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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다운 불자의 길-하

“선행도 악행도 각자의 몫, 당신의 스승은 오직 당신뿐입니다”

▲ 누구를 위한 오체투지인가. 티베트 라싸에 있는 조캉사원 앞에서 티베트 불자들이 끊임없이 오체투지 수행을 하고 있다. 이들은 오직 선한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기도를 한다.

“부처님께서는 이와같이 말씀하셨다. 열반에 이르는 길을 너희에게 보여주겠다. 그러나 열반을 성취하고 못하는 것은 전적으로 너 자신에게 달려있다. 나는 축복을 통해, 구원을 위한 기도를 통해 너를 인도할 수는 없다.”

물론 세계 주요 종교인들이 마음의 평화를 이룩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보다 나은 세상을 구현하는데 있어서 똑 같은 가능성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개인의 중요성을 강조한다는 것이 불교, 자이나교 일부 상키아학파의 특징 중 하나입니다. 자업자득(自業自得, self-creation)이 근본 원리입니다. 우리는 인과율을 믿습니다. 바른 행위를 하면 긍정적인 결과가 오게 됩니다. 잘못된 행위를 하면 부정적인 결과가 따릅니다. 인과율 때문에 잘못된 행위를 했을 때 부처님께서도 당신을 구제할 수는 없습니다.

“열반에 이르는 길을 너희에게 보여주겠다. 그러나 열반을 성취하고 못하는 것은 전적으로 너 자신에게 달려있다. 나는 축복을 통해, 구원을 위한 기도를 통해 너를 인도할 수는 없다.”

부처님은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부처님은 결코 은총을 베풀어 열반에 이르도록 해주겠다고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당신은 당신 스스로의 스승입니다. 그런 가르침은 매우 큰 보탬이 됩니다. 그리고 이익이 됩니다. 모든 것은 자신의 행위에 따라 좌우됩니다. 긍정적인 행위이던 부정적인 행위이던 행위는 전적으로 동기(動機)에 따라 좌우됩니다. 그런 방법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은 마음의 평화를 얻는데 크게 기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불교 종파간의 화합에 대해 말씀 드리겠습니다. 버마, 라오스 그리고, 여타 국가에서 온 지도자들과 만났을 때 말했듯이 ‘히나야나(Hinayana)’, ‘마하야나(Mahayana)’ 그리고, ‘탄트라야나(Tantrayana)’ 등과 같은 소위 명칭 때문에, 과거에는 이 세 가지 ‘야나(yana 수레)’가 정말로 서로 다르게 분리된 종파라는 인식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완전히 잘못 알고 있는 것입니다. 오류였습니다. 짧게 언급했듯이 상좌부불교(Theravada Tradition) 또는 팔리(Pali) 불전(佛傳)은 불법(佛法)의 토대입니다. 계율의 실천도 불법의 토대입니다.

부처님 자신, 그 자신의 생애를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스스로 삭발을 하고 수행자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윤리적 도덕적 자기 수양인 계(戒)의 수행입니다. 그는 6년간 명상수행을 했습니다. 그것은 ‘몰입된 집중’인 삼매수행이고 또한 지관의 위빠사나 수행입니다. 그렇게 하여 마침내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지계, 삼매, 반야지혜 또는 위빠사나가 세 가지 수행법이 됩니다. 우리 불자들은 그 길을 따라가야 합니다. 계의 수행이 없이, 율의 수행이 없이 어떻게 삼매나 위빠사나 수행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어렵습니다. 그래서 팔리 불전은 불법의 토대가 됩니다. 그 위에 산스크리트 불전에서 유래한 완전한 지혜인 반야바라밀경(經) 수행이 오게 됩니다. 그것은 사성제의 세 번째로서, 괴로움과 그 원인의 소멸을 가르치는 멸제(滅諦)를 강조합니다. 추가된 설명은 매우 중요합니다. 무엇이 멸제일까요? 부처님은 우리의 무지(無智)를 제거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우리의 마음에서 무지를 완전히 제거하면 그것이 멸제이고 해탈입니다. 그것이 추가적인 설명입니다. 그리고 사성제의 네 번째로서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인 도제(道諦) 또한 추가적인 의미입니다.

팔리 불전이라는 바닥 층 위에, 2층에 해당하는 산스크리트 불전이 오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바닥 층이 먼저 만들어지게 됩니다. 그것이 팔리 불전입니다. 자기 수양인 계를 수행하고 그 위에 2층을 세웁니다. 반야바라밀경과 논(論), 지혜에 관한 주제별 지식체계인 아비달마가 그것입니다. 이는 지혜에 대한 가르침이고 궁극적인 수행 방법인 육바라밀 또는 십바라밀을 의미합니다. 그 위에 위빠사나, 사마타(寂止), 보리심(모두를 위해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마음) 수행을 바탕으로 신들을 관상(觀想)하는 탄트라불교가 위치합니다. 이것이 1층, 2층, 3층에 해당합니다. 1층이 없으면 다른 층을 세울 수가 없습니다. 여기에 있는 불자 형제·자매는 이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인식 아래 수행을 실천해야 합니다. 수행은 그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습니다. 직접 실천해야 합니다.

물론 저는 세 가지 수행에 대한 권위자가 아닙니다. 저는 스스로를 배우는 사람으로 생각합니다. 시간이 날 때마다 항상 공부하고 읽고 읽고 또 읽습니다. 티베트 불교와 관련해서는 약 300권 정도의 경전이 팔리어, 산스크리트어, 일부 네팔어 등 인도어로부터 티베트어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시간이 날 때마다 300권의 경전을 읽고 생각하고 공부합니다. 이 300권을 만져 보지도 못한 사람보다는 제가 확실히, 약간 더 많이 알고 있습니다. 이 책들을 공부하면서 저는 세 가지 수행이 지극히 중요하다고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다음으로는 바른 수행승이 되기 위한 방법에 대해 말씀 드리겠습니다.

먼저 우리 불자는 상좌불교든, 대승불교든 아니면 탄트라불교든 진실한 부처님의 제자가 되어야만 합니다. 그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명확히 말하건대 불제자가 되기 위해 단지 다른 승려의 법복을 빌려서 걸칠 수는 없습니다. 그런 사람을 불교 승려라고 부를 수는 없습니다. 훌륭한 승려라고 부를 수도 없습니다. 단지 옷만 바꾸어 입는 것은 쉽습니다. 여기서 진실한 불자가 되기 위해서는 가슴과 마음의 변화가 필요합니다. 그러한 변화는 절실하고 중요합니다. 불교 승려가 되기 위해 심각하게 자기 수행을 해야 합니다. 때때로 상황이 “오, 부처님께서 일체의 힘든 일을 하도록 내버려 둬라. 우리는 사치스러운 삶을 살 수 있어”라고 하는 것처럼 보여질 수도 있습니다. 어떻게,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요? 우리가 불자라면 ‘부처님 자신의 길’을 따라가야 합니다. 6년간의 고행이 그것입니다. 부처님의 모범을 따라야 합니다.

앞서 언급했지만 한 친구가 팔리 불전과 산스크리트 불전에는 일종의 차이 또는 벽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벽은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서로 모여 결집하여 주고받아야 합니다. 서로의 전승과 계(戒)에서 우리가 배울 것은 매우 많습니다. 단지 의례적인 방법뿐만 아니라 보다 정례적인 모임, 진지한 미팅, 진지한 토론이 매우매우 중요합니다. 이것이 한 가지 방법이며 유일한 방법입니다.
다음으로 비구니 제도의 부활에 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저는 비구니 제도에 대해 티베트인과 몽골인들이 따르는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 종파에서 비구니 제도의 부활을 처음부터 지지해 왔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율장을 따라야 합니다. 만약 제가 독재자처럼 행동할 수 있는 특별한 권한을 가지고 있다면 “오, 그렇게 하라”라고 말하겠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럴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율장을 따라야만 합니다. 설일체유부율, 동아시아에서 따르는 법장부(法藏部)율, 동남아시아에서 따르는 상좌부율을 따라야만 합니다.

보시다시피 이것은 우리가 매우 심각하게 토론해야 할 중요한 주제이자 과제입니다. 토론의 결과는 제가 통제할 수는 없습니다. 대규모 사원에서 연구할 수 있는 것과 동일한 수준의 연구를 티베트 사회의 모든 여성 수도사원에 도입하는 것은 제가 결정할 수 있습니다. 이미 여성 불교철학박사인 게시마(geshema)가 된 여성 출가자가 있습니다. 그들은 훌륭한 학자입니다. 저는 비구니 이슈에 대해 때때로 논의를 해왔고 앞으로도 또한 그렇게 할 것입니다. 최근 ‘호소 서한’을 라오스 불교지도자들에게 보여주었고 미얀마 불교지도자에게도 또한 보여주었습니다. 우리는 진지한 토론을 이어갈 것이고 결국에는 어떤 합의에 이르게 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불자로서 저는 부처님의 가르침은 여전히 지금 이 시각에도 유효하다는 것을 거듭 밝히고 싶습니다. 물론 부처님께서 입멸하신지 2500년이란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오늘날 우리가 공존하는 이 세상에서도 그 가르침은 매우 유효하고 유용합니다. 불자는 물론 이웃 종교인, 지구촌의 형제·자매에게도 이와같이 말하고 싶습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오늘날 수많은 일류의 과학자들은 파괴적이고도 강압적인 감정을 제어할 수 있는 더 많은 정보와 수단들을 구하기 위해 매우 열심히 노력하고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가르침 자체는 매우 훌륭합니다. 하지만 자질이 퇴화된 라마, 툴쿠(환생 라마) 또는 스승들이 있다는 조짐을 실제로 느끼면서 안타까운 감정을 갖게 됩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 심각하게 우려하고 있습니다. 스스로 절제된 삶을 살지 못하면서 자질이 퇴화된 라마와 툴쿠, 스승들이 어떻게 타인을 가르칠 수 있을까요?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바른 길을 보여주기 위해 스스로 먼저 그 길을 가야 스승으로서의 가치가 있다고 할 것입니다.

거듭거듭 강조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일상에서 정말로, 진심으로 진지해야 합니다. 저를 포함해 불교의 승려라고 한다면 적어도 항상 스스로를 관찰해야만 합니다. 매일 아침 깨어나면 곧바로 부처님을 기억하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암송하면서 마음을 가다듬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루의 남은 시간들은 계율에 따라 보내야만 합니다. 이것을 어긴다면 정직하고, 진실하고, 자비롭고, 평화롭고, 비폭력적으로 시간을 보내야만 합니다. 그것이 수행자의 길이며 의무입니다. 여러분이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해 법문하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펼치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할 때 스스로 여기 당신의 가슴 속에 먼저 전파하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지극히 중요한 가르침입니다. 스스로가 먼저 수행자로서 부끄러움이 없어야 바른 법을 펼칠 수 있습니다. 스스로 계율에 묻고 관찰하시기 바랍니다.

<출처=달라이라마오피스 홈페이지>
번역=백영일 번역전문위원

[1298호 / 2015년 6월 1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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