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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진제 북송담’의 진화론 부정 정당한가

  • 기고
  • 입력 2015.06.10 17:55
  • 수정 2016.07.26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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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강병균 포항공대 수학과 교수

근래 불교계에서 불교의 핵심사상인 무아(無我)와 배치되는 사상들이 적지 않다는 비판들이 제기되고 있는 가운데 강병균 포항공대 수학과 교수가 6월9일 ‘남 진제의 진화론 부정과 북 송담의 현대과학 폄하’라는 긴 글을 보내왔다. 강 교수는 기고문을 통해 오늘날 불교계의 많은 스님들이 무아사상과 정면으로 위배된 참나를 주장하고 있다는 지적과 함께 특히 현재 최고 선승으로 일컬어지는 조계종 종정 진제 스님과 용화선원장 송담 스님의 ‘과학관’에 대해 강하게 비판했다. 편집자 주

-과학은 의견을 바꾸는 것을 생명으로 하고
 종교는 의견을 바꾸지 않는 것을 생명으로 한다

▲ 강병균 포항공대 교수
우리나라에는 두 분의 선불교 거장이 계신다. 소위 ‘남진제 북송담’이다. 진제  스님은 남쪽 부산 해운정사에 주석하시고, 송담 스님은 북쪽 인천 용화사에 주석하신다. 한 분은 종정을 하시며 교화를 하시고, 한 분은 마을출입을 삼가고 수행을 하시며, 현밀(顯密) 쌍두마차로 우리나라 불교계를 이끌어 가신다. 계행이 청정하고 반듯한 장로(長老) 수행자가 두 분이나 계신다는 것은 한국불교계의 홍복(洪福)이다. 두 분 다 달마대사를 통해서 중국을 거쳐 한반도에 전해진 정법(正法)을 잇고 있다는 자부심이 대단하시다.

그런데 이 두 분이 깜짝 놀랄 만한 발언을 하셨다. 필자는 처음에 이 발언들을 듣고 한동안 혼백이 흩어진 듯하였다. 과연 무슨 말씀들을 하셨기에 필자가 그렇게 놀랐을까?

I. 진제 스님의 진화론 부정

조계종 종정 진제 스님은 진화론을 부정했다. 전면적으로 부정했다. 시자가 스님에게 진화론에 대해서 묻자, 스님은 동물이 진화해서 인간이 되는 법은 없다면서, 원래 인간은 인간이고, 개는 개, 소는 소, 말은 말이었다면서 진화론을 부정했다. 아울러 빅뱅(Big Bang 우주폭발)도 부정했다. 우주는 항상 지금 이런 모습이라며, 과학자들이 뭘 몰라서 하는 주장이라는 것이었다. 종정스님의 사이트에 올려져있으니 확인하시기 바란다. (http://www.jinje.kr 법문 Q&A 48, 49 항)

진화론은 인간의 인생관, 종교관, 생명관, 우주관을 바꾼 일대 사건이었다. 서구에서는 ‘생명의 근원’의 지위에서 신을 끌어내렸으며, ‘인간에게 있는 영혼이 동물에게는 없다’는 불평등하고 편협한 시각을 몰아내었다. 진화론으로 인해 모든 생명체의 평등을 강조하는 동양종교 사상에 대한 과학적 근거가 마련되었다. 그런데 큰스님이 진화론을 부정했으니 이만저만 큰일이 아니다.

의식의 출현은 최근의 일이며 자의식의 출현은 아주 최근의 일이다

인간은 아메바에서 출발하여 35억년 만에 드디어 의식을 발달시켰다. 의식이 의식을 들여다보는 자의식(自意識 meta-consciousness 증자증분 證自證分)이 출현하였다. (자의식을 가진 동물은, 코끼리 침팬지 돌고래 까마귀 문어 등 몇 종류밖에 없다. 이들은 하나같이 도구를 사용할 줄 안다.) 10만 년 전 무렵에 언어가 생겼으며, 언어의 발달은 의식의 발달을 가속화시켰다. 그 결과 자연현상과 사회현상에 대한 무수한 질문을 쏟아냈다. 말을 갓 배운 어린아이들이 무수히 쏟아내는 질문처럼, 마구 질문을 쏟아냈다. 2500년 전 무렵에 세계 곳곳에서 벌어진 사유의 폭발이다. 그리스, 중국, 인도 등에서 봇물처럼 쏟아져 나왔다. 조로아스터,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소피스트들, 공자 묵자 노자 장자 혜자 제자백가, 베다교 사명외도 순세파 자이나교 수론파 불교 등등 이들이 내뱉은 무수한 말들은 무수한 글자로 기록되어 전해진다. 경전을 보면 글자들이 와글와글, 한껏 달궈진 프라이팬의 콩들처럼, 당장 뛰쳐나올 것만 같다.

의지의 존재를 통해서 인과관계를 파악했다

이들은 자신을 돌아보며 자신의 의지에 의해서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며 생각을 했다. (어린아이들이 자기가 똥을 만들었다는 걸 처음 발견하고 얼마나 감격해하는지 아시는가? 아마 처음으로 의지를 발견한 인간의 심정이 그러했을 것이다. 망치를 들면 모든 게 못으로 보이듯이, 의지를 발견한 인간의 눈에는 모든 사건과 현상의 배후에는 뭔가 의지가 있다고 믿었다.) 사건이 내 의지에 의해서 일어난다면, 비 천둥 번개 등도 누군가의 의지에 의해서 일어날 것이며, 나아가 인간의 탄생 죽음 질병 자연재해 전쟁의 승패도 누군가의 의지에 의해서 일어날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그 의지의 주체에 신(神)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이제 신에게 빌면 끝날 일이다. 그래서 신이 좋아하는 것을 찾아 나섰다. 동물 희생제이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신도 좋아할 것’이라고 망상을 피운 것이다. (개는 새나 뱀을 잡아 주인에게 바친다. 문 앞에 놓아둔다. 자기가 좋아하는 걸 사랑하는 주인에게 바치는 것이다.) 혹은 ‘자기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희생하는 것이 또는 주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사람을 바치기도 했다. (당시 전 세계적으로 신들이 사람고기를 먹었다. 예를 들어 기독교 구약에는 야훼 하나님에게 바치는 인신공희가 여러 곳에 기록되어있다.) 특히 젊은 처녀를 바쳤다. 자기도 가지기 힘든 ‘젊고 예쁜 건강한 처녀’를 바친 것이다. (우리나라의 심청전의 인당수 해신도 그 증거이다.)

신은 현상을 일으키는 숨은 의지이다. 그렇게들 믿었다

인도대륙에는 무수한 신들이 등장했다. (같은 시기의 그리스도 중국도 마찬가지였다.) 일종의 분업이었다. 각기 다른 일을 맡아 책임지는 여러 신들이 출현했다. 사람들은 신이 인간의 운명을 주관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 모든 신들 뒤에는 초특대 울트라 수퍼 신이 존재하는데 그걸 브라흐마(Brahma 梵 범)라고 불렀다. 서양에서는 천지를 창조하고 관리하는 기독교 하나님 야훼가 등장했다. (후에 야훼는 성부, 성자, 성신 세 명의 신으로 분업한다.) 야훼는 천지와 만물을 창조했지만, 브라흐마는 아예 천지만물 그 자체이다. 둘 다 각자 우주 모든 것의 원인이다. 이런 의미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신을 ‘제1원인’이라고 불렀다. 모든 원인의 배후에 있는 첫 번째 원인이다.

아이들이 꼬리를 물고 끝없이 “그건 왜?” 하고 질문할 때, 대답하다 지쳐 그리고 더 이상 몰라 신경질이 난 어른이 “몰라!” 하고 소리치는 게 바로 신이다. “몰라”가 바로 신이다. ‘뭔가 알 수 없을 때’ 신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이다. 나는 모르지만 뭔가 원인이 있다. 그걸 신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알 때는 수십 단계까지 열심히 설명을 하다가도, 더 이상 알지 못하는 순간이 오면 신을 끌어대는 것이다.

아는 것을 설명할 때는 신이 필요 없지만, 모르는 것은 신의 의지로 돌린다

저 사람 얼굴이 왜 빨갛지요? 화가 나서 그래. 화가 나면 왜 얼굴이 빨게 져요? 피가 얼굴에 몰려서 그렇지. 피가 몰려서요? 그래, 피가 빨간 색이잖아. 그럼 피는 왜 빨게요? 적혈구 때문이란다. 적혈구는 왜 빨게요? 헤모글로빈이라는 효소 때문이란다. 그래요? 그 헤모글로빈 효소는 왜 빨간가요? 다른 색은 다 잡아먹고 빨간색만 반사하기 때문이란다. 아빠, 빛은 아무 색깔도 없잖아? 겉보기만 그렇지, 사실은 여러 색깔의 모임이란다. 응, 알았어! 그럼 빛은 누가 만들었어?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어린 아들과 아빠 사이의 대화다.

이렇게, 어떤 것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 수 없을 때 옛날 사람은 그냥 신이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그냥 신이 “빛이 있으라!“ 하고 명령해서 빛이 생겼다는 것이다. 요즘 과학자들은 빅뱅(Big Bang)으로 생겼다고 주장하지만, 빅뱅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아직 모른다. 그러면 유신론자들은 신이 나서 말한다. “빅뱅은 신이 만들었다!” 성경을 다시 써야 한다. ‘신이 “빅뱅이 있으라 하매 빅뱅이 터졌다, 꽝!”’

내가 너에게 얻어맞은 것을, 신이 당신을 시켜서 나를 때렸다고 얘기하지는 않는다. 내가 먼저 한 대 쳐서 네가 나를 때린 것이다. 내가, 네가 맛있게 먹고 있는 육포를 좀 같이 먹자는데 네가 거절하자, 쥐어박은 것이다. 결국 문제의 시작은 먹고 싶은 마음이나 안 준다고 때리는 못된 마음이다. 이런 먹고 싶은 마음도, 때리고 싶은 마음도, 신이 일어나게 만들었나? 전쟁도 마찬가지이다. 신이 만든 것이 아니라 전쟁 당사자들의 마음이 문제이다.

연기론은 제1원인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선언이다

이때 부처님이 나타나셔서 선언을 했다. “신은 없다. 제1원인으로서의 신은 없다. 인간은 자작자수(自作自受) 자업자득(自業自得)이지, 따로 인간의 길흉화복을 만드는 제1원인으로서의 신은 없다”고 주장하셨다. 그럼 세상일을 일어나게 하는 것은 뭘까? 부처님은 그것을 연기(緣起)라고 하셨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사라지면 저것이 사라지는 상호의존관계로 설명하셨다. 그러면 제1원인이 원천적으로 사라진다.

예를 들어 100가지 원인이 하나의 사건이나 현상을 만들면, 거기에는 제1원인이 없다. 고만고만한 100가지 원인집단이 있을 뿐이다. 설사 100가지 중에서 소수의 비중이 높은 원인들이 있을 수 있지만, 이들이 나머지 비중이 낮은 원인들이 생기게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제1원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연기가 설계자의 위치를 대체했다
연기론은 진화론의 철학적 과학적 근거이다

이 사상은 혁명적인 사상이다. “설계는 반드시 설계자가 필요하다”는 상식적인 생각에 반하기 때문이다. 연기론은 물질과 사물에 일어나는 현상에서 ‘설계자’를 배제시키는 혁명적인 사상이다. 설계자의 위치를 ‘연기(緣起)’가 차지한 것이다. 그냥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는 것’이지, 따로, 그 모든 현상을 있게 하는 제1원인으로서의 설계자는 없는 것이다. 이처럼 제1원인을 부정하면, 필연적으로, 제1원인으로서의 의지도 부정하게 된다. 즉 외계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실체로서의 아(我 아트만 atman)를 부정하게 된다. 비연기적(非緣起的)인 아를 부정하게 된다. 그러면 무아론(無我論)에 이르게 된다. 아(我)란 5온의 모임에 지나지 않는다는 이론이다. (5온은 인간의 육체와 좋고 나쁨을 느끼는 작용, 생각하는 작용, 의지작용, 기억작용 등의 정신작용을 말한다). 아란 색수상행식 5요소의 모임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즉 아란 5온의 연기작용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인간은 자의식(meta-consciousness)이 생긴 이래로 항상 의지를 의식하고 살아왔기에, 또 항상 제1원인으로서의 의지를 생각하고 살아왔기에, “제1원인의 주인으로서의 ‘아(我)’가 없다”고 주장하는 무아론은 가히 혁명적인 이론이었다.

그래서 지금도 사람들은 무아론을 이해하지 못한다. 특히 ‘과학과 등을 지고 사는’ 종교계가 더욱 그러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꾸, 부처님이 출세하기 이전의 원시시대로 돌아가, 유아론(有我論)을 주장한다. 그중 가장 악명 높은 것이 ‘참나’이다. 참나는 진아(眞我) 또는 진짜 아트만(true atman)이라는 뜻으로서, 한국의 기라성 같은 스님들이 주장하는 참나는 ‘불생불멸 상주불변 영생불멸하는, 보고 듣고 생각하고 꼬집히면 아픈 줄 아는, 몸뚱이를 바꿔 새 몸을 갈아입는’ 윤회의 주체이다.

이들의 ‘참나 이론’은 무수한 모순과 허점이 있다. 참나는 한마디로 ‘제1원인 이론’이다. 참나가 모든 사건과 현상의 제일원인이라는 것이다. 개인적인 사건과 현상은 물론이고, 사회적인 사건과 현상뿐만 아니라, 우주적인 사건과 현상의 제1원인이다. 참나는 허공을 창조하므로(허공각소현발 虛空覺所現發), 그리고 현대물리학에 의하면 ‘허공은 진짜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허공에너지로 꽉 차 있다’ 하므로, 허공에서 우주가 탄생하여 사실상 참나는 우주를 창조하는 제1원인이다. 이것은 서양의 ‘신’에 해당하며 우주의 ‘실체’에 해당한다. 참나론은 심지어는 우주에 존재하는 것은 참나뿐이라는 극단적인 유심주의적(唯心主義的) 실체론으로 발전하기도 한다. 참나만이 존재하고 나머지는 분별망상이라는 주장은, ‘우주에는 브라흐마(Brahma 梵 범)만 존재하지 개별자나 현상이 존재한다는 생각은 착각’이라는 힌두교 불이일원론(不二一元論) 사상과 정확히 일치하는 것이기도 하다. 세상은 브라흐마의 꿈이라는 것이다. 낭만적으로 얘기하면 세상은 브라흐마의 놀이터(lila)이다.

진화론에는 제1원인이 없다

진화론은 ‘제1원인이 없다’는 이론이다. 설계자가 없는 설계이며 경쟁자 없는 경쟁이다(Design without Designers. Competition without Competitors). 그래서 진화론을 이해하면 무아론(無我論)은 저절로 이해가 된다: 여기서 아(我 아트만)는 디자이너와 경쟁자에 해당한다; 우주아인 브라흐마로 보면 디자이너요, 개별아인 아트만으로 보면 경쟁자이다. 사람들은 묻는다. “어떻게 설계자가 없는 설계가 있을 수 있는가?” 하고. 시계는 반드시 시계를 설계한 사람이 있지 않은가? 하고 묻는다. (사실 시계는 누가 만들었다는 것을 이미 누구나 알고 있기에, 시계는 설계자가 있다는 말은 하나마나 한 소리다.) 하지만 자연계에는 ‘설계자 없는 설계’가 존재한다.

예를 들어 스페인 가우디 성당을 빼닮은 남미의 개미집은 누가 설계한 것인가? 거기에 개미집을 설계한 단일 설계자가 있는가? 어떤 천재 개미가 애플 워크스테이션을 이용해 설계한 것인가? 아니면 자기 머릿속에서 상상으로 설계를 한 것인가? 그 모래알보다도 작은 뇌로 그런 일을 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보는가? 절대 불가능할 것이다. 즉 한 마리의 설계자 개미는 없다. 수많은 개미가 모여 대(大) 건축물 건설이라는 위업을 이루어내는 것이다.

(사실은 우리 뇌의 활동도 개미들의 활동과 비슷하다. 1000억 개 뇌세포가 합동작전을 해서, 사유를 해서, 인간문화를 만들어 낸다. 거기 어디에도 삼성그룹의 이건희 같은 최고 통치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즉 단 하나의 우두머리 뇌세포는 존재하지 않는다. 심지어 중앙통제 센터나 전략기획 조정실이나 일본제국의 대본영 같은 사령부도 존재하지 않는다.)

무아이지만 적응에 적합한 것이 살아남는다. 이 과정이 끝없이 되풀이 되면서 생물체의 모습에 변화가 온다. 식물이 가장 좋은 예이며 동물은 개미가 가장 좋은 예이다. 그래서 진화론은 경쟁자 없는 경쟁이다. 즉 진화론은 무아연기(無我緣起)경쟁이다. 

높이 6미터까지 이르는 거대한 개미집. 가우디성당을 빼닮았다. 우측은 스페인의 가우디 성당. 아직도 미완성이다.

개미집을 약탈하는 침팬지들. 각자 막대기를 하나씩 들고 있다. 막대기를 개미집 구멍에 쑤셔넣으면 침략자인 막대기에 개미들이 달라붙는다. 그러면 막대기를 입으로 훑어 고단백질 개미를 맛있게 잡아먹는다. 어디서 이런 도살자들이 떼로 몰려왔는지 개미들은 알 길이 없겠지만, 개미들 입장에서는 청천벽력이 아닐 수 없다. 개미는 도대체 누구에게 이 서러운 운명을 하소연해야 할까? 개미 신이 있을까? 인구 2,000만의 대도시가 한순간에 쑥대밭으로 변한다. 하지만 태양은 여전히 빛나고, 바람은 산들산들 불고, 종달새는 노래한다.

식물은 식이 없이도 새끼를 낳고 동물을 잡아먹는다

다른 예도 있다. 식충식물인 통발과 파리지옥은 동물(물고기와 곤충)을 잡아먹는데, 동물이 접근을 하면 통발 속으로 빨아들이거나 끈끈한 주걱에 붙인 다음, 통발과 잎을 오므려 도망가지 못하게 한 후, 소화액을 뿜어내 녹여 먹는다. 불교에 의하면 식물은 식(識 의식 마음)이 없다. 식이 없으므로 윤회도 하지 않는다. (불교 6도윤회인 ‘지옥 아귀 축생 인간 아수라 천인’에는 식물이 없다.) 식이 없으므로 당연히 번뇌망상이 없고, 번뇌망상이 없으므로 정신적인 고통도 없고, 따라서 깨달음을 얻는 일도 없고, 열반에 들지도 않는다. 식이 없으므로 몸뚱아리의 주인인 아(我)가 없다. 다시 말해서 아예 처음부터 설계자가 없다. 그러므로 물고기나 곤충이 잡아먹힌 것은 사실이지만 잡아먹은 통발이나 파리지옥은 존재하지 않는다. 둘은 식(識 의식 마음)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해바라기가 해님을 향해 고개를 돌리는 것은 의지의 작용이 아니라
햇빛을 향해 움직이는 기계적인 작용이다

해바라기에게는 ‘해님을 향해서 고개를 돌리자고’ 생각을 할 마음이 없다. 식물의 진화는 마음(識)의 개입이 없이도 일어난다. 그런데 왜 동물의 진화에는 마음이 개입을 해야 할까? (대행스님은 동물의 진화가 그런 식으로 일어났다고 주장한다. 공룡이 “꼬리야 없어져라” 하고 마음을 내서 꼬리가 없어졌고, 새가 “날개야 생겨라” 하고 마음을 내서 날개가 생겼다고 주장한다. 이런 사상은 ‘마음이 물질에 대한 절대적인 지배위치를 가지고 있으며 마음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마음 쇼비니스트적인’ 또는 ‘심 쇼비니스트적’인 사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식물은 결혼을 하고 새끼를 낳아 종을 유지하며 잘만 산다. 미루나무는 새끼들에게 가벼운 날개옷을 입혀 하늘로 날려 멀리멀리 보내, 좁은 곳에 모여 먹이를 두고 아웅다웅 싸우면서 사는 것을 막는다: 부모에게 새끼들이 서로 싸우는 것처럼 괴로운 일은 없다.

식이 없는 식물이 식이 있는 동물을 잡아먹는다

통발과 파리지옥처럼, 식(識 의식 마음)이 없는 주제에, 감히 식(識)이 있는 동물을 잡아먹고 살기도 한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는가? 어떻게 설계자 없이 설계가 일어날 수 있는가? 모든 일에 설계자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특히 불교도들은, 통발과 파리지옥의 존재에 대해서 뭐라고 말할 것인가? (식이 없는 존재는 업이 없을 터인데, 통발과 파리지옥은 잡아먹힌 물고기와 곤충을 상대로 어떤 업을 쌓은 것이며, 잡아먹힌 물고기나 곤충은 통발이나 파리지옥에게 어떤 업을 쌓은 것일까?) 또 장미꽃이나 백합처럼 아름답고 정교한 식물들에 대해서 뭐라고 설명할 것인가? 바람의 힘을 빌려 새로운 주거지를 찾아 멀리 날아가는 민들레 꽃씨에 대해서는 뭐라고 말할 것인가? (민들레가 “날개야 생겨라” 하고 마음을 내서 날개가 생긴 것인가? ‘새가 마음을 내서 “날개야 생겨라” 해서 날개가 생겼다’는 대행스님의 주장이 과연 맞는 것일까?) 맛있는 꿀을 만들어 놓고 새들을 유혹해 새들의 힘을 빌려 수정을 하는, 즉 짝짓기를 하는 동백꽃에 대해서는 뭐라고 말할 것인가? 마다가스카르 섬에 있는 30cm나 되는 꽃대롱을 지닌 혜성난초는 30cm 길이의 혀를 가진 나방의 도움을 통해서만 꽃가루받이가 가능하다. 그러데 혜성난초가 나방의 긴 물건에 맞추어 자기 걸 늘린 것일까, 아니면 그 반대일까, 즉 나방이 혜성난초의 긴 물건에 맞추어 자기 걸 늘린 것일까?

마음이 없이도 삶이 가능하고, 멋진 디자인도 가능하며, 진화도 가능하다

이런 놀라운 식물들의 예는, 식(識)이 즉 마음이 없어도 얼마든지 멋진 설계가 있을 수 있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아닌가? ‘디자이너 없이도 멋진 디자인이 얼마든지 나온다’는 진화론의 결정적인 증거가 아닌가?

6도윤회론을 개정해야 한다

해결책은 둘 중 하나이다. 6도윤회론을 개정하거나 폐기하거나! 6도윤회에 식물계를 집어넣어 7도윤회론으로 바꾸거나, 정 그게 싫으면 아예 6도윤회론을 포기하면 된다.

아마 전자가 더 합리적일 것이다. 왜냐하면 식물도 유전자가 있으며 동물유전자와 상당히 유사하기 때문이며, 세포구조도 유사하다. 바나나와 토마토는 유전자가 인간 유전자와 60%나 일치한다. 둘 다 풀이니, 아마 잡초와도 상당이 일치할 것이다. (그러하니, ‘번뇌가 잡초처럼 치성하다’는 말은 진실로 빈말이 아니다.) 고대인들은 이런 사실을 전혀 몰랐다. 알 길이 없지 않은가? 천안통을 얻으면 멀리 있는 것이나 심지어 아주 멀리 있는 별나라까지 볼 수 있다고 주장했지만, 정작 가까운 것은, 즉 세포 속을 본다는 상상은 하지 못했다. (좋은 예로 부처님 십대제자 중 한 사람인 아나율 존자는 천안통을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실을 작은 바늘귀에 꿰지 못해 고생했다. 작은 것과 큰 것은 이처럼 다르다! 큰 것과 작은 것은, 사이즈의 차이가 아닌,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 왜냐하면 세포라는 것을, 즉 세포라는 개념을, 상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유전자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천안통(天眼通 천리안 clairvoyance)이 있다는
선인(仙人 rishi seer)들이 ‘죽은 사람이 달로 환생한다’는 망상을 했다

아이러니한 것은 천안통을 얻은 사람이 무수히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어느 누구도 달의 표면이 어떻게 생겼는지 기술한 적은 한 번도 없다. 정말 이상한 일이다. 우파니샤드 시절의 인도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달로 간다고 했다. 거기서 좀 머무르다 비가 되어 지상으로 귀환하여, 식물에게 먹힌 후, 씨앗으로 들어간 다음, 씨앗이 남자에게 먹히면 남자의 정액을 통해서 여자에게 들어가 자궁에 머물다가, 인간으로 환생한다고 믿었다. 정자와 씨앗과 빗방울 속에 난쟁이 형태로 인간영혼이 웅크리고 앉아있다는 인도판 호문쿨루스 이론이다! ‘하하하’ 하고 큰 웃음이 터져 나올 정도로 재미야 있지만, 이런 원시적인 사상을 믿어야할 이유는 나변에도 없다. 그렇지 않은가?

식물은 식이 없으며 6도윤회에 끼어들 자리도 없다

그런데 문제는 식물을 윤회계에 집어넣는 경우, 식(識 의식 마음)이 없는 그래서 번뇌가 없는 식물이 과연 어떤 죄를 질 수 있느냐는 문제와, 죄를 진 식물은 지옥에 가서 어떤 벌을 받느냐는 고약한 문제가 등장한다.

가엾은 피라미와 개똥벌레를 잡아먹은 통발과 파리지옥은 지옥에 가도 싸다 쳐도, 나머지 절대다수 식물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만약, 절대 그럴 리가 없지만, 식물이 식이 있다면 하지만 동시에 번뇌도 없고 의지와 운동능력의 부재로 인하여 업을 쌓는 일이 없어 아예 6도윤회를 하지 않는다면, 식물은 이미 열반에 들어있는 거나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아무도, 식물이 수행을 할 필요가 없는 부처라고,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식물에게는 식이 없다.) 식물은 톱으로 썰고 도끼질을 해대고 장작으로 만들어 태우나? 그건 지구상에서도 벌어지는 일이니 지옥까지 가 받을 필요가 없지 않은가?

혹시 축생이나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이 벌이 아닐까? 식물시절에 없던 정신적인 고통을 당하니 말이다. ‘하하하’ 웃음이 다 나온다. 7도윤회는 식물계가 가장 위에 자리잡은 ‘지옥, 아귀, 축생, 인간, 아수라, 천상, 식물’ 순이 아닐까? ‘하하하’ 또 웃음이 나온다. 기독교 구약에 나오는 에덴동산의 ‘지혜의 나무’는 지혜만 있지 죄는 없다. 좋은 예가 아닐 수 없다. 혹시, 불교 참나주의자들과 유심론자들이 말하는 (불생불멸하고 상주불변하며 청정무구한 우주유일의 실체로서의) 참나와 불성은, 즉 지혜로만 충만한 참나와 불성은, 에덴동산의 지혜의 나무와 같은 존재가 아닐까? 전혀 감정이 없는 메마른 존재!

진화론은 곧 연기론
진화를 통해서 생명체의 연기가 드러난다

진화론은 연기론이다. 수많은 조건이 모여, 설계자 없이, 하나의 현상을 만들 뿐이라는 이론이다. (그리고 만들어진 그 현상 역시 다시 다른 것들과 연기하며 변해간다.)

생물학적 진화에는 그 어떤 의지의 개입도 없다

진화론에 의하면 생명체는 환경에 맞추어 변화를 한다. 우리 몸속의 수많은 유전자에는 분자수준에서 끝없는 변이가 일어난다. 지금도 일어나고 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에도, 이 글을 읽고 있는 순간에도 일어나고 있다. (인간의 눈은 작은 것도 보지 못하고, 몸속도 보지 못하므로, 절대 이런 변화를 목격할 수 없다. 또 목격하더라도 그것이 뭔지 알아보는 지혜가 없으면, 봐도 뭘 봤는지 모른다. 개가 컴퓨터 작업을 하는 인간을 본들 인간이 뭘 하고 있는 줄 알겠는가? 개도 두 눈으로 보긴 하되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는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인간과 달리 지혜가 없기 때문이다. 눈과 지혜는 ‘감시카메라와 소프트웨어’에 비유할 수 있다. 카메라는 자기가 뭘 봤는지 모르나, 소프트웨어와 연결하면 뭘 봤는지 알아내어 합당한 경고를 한다.) 이 변이들 중에서 생존에 유리한 것이 남아 유지된다. 즉 그런 돌연변이 유전자를 지닌 개체가 살아남아 유전자를 후세에 전해준다. 이런 과정을 수만 번, 수십만 번, 수백만 번, 수천만 번, 수억 번 거치면, 처음과 엄청나게 다른 기이한 생명체가 탄생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는 그 어떤 의지의 개입도 없다. 분자 수준의 변이는 수없이 일어나며 그런 변이 자체는 가치중립적이다. 어떤 의지를 지닌 존재가 그런 변이를 만드는 것이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좋은 변이만을 만들어야 할 것이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온갖 변이를 다 만들어낸다. 그래서 머리가 둘 달린 뱀, 다리가 8개 달린 소가 태어나는 것이다.

머리가 둘 달린 티없이 아름다운 소녀(들)도 존재한다. 미국의 선진문화로 이들은 정상인을 위한 고등학교를 다니며 행복하게 살고 있으며 결혼도 꿈꾼다(YouTube 참조). 이걸 죄와 벌이나 인과관계로 파악하려는 것은 지극히 인간적인 관점이다. 이런 식으로 생각을 하면 동남아시아의 해일은 거기 사는 사람들이 뭔가 나쁜 짓을 해서 받는 과보라고 생각하는 우를 범하게 된다. 그런 생각은 “동남아시아인들이 하나님을 안 믿어서 해일이라는 벌을 받은 것”이라고 주장하는 기독교 목사들의 생각과 다를 바가 없다.

천지는 불인이고 유전자 변이 역시 불인이다(천지불인이 변이역불인 天地不仁而 變異亦不仁).

장애인들이 거의 다 기독교인 이유는 무엇인가

놀라운 통계를 하나 제시한다. 우리나라 장애인들은 거의가 기독교인들이다. 엄마 뱃속에서 부터 기독교인이었을 리는 만무하므로, 태어난 후 스스로 선택한 것이 분명하다. 육신의 장애도 서러운 일인데, 전생의 죄까지 뒤집어쓰는 건 감당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리라. 인간은 서로 육체적으로 해칠 뿐만이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해친다. 종교가 이런 일에 앞장 설 때 눈앞이 깜깜해지고 인간에 대한 희망을 잃게 된다. 유대교는 이민족을 인종청소 대상으로 취급했고, 기독교는 이방인을 사탄의 자식으로 보았으며, 힌두교는 불가촉천민을 우주가 끝날 때까지 그 저주받은 지위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했으며, 장애인들이나 용모가 추한 자나 가난한 자나 우둔한 자나 불운한 자들을 “전생의 죄(업 業 카르마 karma)로 이생에 그렇게 태어났다”고 저주했다. 도대체 그런 용감한 확신은 어디서 온 것일까? ‘전생의 죄’라는 것은 ‘신의 저주’라는 말과 무엇이, 얼마나, 어떻게 다를까?

컴퓨터로 생존 프로그램을 짜서 가상생물의 진화를 얼마든지 목격할 수 있다.

종정스님이 진화론을 부정하는 이유

진제 스님은 왜 진화론을 부정할까? 여기에는 아주 깊은 이유가 있다. 기독교인들이 진화론을 부정하는 것과 근본적으로 같은 이유이다. 기독교인들은 성경에 깊은 감화를 받아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는 다 참이라고 믿는다. (하나를 믿으면 다른 것들까지 믿는 인간의 고질적인 병이다. 사실일 가능성이 크다 하면 별 문제가 없을 것을, 100% 진실이라 고집하니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광신적인 사람들은 성경은 문자 그대로 일점일획도 틀림없이 다 참이라고 믿는다. 창세기에 의하면 신은 약 6,000년 전에 우주를 단 6일 만에 창조했다. 그리고 그때 동물과 식물은 처음부터 사람은 사람 모양으로, 개는 개 모양으로, 소는 소 모양으로, 말은 말 모양으로, 또 선인장은 선인장 모양으로 창조했다. 그러므로 만약 진화론을 인정하면 구약 창세기 이야기가 다 구라로 전락한다. 그래서 죽기살기로 진화론을 부정한다. 미국인구의 약 70%가 기독교인이며 대부분이 개신교인데 이들은 거의가 진화론을 부정한다.

이에 비해 가톨릭은 다르다. 20세기 중반에 교황이 진화론을 어느 정도 인정했다. 가톨릭 교황도 인정하는 진화론을, 대한민국에서 도가 가장 높은, 종정 진제스님이 부인하는 이유는 뭘까?

만약 진화론이 참이라면 불교에도 몇 가지 무척 곤란한 점이 발생한다.

첫째, 불경의 내용과 배치가 된다.

장아함경 기세간경(紀世間經)에 의하면 인간의 기원은 천인이 지구상으로 하강해서 인간이 된 걸로 나온다. 그러므로, ‘지구상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생명이 탄생하고, 그 생명이 단세포생물로부터 출발하여 어류 파충류 포유류 영장류를 거치며 진화하여 마침내 인간이 되었다는’ 진화론을 어떻게 인정할 수 있겠는가?

둘째, 진화론을 인정하면 35억년 동안 지구상에서 인도(人道)가 사라진다.

35억년 동안 사람이 없었으니 사람으로 태어날 길이 없다. 자그마치 35억년 동안이나! 그러면 지구에는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천인만 존재했다. 6도윤회에서 인간만 빠진 것이다. 인간계가 없이 나머지 5계가 자기들끼리 왔다갔다 교류한 것이다. 이것은 대단히, 아니 무한히, 심각한 문제점을 노출한다. 만약 진화론이 참이어서 지구상에 과거 35억년 동안 인간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불경에 나오는 과거7불 얘기가 다 ‘구라’가 되고 말기 때문이다. (‘구라’라는 비속어를 쓰지 않을 수 없는 고충을 이해하여 주시기 바란다.) 우리나라 불교신자들 중에는 석가모니 부처 바로 전의 부처인 가섭불이 서라벌 땅에서 교화를 했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내용을 책으로 펴내기까지 했다. 이들은 단순히 진화론에 무지하기 때문에 이런 주장을 하는 것이다. 아무리 간단한 것일지라도 배우지 않고 스스로 아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인간은 끝없이 배워야 한다. 학이시습지 불역열호(學而時習之 不亦悅乎)이다.

그리고 불경에 보면 툭하면 누가, 예를 들어, 아난이 과거 5백 생 동안 바라문이었다는 주장이 나온다. 하지만 진화론에 의하면 인간은 지난 35억년 동안 존재하지 않았는데 무슨 수로 과거 5백 생 동안 바라문을 할 수 있겠는가?

불경에 의하면 과거에는 인간의 수명이 더 길었다고 주장하니, 예를 들어 최장 84,000세까지 살았다고 하니 500생*84,000년 하면 8,200만 년이 되는데, 그때는 다름 아닌 공룡시대다. 이것은 명백히 말이 안 된다. 진화론에 의하면 공룡시대에는 인간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간 수명 84,000살이 너무 심하다면 1,000살로 대폭 깎아보자. 그래도 500생을 살려면 50만년이 걸린다. 그때는 크로마뇽인 시대도 아닌 호모 에렉투스 시대이다. 인간으로 보기 힘든 원숭이 같은 시대인데 거기 무슨 바라문이 있었을까. 만약 그때 바라문이 있었다고 주장하면 지금 침팬지 고릴라 오랑우탄도 바라문 계급이 있어야 한다.

1,000살도 심하다면 100살이라 하자. 그러면 5만 년 전인 크로마뇽인 시대이며 그때는 아직 도시를 이루지 못한 때고 인구도 수만 명이 힘들었을 것이다. 크로마뇽인 시대에 브라만이 없었던 것은 명백하다. 브라만은 BC 2000년경에 아리안 족이 유럽에서 인도로 쳐들어가 생긴 계급이기 때문이다.

셋째, 진화론은 ‘인류가, 아득한 옛날의 평균수명 84,000살의 황금시대로부터, 점점 타락해 평균 수명 20살의 악세로 퇴보한다’는 말세사상을 부인한다. 자이나교도 유사한 말세사상을 가지고 있다. 힌두교에도 그리고 기독교에도 당연히 말세사상이 있다. 즉 전 세계적으로 말세사상이 있었다. 심하게 말하면 인류는 항상 말세에 살았다. 어느 시대이건, 너무 살기 힘들어서 자기들 시대를 말세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이는 종교가 ‘그 시대가 주는 한계를 벗어나기 힘들다’는 점을 보여준다. 현대에 와서 말세사상이 수그러들었다. 이 즐거움이 넘치는 풍요로운 세상에서 사람들은, 권태 끝에 자살을 할지언정, 지금을 말세라고는 규정하지 않는다. 이제는 성직자들까지도 ‘말세다, 천국이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참회하라’ 하는 수천 년 된 단골구호를 내팽개쳐버리고, 세상 오욕락(五慾樂) 즐기기에 방수가발을 쓰고 ‘풍덩’ 뛰어든 지 한참이다. 손을 뻗으면 잡을 수 있는 눈앞의 즐거움을 차마 외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직은 직업으로 전락했다. 현양매구(懸羊賣狗) 장사치가 되고 말았다.

진화론은, 오히려, 인류가 야만에서 문명시대로 나아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35억 년 전 단세포 동물 아메바로 시작해, 비늘 옷에 지느러미를 달고 물속을 헤엄치던 물고기가 땅위로 올라와, 빌딩만한 공룡들 발밑에서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살던 쥐새끼만한 포유류를 거쳐, 600만 년 전에는 침팬지와 갈라서서, 자의식(自意識 meta-consciousness)까지 갖춘 지금의 인간으로 진화한 것이 어찌 진보가 아니랴? 지구상의 생물들 중에서, 오직 인간만이, 전두엽이 발달한 인간만이, 불법(佛法)을 이해하고 해탈할 수 있기에 35억년 진화의 역사는 진보의 역사가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앞으로도 끝없이 진보할 것이다. 태양계 다른 행성으로, 태양계를 벗어나 은하계 다른 행성으로, 그리고 다른 은하계로 진출할 것이다. 우리는 종교가 주는 염세주의를 극복할 필요가 있다. 어차피 세속을 버린 사람들이 종교인들 아니던가? 종교를, 세속의 안티테제로서 받아들일지언정, 100%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다가는 염세주의의 늪에 빠지기 십상이다. 불교인들의 사회참여가 저조한 이유일 것이다. 이 세상이 꿈이라는데, 그래서 빨리 꿈을 깨야 한다는데, 누가 꿈속에서 열심히 살고 싶겠는가? “꿈속에서는 열심히 꿈을 꾸세요, 나중에 후회하지 마시고 마음껏 꿈을 즐기세요, 깨달으면 꿈을 즐기고 싶어도 절대로 즐길 수 없습니다. 법계이치가 그렇게 되어 있읍니다!”라는 법문을 들어본 적 있는가?

그래서 진화론을 인정하면 일부 불경이 근본적으로 구라가 되는 것이다. 사정이 이러하다 보니, 진제 종정이 진화론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이다. 불타와 불타는 사랑에 빠진 사람들로서는, 아름다운 서체로 쓰여진 지혜로운 고대인들의 말을 안 믿는 건, 믿는 것보다 훨씬 더 힘들다. (윤기 흐르는 먹으로 짙게 눈 화장을 한 그림문자가 한 줄기 지혜와 자비를 던지며 윙크를 하면 그 매력은 거부할 수 없는 마력으로 다가온다. 그러면 이성을 포기하고 감성에 몸과 마음을 맡기고 모두 믿는 수밖에 없다.) 불경이 문자 그대로 참이라고 믿는 사람들은, 그래서 죽기살기로 진화론을 부정한다. 불경이 죽거나 진화론이 죽거나 둘 중 하나이다. 첫사랑을 포기하느니 죽는 게 낫다는 심정이 이보다 더하랴! 그 중간은 없다. 부분적으로 진화론을 인정하는 가톨릭의 유연성을 따라가지 못하고, 지극히 경직된 정신자세를 유지한다. 따라서 진제 종정의 진화론 부인은 실수이거나 일회성 해프닝이 아니라 확신일 것이다.

그 증거로는 송담 스님 등 다른 큰스님들도 일관되게 진화론을 부정한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원숭이가 진화를 해서 인간이 되는 것이 아니다. 인간 ‘껍데기’를 벗고 다음 생에 원숭이가 되는 것은 가능하다.” 송담 스님의 발언이다. 그런데 껍데기를 벗는 그놈은 과연 누구일까? 참나(眞我 true atman)일까? 주인공일까? 아니면, 불성일까? 여래장일까?)

문자주의적 근본주의 불교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일어나는 이유는, 문자주의 기독교 광신도들처럼, 불경을 문자 그대로 다 믿어서 그렇다. 불경을 문자 그대로 다 믿는 골수분자들 입장에서는, 부분적일지라도 불경을 부정하는 진화론을 참을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현대과학을 폄하하는 발언을 하는 것이다.

송담 스님은 현대과학이 별거 아니라는 증거로 수천 년 전에 지구상에 지금보다 더 발달한 문명이 있었다는 경천동지할 발언을 한다.

이는 과거에는 사람들이 성품이 착했고 지구는 살기 좋은 낙원이었으며 수명이 84,000세에 이르렀는데, 사람이 악해지면서 수명이 짧아졌다는 불경의 내용을 그대로 믿기 때문일 것이다. 화석 증거에 의하면 어떤 생물도 84,000세를 살 수 없으며 인간은 겨우 4만 년 전에 인간의 모습을 갖추었으므로, 수명이 84,000살이 되는 것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인도인들은 지구의 역사를 순환적적으로 보았으며 그 결과 인도토양에서 자란 불교도 지구역사를 순환적으로 보아, 인간의 수명이 84,000세에서 10세 사이를 증감하며 왔다갔다 반복한다고 믿었다. 그러니 진화론을 인정할 수 없거니와 지구의 지질학적인 변화도 인정할 수 없다. (기독교인들은 지구의 나이가 성경에 쓰인 대로 6,000년이라 믿으므로 현대우주론을 믿지 않는다. 현대우주론에 의하면 지구 나이가 46억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제종정은 우주팽창도 부인하는 것이다. ‘지구는 까마득한 옛날부터 지금 모습이었으며 사람은 사람 모양, 개는 개 모양, 소는 소 모양으로 살아왔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전형적인 정태우주론(steady-state cosmology 정상우주론 定常宇宙論)이다. 모든 게 다 무상인데 왜 하필이면 생물계와 우주는 전체적으로 정태상태(steady state)를 유지해야 하는 걸까? 지식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새로운 지식이고, 종교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새로운 생명관과 우주관이다. 새출발하면 되련만, 원점에서 새출발해야 하는 그리고 가진 걸 전부 내려놓아야 하는, 재교육이 누군들 두렵지 않을까?

II. 송담 스님의 현대과학 폄하

송담 스님 법문 중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출처 http://emokko.tistory.com/m/post/155 17:15부터 참조)

“현대인들은 인과의 법칙을 인정(認定)을 할려고 하지 아니하고 부정을 해버리고 그럽니다마는, 그런 사람은 극도의 근시안(近視眼)이 되어 가지고 아직 귀가 맥혀 갖고 있어서 이 과학이라고 하는 것이 지금 매우 유치한 단계에 있는 것이지, 과학이 그렇게 훌륭하게 발달되었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정도의 과학은 4천 년 전에 이미 다 발달이 되어 있었고, 만 년 전에는 더 과학이 발달된 때가 있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마야 문명이라든지 모다 그런 것이 지금 땅 속에서 바다 속에서 현대 문명보다도 훨씬 발달된 문명의 자취가 지금 다 발굴이 되어 갖고 있는 것을 볼 때에 오늘날 과학이란 것은 별로 바람직하게 발달을 못했고, 또 발달했다는 것이 유치한 단계에 놓여있다.

과학이 발달했지만 인간을 쪼끔 편리하게는 해주었다고 할 수 있으나, 인간을 갖다가 매우 해롭게 허는,
나아가서는 인류를 멸망하게까지 하는 그러한 바람직하지 못한 방면으로 발달이 되어서 매우 우려되는 바입니다마는,

우리 불법(佛法)을 믿는 사람은 그런 어리석은 사람들-참으로 위대한 우리의 살길이 있는 줄을 모르고 그 유치한 단계에 있는 과학에 빠져 가지고, 그나마 그것도 잘 알지도 못하면서 꺼떡허면 불교를 미신(迷信)이라고 이렇게 비방을 하고 그런 어리석은 사람들 때문에, 이 세계는 점점 병들어 가고 살기가 어려운 그러한 세계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스님의 법문을 하나하나 살펴보기로 하자. (독자들은 필자가 스님의 치열한 수행과 고매한 인품을 부정하는 것이 아님을 유의하시기 바란다. 단지 무엇이 진리인지를 논하고자 할 뿐이다. 높은 분의 의견에는 이의를 달지 못한다면, 이는 불교가 아니다. 우리불교가 이어받은 중국 선불교 전통에서는 제자가 스승에게 고함을 지르고 심지어는 들이받기도 한다.)

<현대인들은 인과의 법칙을 인정(認定)을 할려고 하지 아니하고 부정을 해버리고 그럽니다마는 그런 사람은 극도의 근시안(近視眼)이 되어 가지고 아직 귀가 맥혀 갖고 있어서-이 과학이라고 하는 것이 지금 매우 유치한 단계에 있는 것이지, 과학이 그렇게 훌륭하게 발달되었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정도의 과학은 4천 년 전에 이미 다 발달이 되어 있었고, 만 년 전에는 더 과학이 발달된 때가 있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4,000년 전은 아직 문자가 발달하지 않은 청동기 시절이다

4천 년 전은 이집트가 겨우 피라미드나 만들던 시절이고 중국은 아직 주나라도 시작이 되지 않은 시절이다. 인구도 별로 안 되고 갑골문을 통해서 원시적인 형태의 한자와 문장이 발굴되는 정도이다. 그리스는 아직도 도시국가에 지나지 않았다. 인도는 아리아인들이 쳐들어 내려오기 전이었으며 겨우 벽돌집을 짓고 사는 모헨조다로와 하라파 문명이 시작되는 시점이었다. 4,000년 전이면 전 세계적으로 이제 겨우 석기시대를 벗어난 청동기시대인데 무슨 수로 현대보다 더 문명이 발달했다는 것인가?

만 년 전은 수렵채집 시절이다

만 년 전은 이제 겨우 농사가 시작된 시점이다. 인구도 형편없었고, 과연 전세계인구가 10만 명이 됐을까? 심지어 문자도 발명되지 않은 시기이다. 그런데 어떻게 지금보다 더 과학이 발달되었다는 말인가? 일부 신앙인들이 믿듯이, “종교수행자들이 인류역사와 우주역사에 대해서 과학자들보다 더 잘 그리고 더 깊이 안다”고 믿는 것은 완전히 잘못된 생각이다. 주장만 있지 아무 증거가 없다. 그리고 대체로 틀린 주장 일색이다. 이들 수행자들은 누구보다도 첨단과학문명을 이용한다. 스마트폰, 기차, 자동차, 비행기, 에어컨, 컴퓨터, 텔레비전, 귀뚜라미보일러, 은행통장 등등. (은행통장 거래에는 최첨단 수학인 암호론이 이용된다.) 착한 사람이 가장 많이 아는 사람이 아니다.

속인들은 10에 9은 참말을 해도 하나를 거짓말을 하면, 비난을 받고 감방에 가기까지도 한다. 그런데 종교인들은 10에 9는 틀린 말을 하고 하나만 맞을 정도여도, 아무 탈이 없다. 속인들의 그들에 대한 반석과 같은 믿음이, 오히려, 그 틀린 말에 자기들 같은 범인(凡人)이 모르는 심오한 진리가 숨겨져 있을 거라고, 생각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에드가 케이스는 광인이었다

혹시 4,000년 전 또는 만 년 전에 더 발달한 문명이 있었다는 증거로, 독실한 기독교인인 전직 전도사 에드가 케이스(Edgar Cayce 1877~1945)의 증언을 들지나 않는지 의심이 간다.

그는 자신이 전생에 사라진 대륙 아틀란티스의 대제사장이었으며 아틀란티스 대륙은 주민들끼리의 최첨단 과학무기를 동원한 전쟁의 충격으로 대륙이 갈라져 바다 밑으로 가라앉았다고 주장했다. 천리안으로 소문난 그에게 사람들이 경마와 목화시장에 대한 결과를 미리 알고자 부탁하자 응했으나, 그의 예언은 별무신통이었다. 그는 자신의 전생에 대한 기록을 남겼으며, 무수한 사람들의 전생을 읽었다. 에드가 케이스는 일종의 광인이었으며 온갖 해괴한 발언을 일삼은 사람이다.

그는 아카식 레코드(akashic records)와 점성술도 믿었다.

아카식 레코드는, 신비주의자(mystic)들이 에테르체로 존재한다고 믿는, 우주의 모든 사건과 지식의 기록저장소로서 일종의 우주도서관이다. 아르헨티나의 환상문학가 호르헤스는 팔각형모양의 무수한 방으로 이루어진 우주도서관을 상상해서 ‘바벨의 도서관’이란 작품으로 발표했다. 이곳에는 과거 현재 미래 삼세의 모든 책들이 소장되어있다. 문자 그대로 가능한 모든 책이다. 예를 들어 특정 책의 가능한 모든 오자 탈자를 포함한 무수한 책들과 가능한 모든 언어로의 번역본들이 보관되어 있다. 동양사상에 박식한 불교도인 그의 작품은 아마 힌두교 개념인 ‘아카식 레코드’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아카식 레코드는 불교의 아뢰야식과 유사하나 차이는 아뢰야식이 과거정보의 저장소인 반면에, 아카식 레코드는 미래의 정보까지도 저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아카식 레코드를 통해서 미래지식을 얻고자 명상을 하는 과학자들도 있다. 일종의 일확천금 사상이다. 불교도들 중에는 이런 과학자들이 없을 것이다. 왜냐 하면 아뢰야식이 미래정보까지도 보관하는 것이 아니며, 역사상 일체종지(一切種智)자 부처가 된 사람은 석가모니 부처님 한 사람뿐이었기에 감히 꿈꿀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리라.

그는 영매역할도 했다. 일종의, 20년 후에 생길, 뉴에이지의 선구자였다. 그는, 스스로 자신에게 최면에 걸어, 최면 상태에서 자신과 타인의 전생을 읽었다. 그래서 ‘잠자는 예언가’라는 별명을 얻었다. 하지만 최면에서 깨어난 후에는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그는 영매로 활동하기도 했는데 영매나 무당이 신들린 상태에서 한 말을 깨어난 후에 기억하지 못하는 것과 유사한 현상이다. 현대에도 한때 최면술을 이용한 전생읽기가 유행한 적이 있으나 지금은 그 신빙성과 부작용으로 인하여 금지되어있다. 고고학적으로 지구과학적으로 전혀 입증이 안 된 서양판 남사고의 격암유록과 정감록 수준의 이야기를 믿는다면 한국불교에 재앙이 아닐 수 없다. 그는 캘리포니아 인근바다가 솟아나 지금보다 더 발달한 고대문명의 유적이 드러날 것이라고 예언했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는 고대에 영혼이 동물과 짝짓기를 해서 3.6미터 거인들을 만들었다고 주장했다(여기서 기독교가 에드가 케이스에게 미친 지대한 영향을 엿볼 수 있다. 기독교 구약은 창세기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인간의 딸들과 짝짓기해서 고대의 영웅인 거인 ‘네피림’들을 낳았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노아홍수 때 다 익사해 멸종했다.) 사람들은 그가 평소에 읽은 러시아 신비가 구르드지에프(Gurdjieff 1866~1949)의 수제자 오스펜스키(Ouspensky)와 신지학회 창설자 마담 블라바츠키(Blavatsky 1831~1891)의 글들이 최면상태에서 튀어나온 것으로 평가한다. 이 두 사람은 각각 서양 판 괴담 모음집을 여러 권 썼다. 구르드지에프의 사상은 동양 선도(仙道)의 환망공상과는 성격이 판이한 새로운 환망공상이다. 그의 책들을 일독을 권한다. 블라바츠키는 동서양의 기괴한 사상과 종교를 거의 다 모아서 하나로 융합을 한 희대의 인물이다. <장막이 걷힌 아이시스의 비밀 Isis Unveiled> 등, 일독을 권한다. 인간의 환망공상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가늠할 수 있다. 이들의 글을 읽으면 스스로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그 거대한 환상공상 앞에서 초라해진 자신을 발견하고는, “겨우 이걸 환망공상이라고 하는가?” 하는 자괴감에, 스스로 망상을 자제하게 된다. 

마야문명은, 지금과 비교하면, 당시 다른 문명들이 이미 오래전에 발명한 바퀴도 발명하지 못한 지극히 원시적인 문명이었다

<마야 문명이라든지 모다 그런 것이 지금 땅 속에서 바다 속에서 현대 문명보다도 훨씬 발달된 문명의 자취가 지금 다 발굴이 되어 갖고 있는 것을 볼 때에 오늘날 과학이란 것은 별로 바람직하게 발달을 못했고, 또 발달했다는 것이 유치한 단계에 놓여있다.>

말씀이 너무 지나치지 않으신가? 아마 스님은 과학이 얼마나 발달했는지 모르시거나 문명의 이기를 전혀 사용 안 하시는 게 분명하다. 마야문명이 더 발달했다니 어떻게 이런 말씀을 하실 수 있는가? 마야문명은 바퀴조차 발명하지 못한 미개한 문명이었다. 게다가 인신공희에다 식인까지 자행했다. 당시 어느 주요 문명보다도 뒤처진 문명이었다. 현대 종교인들은 자기들이 누리고 있는 과학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전혀 모르고 있다. 인간은 이미 달나라에도 다녀오지 않았는가? 닐 암스트롱이 첫발을 디딘 이래로 12사람이나 달표면을 걸었다. 만약 이런 일이 없었다면 이외수씨 같은 사람들이 달에 사람이 산다고 주장할 때 상당수가 현혹당할 수 있다.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는 것은 과학문명의 공이다! 고대에는 나도 모르고 너도 모른다고 마구 망상을 구사했다. 달에 미인이 산다느니, 토끼가 산다느니, 죽으면 일단 달로 간다든지 하면서 달 표면 위로 거친 환망공상이 거침없이 질주하게 만들었다. 달이 영계환승 인천공항도 아니구, 원! 마치 자기 부모의 고마움을 모르고 남의 부모나 바라보는 사람이나 다를 바가 없다. 곰곰이 앉아 생각해보라, 현대과학이 얼마나 위대한지. 필자는, 밤마다 어두컴컴한 호롱불 밑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없어 멀뚱멀뚱한 눈을 억지로 감아가며 잠이나 청하던, 시골에서의 어린 시절이 지금도 기억난다. 그래서 종종 스마트폰을 어루만지며, ”어디서 이런 희한한 물건이 생겨났을꼬!” 하고, 감탄에 감탄을 거듭한다.

그리고 어느 땅속 어느 바다속에서 현대문명보다 더 발달한 문명의 자취가 지금 다 발굴되어 있는가? 이런 엉터리 정보는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어느 엉뚱한 신도가 전해준 것일까?

마야인들이 신전 벽에 남긴 마야문명의 식인문화 그림.

과학은 인간을 어마어마하게 편리하게 해주었다
과학은 모든 사람에게, 전설로만 존재하던, 천안통 천이통 신족통을 부여했다

<과학이 발달했지만 인간을 쪼끔 편리하게는 해주었다고 할 수 있으나, 인간을 갖다가 매우 해롭게 허는>

결코 조금이 아니다. 어마어마하게 편리하게 해주었다. 하나만 예를 들자면 옛날에 부산서 한양 가려면 빠른 걸음으로는 2주, 느린 걸음으로는 한 달이 걸렸다. 그것도 눈비 다 맞아가면서. 인도까지는 1.5년에서 3년이 걸렸다. 가다 죽기도 한다. 고비사막을 건너다 죽기도 하고, 얼음길을 건너다 죽기도 한다. 삼장법사 현장의 인도길을 동행한  제자들 중 한 사람은 도중에 한데서 자다가 얼어 죽었다. 지금은 비행기 안에 반나절만 편히 앉아 있으면 부처님 나라에 도착한다. 그런데 이게 조금 편리해 진 것인가? 부모님을 떠나보내고 그때서야 부모님의 은혜를 깨닫고 눈물을 흘리는 자식처럼, 인간은 현대 과학문명의 혜택을 잃어버리고 원시시대로 돌아가야 그 고마움을 절감할 것이다.

과학이 인간을 해롭게 해요? 과학은 해를 끼치는 것보다 이익을 주는 것이 천문학적으로 더 크다. 작게는, 과학발전이 없으면 스님들 대신 험한 일 죄다 하는 공양주보살들은 한겨울에도 찬물에 설거지와 빨래를 해야 하고, 부목들은 지게로 난방·취사용 땔나무 대느라 등골이 휠 것이다. 냉장고가 없으니 음식은 상하기 일수일 것이고... 크게는, 의학기술발달로 예전에는 죽도록 고생할 것을 지금은 안 하고, 죽었을 사람들이 지금은 다 산다. 그런데 어떻게 과학이 주는 편리는 조금이고 해는 몹시 큰가?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는가? 반(反) 과학문명주의인가? 과학문명의 혜택을 입지 못하는 아프리카의 난민들과 방글라데시와 캘커타의 빈민들을 보라.

캘커타에 있던 마더 테레사 수녀의 빈민구호소는 유명해지기 전에는 한 일이 없다. 그냥 병들고 죽어가는 아이들을 모아놓은 것 정도였다. 약과 의사와 의료시설이 없는데, 착하고 여리기만 한 수녀 간병원(看病員)들이, 뭘 할 수 있었겠는가? 심지어 인근 병원으로 옮기면 살릴 수 있는 아이조차 방치하여 죽게 만들었다. 한 아이만 살릴 수 없다는 게 이유였다. 중병에 걸린 모든 아이들의 병원비를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상은 작고한 세계적인 논객 크리스토퍼 히친스의 증언이다. 그는 이 사례에 대해서 몹시 분개했고 죽을 때까지도 분을 풀지 않았다.) 유명세를 타고 기부금이 답지하자 비로소 진정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생겼다. 신앙의 힘은 멀고 과학기술의 힘은 가깝다. 신앙에 힘이 있더라도, 과학기술의 힘을 빌리지 않고는 그 힘을 발휘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과학문명의 힘을 알 수 있다.

이 세계는 병들어 가는 것이 아니라, 살기 더 좋은 세상으로 변하고 있다

<나아가서는 인류를 멸망하게까지 하는 그러한 바람직하지 못한 방면으로 발달이 되어서 매우 우려되는 바입니다만, 우리 불법(佛法)을 믿는 사람은 그런 어리석은 사람들-참으로 위대한 우리의 살길이 있는 줄을 모르고 그 유치한 단계에 있는 과학에 빠져 가지고, 그나마 그것도 잘 알지도 못하면서 꺼떡허면 불교를 미신(迷信)이라고 이렇게 비방을 하고 그런 어리석은 사람들 때문에, 이 세계는 점점 병들어 가고 살기가 어려운 그러한 세계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핵폭탄을 만든 것을 제외하고는, 병들어 가는 것이 아니라 더 나은 사회로 변하고 있다. 인류가 점점 더 악해진다는 것은 착각이다. 하버드 대학의 세계적인 심리학자 스티븐 핑커와 UCLA의 세계적인 인류학자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그 반대임을 입증했다. 그들의 대작 저서인 <우리 안의 선한 본성 The Better Angels of Our Nature>과 <어제까지의 세계 The World until Yesterday>를 보라.

예전에는 소수 지배계층이 피지배계층을 착취하고 살았다. 신분의 벽은 넘을 수 없는 장벽이었다. 무간지옥으로 떨어지는 한없는 벽을 거꾸로 세운 벽이었다. 윤회를 통하지 않고는 신분상승은 불가능했다. 사람들이 윤회에 매달린 것에는 이생의 가망 없는 희망을 내생으로 돌린 면이 있다. ‘고통스러운 이생과 즐거운 내생 세트’와 ‘즐거운 이생과 고통스러운 내생 세트’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전자를 택할 사람은 과연 얼마나 될까? 조선조에는 많게는 90%가 노비 종 평민 등 피지배계층이었다. 이들은 세금 부역 병역 등 모든 의무를 짊어졌다. 하지만 지금은 누구나 평등한 세상이다. 이게 다 과학·기술·농업혁명과 경제·정치·교육·사회제도의 발달로 이루어진 일이다. 종교가 기여한 바는 거의 전무다. 대부분의 종교는, 지배계급에 편승해 민중을 상대로 착취를 하지 않으면, 체념을 가르쳤다.

예전에는, 불과 100년 전만 해도, 90%이상의 사람이 까막눈이었지만 지금은 대중교육의 혜택으로 모두 교육을 받으며 인터넷의 발달로 웬만한 지식은 공개되어 있다. 그러니 본인이 노력만 하면 무식하다는 소리는 듣지 않는다. 우리 욕에 “무식한 놈”이라는 게 있음을 상기하시라. 얼마나 사람들이 배운 게 없었으면 그런 욕이 다 생겨났겠는가? 태어난 마을에서 평생 땅만 파먹으며 살다 죽는 삶에서 벗어난 것이, 송담 스님이 보시기에는, 병들어가는 삶인가? 음식, 교육, 의료보험, 사회보장 등으로 인간으로서의 자존심이 얼마나 신장되었는가? 옛날에 굶어죽고 병으로 죽은 사람이 얼마나 많았는지 다 잊어버리셨는가? 부모가 자식을 종으로, 첩으로, 심지어는 창부로 팔아먹는 경우도 있었다. 지금은 그런 일이 없지 않은가?

불교도들이 이상으로 삼는 극락을 보라. 지금이 옛날보다 극락에 가깝다. 세상은 항상 불완전한 것이다. 초점은 지금이 과거에 비해 얼마나 더 나아졌냐하는 점이다. 지금 50~80대 한국인들 중에, 과거 20-70년대로, 돌아가고 싶은 사람이 몇이나 될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옛날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질병으로 죽어갔는지 상기하시라

옛날에는 중세유럽이나 아시아에 무서운 질병이 나돌았다. 흑사병은 나돈 지 수년 만에 유럽인구와 중국인구를 1/3씩 몰살시켰으며, 그 후로도 1700년대까지 지속적으로 나타나 런던, 베니스, 이탈리아에서 수백만 명의 목숨을 집어삼켰다. 또한 천연두 수두 소아마비 디프테리아 등으로 어린아이를 잃는 부모들의 특히 어머니들의 비통한 심정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10달 뱃속에 넣어 힘들게 키우다가 낳아서는 젖을 물리어 애지중지 키우던 아이를 100일이 되기 전에, 돌을 넘기기 전에, 잃는 것은 참을 수 없는 고통이었다. 장이 꼬이거나 맹장염에 걸리면 그냥 죽음뿐이었다. 콜레라 장티푸스에 걸리면 집안이, 마을이, 지방이, 나라가 떼죽음이었다. 얼마나 지독한 질병이었는지, 장티푸스는 ‘염병한다’는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만들어냈다. 간질에 걸리면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다. 그냥 “또 지랄한다“고 하며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얼마나 참혹한 피해를 입혔으면, ‘염병한다’, ‘지랄한다’ 하는 말로 다 남아있겠는가? 세균학의 발달은 이 질병들이 죄에 대한 신의 벌이 아니라 그냥 세균의 작용임을 밝혀냈다. 즉 거기에, 마음을 가진 존재의, ‘의지’의 개입이 없다는 것을 밝혀냈다.

종기는, 그중에서도 등창은 무시무시한 질병이었다. 달걀만한 종기가 나거나, 동전만한 종기가 여러 개 나면, 종종 죽음으로 이어졌다. 임금도 별 수 없었다. 지금은 항생제 한 방이면, 또는 수술 한 번이면, 부모·형제·배우자와 친지를 잃는 아픔을 겪지 않아도 된다.

백내장·녹내장에 걸리면 암흑세상으로 직행한다. 지금은 간단한 수술로 시력을 회복한다. 지금도 가난한 나라 사람들은, 의학기술의 혜택을 보지 못하고, 어둠속에서 종교에 매달린다.

부귀한 양반들이 천수를 누리지 못하고 일찍 죽은 경우는 과음으로 인한 간암 위궤양 십이지장궤양 등이 원인이었을 것이다. 지금은 조기검진이 가능하고, 또 걸려도 상당수가 치료와 수술을 받고 살아난다.

옛날에는, 힘줄이 ‘툭’ 끊어지면 그냥 평생 불구신세가 된다. 특히 아킬레스건이 끊어지는 건 최악의 상황이었다. 지금은 괴력을 발휘하는 기계로 두 동강난 아킬레스건을 잡아당겨 꿰매면 된다. 동료교수가 배드민턴을 치다 아킬레스건이 끊어졌지만, 현대에 그리고 문명국 대한민국에 태어난 덕으로, 입원수술을 받고 완치하더니 ‘쌩쌩’ 전 세계를 휘저으며 잘만 돌아다닌다. 농사일을 하다가 작두에 손가락이나 손목을 잘리면 하나님 성모마리아 부처님 관세음보살에게 기도를 해도 방법이 없었으나, 지금은 현미경미세접합수술로 다 붙일 수 있다.

운 좋게 이 모든 질병을 피해가더라도 풍을 맞으면 끝이다. 방구석에 누워 죽을 때까지 대소변 받아내게 하며 가족들에게 크나큰 짐만 된다. 그래서 “차라리 죽는 게 낫지” 하는 넋두리까지 생겼다. 지금은 풍도 예방이 가능하고 뇌수술로 치료할 수도 있다. 이런 세상을 어떻게 점점 더 병들어 가는 세상이라 하고, 과학이 별로 해준 게 없고 오히려 해를 끼친 게 크다고 폄하할 수 있는가?

지금은 의학 발달로 위에 든 이 모든 질병이 죄다 예방과 치료가 가능하다.

옛날에는 50이 되면 이빨을 다 잃어 합죽이가 되는 일이 흔했지만, 지금은 불소를 섞은 수돗물에다가 치약 칫솔의 발달로 이를 잘 잃지 않으며, 상한 이는 크라운을 씌우고 잃은 이는 임플란트를 하면 거의 자기 이 같은 기능을 발휘한다.

재래식 화장실에는 사람들 변을 통해 나온 하얀 생고무줄 같은 회충이 우글거렸다. 회충이 많아서 배가 아픈 것을 횟배앓이라고 부를 정도로 기생충 감염은 보편적인 질병이었다. 이름만 들어도 끔찍한, 무시무시하게 생긴 갈고리촌충·편충 감염도 있었다. 이들은 길이가 1미터에 달할 정도로 길다. (필자의 동료교수는 자기가 어렸을 때 촌충을 치료해준 동네 의사선생님의 아들에게 지금도 무척 고마워한다. 그 아들도 동료교수이다. 이 세상에는 고마워할 일이 참 많다! 진심이다! 고마워할 일이 없다면, 그건 단지 찾아보지 않아서 그렇다.) 항문에는 개미만한 요충들이 들끓었다. 머리에는 이가 득실했고 옷 실밥에는 수퉁니들이 떼를 지어 살았다. 시간이 나면 속옷을 뒤집어 이를 잡는 것이 일이었다. 두 손톱 사이에 끼우고 ‘톡’ 소리 나게 눌러 죽였다.

15년 전에 중국에 가면 사방에 벽에 전봇대에 성병치료 광고전단이 어지럽게 붙어있었다. 소위 창병 또는 화류병(花柳病)이라는 질병은 치료불가능이었다. 특히 매독은 신대륙에서 유럽으로 옮겨간 후 돌고 돌아 전 세계를 감염시켰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 병으로 신체가 썩어 들어가거나 기형으로 변형되고, 이 병을 피를 통해 태중의 아이에게까지 전염시켜 자기 아이를 매독아이로 태어나게 만들었다. 왕이라도 별 수 없었다.

필자도 어린 시절 병원문턱이 높아 치과에 잘 가지 못했지만, 지금은 국민의료보험으로 병원문턱이 낮아졌으니 그때에 비하면 천국이다. 국민의료보험은 사실상 세금이다. 부자가 더 아플 리는 없지만 더 많이 내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은 부자가 돈을 더 많이 낼수록 천국은 더 가까워진다고 믿는다. 그러니 지금이, 천국은 아닐지라도, 옛날보다는 천국에 더 가깝다.

구한말 조선을 방문한 유럽인들은 흉년으로 길가에 버려진 아사한 시신을 수없이 목격했다고 증언한다. 중국이나 우리나라나 흉년이 들면 무수한 사람들이 죽어나갔다. 무수한 사례들이 중국과 한국의 실록에 남아있다. 식량이 부족한 것이 제1원인이긴 하나 교통이 발달하지 않아 식량을 기근이 발생한 곳으로 제때 신속하게 옮기는 게 어려웠다. 그래서 나라 전체적으로는 식량이 여유가 있어도, 국지적으로 굶어죽는 일이 발생했다. 지금처럼 기차, 자동차, 비행기 등의 교통수단과 도로가 발달했다면 벌어질 수 없는 일이었다.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이 맹귀우목처럼 희귀한 복이라면
인구를 폭발적으로 늘린 과학기술발전은 더할 수 없는 축복이다

과학문명의 도움이 없이는 73억 명이나 되는 인구를 잘 살게 할 수 없다. 일부 못 사는 나라도 있지만 전체적으로 잘산다. 인류역사상 이렇게 잘 산 적이 없다. 인구도 어마어마하게 늘었다. 부처님 시대에 비해서 천배는 늘었을 것이다. 맹귀우목(盲龜遇木)처럼 어렵다는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을 기하급수적으로 쉽게 만들었다. 지금까지 어마어마한 수의 인간을 만들어냈다.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이 복이라면 과학문명이 그런 일을 한 것이다. 예전에는 산욕열 마마 수두 홍역으로 어마어마하게 죽었지만 지금은 의학발달로 이런 병으로 죽는 일은 없다. 옛날에 사람들이 병으로 떼로 죽어나가도 종교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페스트는 중세 유럽의 인구 1/3을 몰살시켰다. 병을 하나님이 내리는 벌로 간주한 사람들은, 페스트에 아직 걸리지 않는 자는 걸리지 않으려고 그리고 이미 걸린 자는 치료하려고, 성당에 모여 죄를 참회했지만 오히려 그곳에서 병을 옮기고 옮았다. 그래서 더 많이 죽었다. 예나 지금이나 인간의 어리석음은 그 깊이를 측량하기 힘들다.) 질병의 치유는 믿음이나 신앙의 영역이 아니라 의학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의학기술이 발달하려면 경제발전이 필수적이다. 사회에 부가 쌓여야 과학기술 연구개발에 투자할 여유가 생기기 때문이다.

수명증가도 과학기술발전의 공이다

평균수명도 엄청나게 늘었다. 불경 우주론에 의하면, 악세(惡世)에서는 수명이 줄어 평균수명이 10세 까지 갔다가, 선세(善世)에서는 늘기 시작해서 84,000세까지 이른다 하니, 평균수명이 예전의 40살에서 지금의 80살까지 두 배로 폭증한 걸 보면 우리는 지금, 과거에 비해서, 선세에 살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모두 과학의 힘이다. 농업혁명, 화학비료, 농기구기계학, 석유, 전기에너지, 비닐화학, 경제학, 섬유학, 토목공학이 없으면 인구를 유지하지 못한다. 그러면 선업을 쌓고도 인간으로 태어날 기회를 얻지 못한다. 이게 말이 되는가? 따라서 과거에 비해 인구가 폭증했다면 인간 세상은 더 나아지고 있다는 증거이며 (사실 더 나아지고 있다), 이에는 과학기술의 공이 지대하다. 자유민주사회를 이룩한 정치·사회제도 개혁의 공도 있으며 인간의 욕망을 자극하고 저장하는 화폐를 다루는 경제학의 공도 크다. 화폐의 본성은 난폭하기에 잘 통제하지 못하면 하이퍼인플레이션이라는 재앙을 초래한다. 인간의 삶과 미래는 과거 행(行)이 작용하기도 하지만 자유의지가 작용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결정론으로 빠져 수행을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과학이 유치한 단계에 있다구요? 과학문명은 결코 유치한 단계에 있지 않다. 과거에 비해서 눈이 어지러울 정도로 발전했다. 혜초스님이 인도까지 3년을 걸어갔지만 지금은 반나절도 안 걸린다. 만약 혜초 스님이 그 당시에 천안통으로 지금 세상을 보셨으면 “아! 저 시대 중생들은 모두 다 신족통을 하는구나” 하고 감탄하셨을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어떻게 지금의 과학이 과거보다 유치한 단계에 있는가? 그것도 4,000~10,000년 전보다!

불법은 과연 염세적 인생관인가?

모든 물질문명의 향상을 부인하는 염세적 인생관은 불법에 어긋난다. 부처님은 세속에서 열심히 살 것을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누구나 불성(佛性)이 있어 언젠가는 성불한다고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어차피 성불할 거 도 닦을 필요 없어요. 그냥 시간만 가면 되요”라고 말하는 스님은 없다. 반대로, “빨리 성불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성불할 때까지 사바세계의 삶이 주는 고통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되도록 빨리 성불함으로써 사바세계의 고통을 줄이듯이, 슬기롭게 잘 살아 사바세계의 고통을 줄여야 한다.

이 점에서 불법의 핵심은, 특히 ‘일천제 사상’(一闡提 영원히 성불할 수 없는 몹시 근기가 하열한 중생이 존재한다는 사상)을 부인하는 대승불교의 핵심은, 부처가 되자는 것이 아니라, “부처가 되는 데 걸리는 시간을 단축하자”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개별 생명체의 고통의 총량을 줄이자는 것이다.

지금까지 과학기술이 인류 문명과 삶의 질을 향상시켜 인류 행복증진에 지대한 공을 세워온 점을 감안하면, 인류에게 새로운 조망을 던져주는 과학발견을 특히 진화론을 공부하고 이해하여 불법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내놓아야 한다. 현대인의 마음을 어루만져줄 수 있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여야 한다.

그것이 세대를 이어가는 인류의 희망이기 때문이다. 과연 선대 인류가 그냥 주저앉았다면, 자연과 질병에 휘둘리지 않고 당당하게 사는 지금 21세기의 삶이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스승과 선배를 뛰어넘는 것이, 제자와 후배의 의무이자 스승과 선배의 은혜를 갚는 길이다.

오직 향상일로뿐

어떤 사회든지 만약에 모든 구성원들이 불평이 없고 행복하다면, 그 사회는 이미 천국이다. 하지만 그런 사회는 인류역사상 존재한 적이 없다. 특히 집단이 클수록 더욱 그러하다. 과학기술과 예술과 정치·경제·사회·복지·놀이·교육제도 등 어느 것 하나 완벽한 것은 없다. 그렇다고 불완전을 이유로 비난할 수는 없다. 우리 불완전한 인간은 끝없이 개선하며 앞으로 나아갈 뿐이다. 설사, 영원히, 완벽한 사회인 낙원에 이르지 못할지라도! 이걸 향상일로(向上一路)라 한다.

오늘이 어제보다 나을 수 있다면,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많은 사람들이 불행한 이유는 오늘이 어제보다 낫다는 사실을, 즉 자신이 얼마나 복을 누리고 사는지를 자각하지 못해서이다. 이 점에서 행복은 분명 우리 마음에 달려있다. 진실로 인식의 전환은 세속적이건 궁극적이건 고를 소멸하고 행복을 가져온다.

마지막으로,

진화론은 가설이 아니라 사실이다

진화론을 가설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진화론은 그 증거가 84,000 대장경만큼 쌓인 엄연한 진리이다. 큰스님들의 반(反)진화론적인 그리고 반과학적인 사상·발언과 진화론·과학 중 어느 쪽을 진리로 받아들일지는 전적으로 여러분의 몫이다.

달라이라마가 한 말을 상기하시기 바란다. “나는, 과학과 불경이 충돌하면, 과학을 택할 것이다.” 나도 틀릴 수 있다는 열린 자세를 가져야만, 종교가 과학과 보조를 맞출 수 있다.

[1298호 / 2015년 6월 1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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