서 면모를 일신하는데 아주 큰 역할을 했다.

각연사에는 10세기에 세워진 통일대사비, 부도, 석타 등 아주 많은 유적과 유물이 있다. 그 중에서 비로자나불상은 이 절의 역사나 인물사에서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으니, ‘각연사’라는 절 이름이 바로 이 불상에서 비롯된 것만 봐서도 잘 알 수 있다. 이런 설화가 전한다. 앞서 말한 유일대사가 절을 창건하기 위해 한창 재목들을 다듬고 있었는데, 까마귀떼들이 날아와 대팻밥을 입에 물고 산속으로 날아가 버렸다. 기이한 일이라 유일대사가 까마귀들을 따라가 보니 한 연못에다가 대팻밥을 떨어뜨리고 있었다. 대사는 이를 이 자리에 절을 지으라는 계시로 알고 못을 메워나갔다. 땅을 메워가던 어느 날  땅속에서 광채가 나오기에 더 깊이 파보니 석불상이 나왔다. 이것이 지금의 비로자나 불상이었다. 유일대사는 무사히 절을 다 지은 다음에 절 이름을 ‘못 안에 불상(깨달음)이 있었다(覺有佛於淵中)’는 뜻에서 ‘각연’이라 지었다고 한다. 설화이기는 해도 비로자나불상의 비중을 잘 알려주는 이야기다.

▲ 비로자나불좌상 수인.

이 비로자나불좌상은 전체 높이 302㎝이니 신라시대에 유행했던 이른바 장륙상(丈六像)으로 봉안한 것이다. 장륙상은 부처님의 위의(威儀)를 강조하기 위해 1장 6척 높이로 조성한 불상을 말한다. 높고 크기 때문에 그만큼 조성하기 어렵고 공이 많이 들어가는 건 물론이다. 황룡사를 비롯해서 나라 안의 중요한 사찰에서 이처럼 장륙상을 봉안한 경우가 많았다. 조성년대는 양식으로 볼 때 9세기 후반으로 추정된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비로자나불상은 지금 산청 내원사에 있는 766년에 만든 석남암사지 불상인데, 그 외에는 대부분 9세기 이후에 조성되었다. 다시 말해서 9세기부터 비로자나 신앙이 당시 서울인 경주를 벗어나 전국적으로 유행되었다고 볼 수 있으며, 각연사 비로자나불상 역시 그런 배경 아래 조성되었을 것이다.

불상은 대좌, 불신, 광배 등 세 부분을 갖추는 게 통식이다. 그런데 고불(古佛) 중에는 오랜 세월을 잦추면서 일부가 사라지고 부서져서 광배나 대좌를 모두 갖추어 전하는 불상이 생각보다 흔치 않다. 그런 면에서 각연사 비로자나불상은 조각사 연구에도 아주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또 불신은 물론이고, 대좌와 광배도 각각 그 분야에서 썩 잘 만든 우수작들이어서 이 불상의 가치를 더욱 높이고 있다. 얼굴이나 신체의 비례가 적당해서 보기에 편안하며, 자세히 뜯어보면 볼수록 섬세한 조각가의 농익은 솜씨가 유감없이 발휘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불상을 고정된 틀에 매어 보기 때문에 이 불상의 진정한 가치를 비껴가고 있는 시각도 있다. 예를 들어 이 불상에 대한 문화재청의 해설이 그런 종류의 이상한 설명이다.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았으며, 그 위의 상투 모양 머리(육계)는 펑퍼짐하여 구분하기 어렵다.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왼쪽 어깨에만 걸쳐 입은 옷에는 옷 주름이 간략하게 표현되었는데, 특히 다리부분의 옷 주름이 극단적으로 형식화되었다. … 왼손 검지를 오른손으로 감싸고 있는 손모양은 매우 어색한데, 이것은 왼쪽에만 걸쳐 입은 옷과 함께 불상의 오른쪽을 더욱 허술하게 만들고 있다.”

이것이 과연 보물로 지정된 작품에 어울리는 묘사인지 도무지 알 수 없다. 손모양이 어색하다고 말하는 것도 미술적 표현과는 거리가 멀고, 그 다음의 ‘더욱 허술하다’라는 표현에서는 그만 아역실색 해진다. 이런 설명을 읽으면 이 불상이 보물로 지정된 이유를 알 수 없을 정도다.

머리카락 표현에서 우뚝 솟은 육계가 나지막하게 변하는 건 9세기 이후 나타나는 새로운 현상이다. 육계는 권위를 상징하기도 한다. 그래서 육계를 크게 한 건 불상을 통해 왕권이나 귀족의 권위를 높이기 위한 것이었다고도 볼 수 있다. 이때까지 많은 불상들이 경주에 집중되어 나타나는 것을 봐도 그런 의도를 알 수 있다. 반면에 불교가 지역이나 계층 면에서 좀 더 대중화되면서부터는 권위보다는 고통을 만져주고 희망을 주는 부처님의 자비로운 얼굴을 많은 사람들이 원하게 되었다. 그래서 육계는 상대적으로 작아지고 대신에 상호(相好), 곧 얼굴 표현에 집중하게 된 것이다. 손 모양은 어색한 게 아니라 동세감(動勢感)을 주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실제 부처님을 대하는 것 같다는 실감을 느끼게 해주는 기법이다. 새롭게 유행하는 비로자나 신앙에 따라 비로자나 불상도 전국적으로 확대되면서 왕성한 활력이 담겨 있음을 이 불상에서 볼 수 있다. 따라서 이 불상은 새로운 양식이 나타나는 기념비적 작품인 것인데, 이를 마치 조각기법이 떨어져 ‘펑퍼짐’‘어색’ ‘허술’ 등으로 설명하는 건 불상에 대한 기본적 이해가 부족해 그런 게 아닌가 생각할 수밖에 없다.

각연사 비로자나불상의 광배는 두광을 둥그렇게, 신광을 배 모양으로 길쭉하게 하고 이 둘이 만나는 부분을 잘록하게 표현했다. 이런 모습은 이 시대를 전후해 나오는 신라 불상 광배의 전형 양식이다. 이런 모습을 전체적으로 ‘물방울 모양’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광배의 끝 불상의 머리 위쪽으로 작은 좌불 3위가 나란히 앉아 있는 화불(化佛)을 두었으며, 그 아래로는 좌우에 1위씩 아래 위로 화불을 배치해 모두 7위의 화불이 자리한다. 광배의 배경은 연꽃무늬와 구름무늬이며, 특히 가장자리는 불꽃이 밝게 타오르는 모습으로 하여 불신과 더불어 일관되게 정적인 모습보다는 동적인 느낌을 갖도록 하는 효과를 내고 있다.

▲ 비로자나불좌상 대좌 중대석의 사자모습 조각.

대좌도 아주 공들여 만들었다. 불상을 받치는 상대석은 연꽃이 활짝 핀 모습이고, 그 아래 하대석과 중대석에도 아주 다양하고 화려한 조각이 베풀어져 있다. 하대석 무늬는 향로, 합장한 가릉빈가상, 연꽃 등이고, 중대석 8면에는 빙 돌아가며 넝쿨구름무늬와 그 사이에 사자(獅子)가 머리를 내밀고 있는 모습이 새겨졌다. 그런데 한때 이 대좌에 주악상(奏樂像)이 있는가 혹은 없는가에 대해 논의가 벌어지기도 했었다. 주악상은 날개가 달리거나 휘날리는 옷자락을 입은 천인(天人)이 비파 등 악기를 연주하는 모습을 말한다. 1990년대에 중대석에 주악상이 존재한다는 주장이 처음 나왔다가, 2013년 이 상에는 주악상이 표현되지 않았다는 반대 의견이 발표되었다. 처음 주악상이 표현되어 있다고 한 것은 대좌 중대석에 새겨진 꽃무늬 중에 있는 인물상에 주목한 것이다. 하지만 최근 연구에는 이는 인물이나 주악상이 아니라 두 마리 사자가 넝쿨 사이로 얼굴을 내밀고 있는 모습이며, 하대석에 가릉빈가라는 천인이 새겨져 있지만 이는 주악상은 아니라는 것이다. 대좌조각이 많이 풍화되어서 정확한 것은 정밀실측이 이루어져야 보다 확실해지겠지만, 이런 논의가 일어나는 일 자체가 이 불상이 그만큼 의미 있는 작품이라는 뜻일 것이다.

이 불상 겉면에는 흰 분이 옅게 남아 있다. 목불이나 철불 또는 소조불과 달리 석불은 개금이 아니라 이렇게 개분(改粉)을 하는 것이 통일신라 불상의 특징이다. 그런데 지금의 개분은 비로전에 걸려 있던 ‘개분불사기(改粉佛事記)’라는 현판에 1898년에 한 것으로 나온다. 이 현판문은 1901년에 참봉 벼슬을 하던 김용철(金鎔澈)이 썼는데, 이 불상에 대한 역사 기록으로서 의미 있는 자료다. 여기에 따르면 화주 경홍(敬洪) 등 두 세 명의 스님이 함께 시주를 모아 전각을 새로 고치고 불상을 개분해 점안했다고 나온다. 개분 불사를 마치자 ‘불신에 광명이 비춰 찬란하기 그지없었고, 산중에 보채가 눈부셨으며(聖像燦爛持身光明 盖寶彩於圓寂之山)’, 이로써 ‘깊고 넓고 연못 속에 연꽃이 피었음을 깨달았다(覺蓮華於深廣之淵也).’고 한다. 이 글 앞에서 ‘각연’이라는 이름의 유래를 소개했었는데, ‘개분불사기’에 나오는 이 말도 절 이름에 대한 훌륭한 묘사인 것 같다. 또 이 불사에 참여했던 ‘집금(執金)비구’와 조병색(造餠色)비구’라는 직함은 다른 데서는 안 나오는 색다른 용어다.

각연사 비로자나불상은 경주 중심으로 조성되고 신앙되던 불상의 범위가 전국적으로 넓혀지면서, 지방 각지에도 경주에 못잖은 실력과 경륜을 갖춘 조각가들이 활동했음을 보여준다. 예술은 시화와 문화가 먼저 성숙되지 않으면 자라지 않는다. 이 불상은 이 시대에 이미 신라 각지가 사회 문화면에서 단단한 토대를 이루고 있었음을 보여주며, 다른 새로운 문화가 서서히 태동되고 있음을 예고하는 작품인 것이다.

신대현 사찰문화연구원 대표 buam0915@hanmail.net

[1297호 / 2015년 6월 1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 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