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산(1927∼2004) 스님이다. 스님은 ‘오직 모를 뿐’이라는 지침을 바탕으로 생각의 전환과 마음의 혁명을 일으켰으며 서양과 동양, 불교와 기독교를 넘어 삶의 방향을 이끌어 주었던 스승으로 기억되고 있다.
스님은 동국대에서 철학을 공부하던 중 기성세대가 좌우로 나뉘어 사상적으로 대립하는 모습을 보며, 자신의 정치적 운동이나 학문으로는 사회에 도움을 줄 수 없음을 자각하고 ‘절대적 진리를 얻겠다’는 마음으로 스스로 삭발하고 산으로 들어갔었다. 거기서 ‘범소유상(凡所有相) 개시허망(皆是虛妄) 약견제상비상(若見諸相非相) 즉견여래(卽見如來)’의 ‘금강경’ 사구게를 보면서 눈이 밝아졌다. ‘무릇 모든 상(相)이 있는 것은, 모두 허망한 것이니, 만일 모든 모양 있는 것이 모양이 아님을 안다면, 바로 여래(부처)를 보리라’는 이 사구게가 소크라테스의 사상과 동양철학이 일치하는 곳이라는 데에 생각이 미쳤고, “불교의 골수가 여기 있다”는 확신을 하게 된 것이다.
여기서 출가를 결심했고 출가 열흘 만에 100일 정진에 들어갔다. 정진에 정진을 거듭하던 스님은 고봉 스님 문하에서 참선을 배웠고, 수덕사에서의 100일 결제 후에는 춘성, 금봉, 금오 스님을 찾아 법거량을 통해 인가를 받았다. 이후 다시 만난 고봉 스님은 “네가 꽃이 피었는데, 내가 왜 네 나비 노릇을 못하겠느냐”며 크게 기뻐했고, 22세 되던 1949년 1월25일 정식으로 법을 전했다. 숭산이라는 당호도 이때 받았다.
스스로를 더욱 담금질하던 스님은 1966년 일본에 홍법원을 열어 해외포교를 시작했고, 1972년 미국으로 건너가 본격적으로 세계일화의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스님은 영어가 유창하지 못했음에도 어린아이와 같은 천진한 얼굴로 보여주는 본래 마음과 그 마음을 강하게 전달하는 ‘할’이 있었기에, 단어 나열식 영어만으로도 사람들의 가슴을 적시고 울릴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결과 미국은 물론 체코, 아프리카 등 전 세계 32개국에 120여 개에 달하는 포교센터를 세울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껏 누구도 실현하지 못한 해외포교의 위업을 달성했음에도 숭산 스님에 대한 한국불교계의 반응은 다소 미온적인 게 사실이다. 또 스님의 수행론 및 조직 운영 방식에 대힌 비판적 기류도 적지 않다. 왜 그럴까? 스님이 개발한 간화선 수행체계가 일본 임제종 참선수행체계를 수용했다는 점, 선 센터 내 조직운영에 있어서 남녀의 차별과 출재가의 구분이 없다는 점 등이 그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이 책 ‘숭산행원의 생애와 사상 -한국 간화선의 대중화·세계화를 중심으로’는 숭산 스님의 생애와 사상, 활동에 대한 최초의 연구서라 할 수 있다. 숭산 스님 연구에 천착해온 최용운 박사가 숭산 스님이 집대성한 수행법과 일본 임제종 수행법 사이의 유사점을 심도 있게 분석했고, 이를 바탕으로 관음선종이 갖는 의미에 대한 새로운 차원의 해석을 시도했다.
책은 그래서 숭산 스님이 한국불교계에 주는 의미와 과제가 무엇인지 담고 있다. 따라서 숭산 스님이 간화선의 대중화와 세계화를 표방하고 나선 한국불교계에 던지는 화두를 만날 수 있다. 1만7000원.
심정섭 기자 sjs88@beopbo.com
[1298호 / 2015년 6월 1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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