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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공-상

▲ 일러스트=김주대 문인화가·시인

연기법은 어떤 것도 그것이 기대고 있는 연기적 조건에 따라 본성이 달라진다고 설한다. 본성이 달라지니 규정도 달라질 것이다. 가령 달걀이 어미의 따뜻한 품속에 들어가면 병아리가 되겠지만, 냄비의 뜨거운 물속에 들어가면 삶은 달걀이 된다. 똑같은 달걀이지만, 전자의 경우에는 한 생명체의 ‘알’이고, 후자의 경우에는 음식물의 재료다. 다른 본성을 갖고 다른 규정성을 갖는 것이다.

달걀이 한 생명체가 됐다가
때론 식재료가 되는 것처럼
모든 규정은 조건이 만들어
조건 지우면 뭐라 할 것 없어

그런데 그런 연기적 조건에 처하기 이전이라면 어떨까? 어미의 품도, 뜨거운 물도 만나기 이전의 달걀이라면? 닭이 낳은 알이니 한 생명체의 수정란이라고 해야 한다고 할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이 병아리가 되지 못한다면, 그저 인간이 먹을 음식물이 될 뿐이라면, 그걸 ‘수정란’이나 ‘알’이라고 말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슈퍼마켓에서 파는 달걀은 차라리 식재료라고 해야 더 사실에 가까울 것이다.

여기서 달걀은 ‘알’이라고 하는 생각이나 ‘식재료’라고 하는 생각은 모두 이후 그것이 처하게 될 연기적 조건을 상상하고, 그 속에서 얻게 될 규정성을 미리 부여한 것이다. 연기적 조건 이전의 본성 같은 걸 생각하려면, 그 모든 상상마저 삭제해야 한다. 성분이 무엇이고를 따지는 것도 이미 무언가 또 다른 연기적 조건을 암묵적으로 떠올리고 있는 것이다. 단백질과 지방이 몇 %인지 따지는 건 이미 음식물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다. 가령 싫어하는 사람을 향해 던질 달걀이라면 그런 거 따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저 깨지면서 누군가를 불편하게 할 끈적대는 성분이면 족하다.

모든 본성이나 규정성은 연기적 조건과 함께 오는 것이기에 연기적 조건 모두를 지우면, 남는 것은 아무런 본성도, 어떤 규정성도 없는 무엇이 된다. 어떤 규정성도 없음, 그것이 ‘공(空)’이다. 어떤 규정성이나 본성이 없기에 연기적 조건에 따라 그 조건이 규정하는 규정성을 받아들일 수 있다. 그렇기에 공은 단지 ‘없음’을 뜻하는 ‘무’가 아니다. 그건 차라리 가능한 규정성들이 너무 많아서 뭐라 하나로 규정할 수 없는 상태라고 하는 게 더 적절하다. 알도 될 수 있고, 식재료도 될 수 있고, 남을 괴롭힐 무언가가 될 수도 있고, 실험재료도 될 수 있고…. 규정성은 없지만 수많은 규정가능성을 갖는 상태, 그게 공이다.

이런 점에서 공이란 개념은 연기란 개념과 짝을 이룬다. 어떤 것이 음식물이나 생명체가 되게 하는 것이 연기적 조건이라면, 어떤 연기적 조건과도 만나기 이전의 상태가 공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어떤 것의 본성이 ‘공’함을 본다는 것은 텅 빈 허공을 보는 것도, 아무 것도 없는 무를 보는 것도 아니다. 그것이 만나게 될 연기적 조건에 따라 얻게 될 규정가능성들을 보는 것이고, 그 조건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것이 될 수 있는 잠재성을 보는 것이다. 공성을 본다 함은 수많은 규정가능성을 향해 열려 있음을 보는 것이고, 최대치로 열린 잠재성 속에서 어떤 것을 보는 것이다.

알다시피 ‘줄기세포(stem cell)’란 유기체의 특정한 기관의 일부로 분화되기 이전의 세포다. 수정란과 비슷한 상태여서, 아직 어떤 기관으로 분화되지 않은 상태의 세포다. 이 세포는 어느 기관, 어느 세포와 만나는가에 따라, 즉 연기적 조건에 따라 다른 세포로 분화된다. 척추 속의 신경세포 속에 끼워 넣으면 신경세포가 되고, 피부에 끼워 넣으면 피부세포가 되고, 허파 속에 끼워 넣으면 허파세포가 된다. 그냥 발생시키면 독자적인 개체가 된다. 그래서 ‘만능세포’라고도 한다. 어떤 것도 될 수 있는 세포란 의미에서.
그것이 만능인 것은 아직 어떤 세포로도 분화되기 이전이기 때문이다. 그것과 만나는 조건에 따라 어떤 세포도 될 수 있는 것은 그 모든 규정성 이전의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떤 규정성도 없지만, 가능한 모든 규정성을 다 갖고 있는 상태, 수많은 규정가능성을 가진 상태다. 그 규정가능성의 폭이 바로 그 세포의 잠재성을, ‘만능’이라고 명명되는 잠재적 능력을 뜻한다.

연기에서 공으로 ‘거슬러 올라감’은 이처럼 연기적 조건 이전으로 물어 올라감이고, 규정성 이전의 잠재성으로 올라가는 것이다. 물론 ‘줄기세포’는 아직 충분히 물러 올라가지 못한 것이다. 줄기세포라는 규정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유기체의 세포 속에 밀어 넣으려는 규정요인이, 유기체라는 조건이, 유기체를 특정한 목적에 맞추어 변형하려는 치료적 내지 실험적 조건이 그걸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조건 일체를 삭제한다면 어떻게 될까? 연기적 조건과 더불어 그것에 주어진 모든 규정성이 사라질 것이다.

공성의 사유는 모든 연기적 조건으로부터 추상하여, 연기적 조건 이전에 그것이 무엇인지를 보는 것이다. 그래서일 것이다. 용수(Nagarjuna)의 ‘중송’에 붙인 주석에서 청목(Nilanetra)은 공성을 사유하려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쓴다. “십이연기나 오온, 십이처, 십팔계 등의 결정적[규정된] 상을 추구하기만 하여 부처님의 의도하신 바를 알지 못하고….”(‘중론’, 김성철 역, 28쪽) 그래서 규정된 상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려는 것이다. 이렇게 더욱 근본으로 물어 올라갈 때 만나게 되는 것, 그게 바로 공이다. 모든 규정에서 벗어난 순수 잠재성.

공성을 본다 함은 연기적으로 규정된 상에서 거슬러 올라가 연기적 조건 이전엔 어떤 규정도 갖지 않음을, 어떤 의미도 갖지 않음을 보는 것이다. 그것은 분명 무규정성이지만 그것이 만나게 될 연기적 조건에 따라 이런저런 규정성을 갖게 될 무규정성이고, 무의미지만 조건에 따라 이런저런 의미를 갖게 될 무의미다. 그것은 규정가능성을 갖는 무규정성이고, 다양한 의미화를 향해 열린 무의미다. 그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뜻하는 무가 아니라, 수많은 규정가능성을 갖는 무규정성이다. 수많은 규정가능성을 갖기에 어느 하나의 규정성을 부여할 수 없는 잠재성이다.

생명체가 아니어도 마찬가지로 말할 수 있다. 물 분자의 일부로서 산소라는 이웃한 원자와의 결합에서 분리된 수소는 이제 물 분자이기를 중단한다. 그것은 이웃한 수소원자와 분리되어 소수이길 중단한 수소원자와, 이웃한 탄소원자와 분리되어 메틸기로부터 분리된 수소와 구별되지 않는다. 그것은 그 자체로는 어떤 분자적 성질을 갖지 않는, 그렇기에 수많은 분자적 성질을 가질 수 있는 입자다. 역으로 수소원자는 수소나 물, 메틸기, 혹은 메탄이나 에탄올, 아세트산 등 수많은 분자 속으로 들어가 수많은 분자적 규정성을 가질 수 있는 잠재성을 갖는다. 과잉된 잠재적 규정성을 갖기에, 어느 하나의 규정성을 부여하는 것이 불가능한 상태, 그것이 공이다.

물론 수소원자는 수소원자로서의 특정한 성질을 갖는다고 할 것이다. 여기서 다시 거슬러 올라가는 길을 갈 수도 있을 것이다. 수소원자라는 조건에서 분리된 양성자나 전자로, 그것들의 성질이 사라지는 더 일차적인 또 다른 소립자로. 삼매로 얻은 주시의 능력을 통해 오온이나 미립자적 원소로 거슬러 올라갔던 아비달마 수행자들은 아마도 그런 식으로 궁극의 최소입자를 향해 갔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경우 공은 근원에 있는 어떤 원소적인 상태를 뜻하는 것이 되고 말 것이다. 하지만 이 경우 공을 보기 위해선 상태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환원의 길을 따라가야 한다고 오해하게 될 것이다. 공을 보기 위해선 공성을 갖는 것들의 세계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는 식의 오해.

중요한 것은 수소원자가 수소원자인 채 공성을 가짐을 보는 것이고, 물이 물인 채, 줄기세포가 줄기세포인 채, 달걀이 달걀인 채, 사람이 사람인 채 공성을 가진 존재임을 보는 것이다. 사람이란 규정성을 가진 그대로 수많은 규정가능성을 가진 무규정적 존재임을 보는 것이다. 그래서 ‘금강경’에선 상 있는 것, 즉 규정성을 갖는 모든 것이 공함(凡所有相 皆是虛妄)을 지적하면서, “모든 상 있는 것에서 상 없음을 보면 여래를 보리라(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고 했을 터이다. 이는 이미 어떤 연기적 조건에 기대고 있기에 어떤 규정성을 갖고 있지만, 그 규정이 조건에 따른 것이며, 그렇기에 조건이 달라지면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음을, 그런 변화에 열려 있음을 보는 것을 말하는 것일 게다.

따라서 ‘거슬러 올라감’이라고 했지만, 그것은 사고와 통찰의 운동방향을 표시하는 것이지, 실제로 시간을 따라 거슬러 가는 것은 아니다. 있는 그대로의 상태에서 그것의 공성을, 잠재성을 보는 것이고, 그것이 다른 규정가능성에 열려 있음을 보는 것이고, 새로운 규정성을 향해 지금의 그것을 바꾸어 가는 것이다.

따라서 수정란이나 줄기세포만이 아니라 이미 발생하여 기관이 된 것에서도, 그것의 현행적 규정성과 다른 잠재성을 본다면, 현행적인 것과 다른 것이 될 수 있는 능력을 본다면, 그것은 현행의 연기적 조건을 ‘거슬러 올라가’ 공성을 보는 것이다. 그 현행성 속에 ‘숨은’ 다른 가능성을 보고, 그것이 실제로 구현될 수 있도록 새로운 조건 속에 밀어 넣는 것이다. 가령 음식물을 먹어 영양소를 섭취하는 기관으로 작동하고 있는 입을, 공기의 흐름을 적절하게 조절하여 말로 바꾸는 기관으로 바꾸는 것은, 입이 갖고 있는 그 잠재성을 가동시키는 것이다. 이는 입이 갖고 있는 공성으로 인해, 다른 규정성을 향해 열린 그 잠재성으로 인해 가능한 것이다. 잠재성이 크다고 함은 이런 가변성이 큼을 뜻한다. 공성이란 모든 가변성의 ‘바탕’이고 ‘근거’다. 발디딜 아무 규정이 없다는 점에서 바닥없는 근거다.

이진경 서울과학기술대 교수 solaris0@daum.net

[1298호 / 2015년 6월 1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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