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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공-중

무엇이든 될 수 있기에 뭐라 규정할 수 없어

▲ 일러스트=김주대 문인화가·시인

우리는 어떤 소리를 들으면 아름답다고 느끼고 어떤 소리를 들으면 시끄럽다고 느낀다. 하지만 아름다운 소리와 시끄러운 소리를 가르는 명료하고 뚜렷한 기준은 없다. 예전에는 ‘화음’이라고 불리는 소리, 즉 ‘음악적 소리’와 화음 아닌 소리, 즉 비음악적 소리가 음정 같은 개념에 의해 명료하고 뚜렷하게 구별될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그러나 초기 ‘현대음악가’인 에드가 바레즈(Edga Varèse)는 망치질 하는 소리나 사이렌소리도 음악적 소리로 사용하고, 소닉 유스(Sonic Youth)나 마이 블러디 발렌타인(My Bloody Valentine) 같은 록그룹은 한 곡의 처음부터 끝까지 ‘소음’을 연주한다. 놀라운 것은 그런 소음을 사용한 노래에 대중들이 대대적인 열광과 지지를 보낸 적이 있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소음으로 가득 찬 소닉 유스의 ‘틴에이지 라이옷(Teenage Riot)’은 대단한 상업적 성공을 거둔 곡이다. 그렇기에 이젠 음악적 소리와 비음악적 소리가 따로 있다는 생각은 세상모르는 소리가 되었다. 모든 소리가 음악적 소리가 될 수 있게 된 것이다. 존 케이지(John Cage)의 ‘4분 33초’는 소리 없는 침묵마저 음악적 소리의 일부임을 보여주었다.

일상에 듣는 모든 소리는
공기 파동이 만들어낸 것
인연 따라 악기소리도 되고
때론 소음이 될 수 있지만
소리의 본질은 파동일 뿐

하지만 모든 소리가 아름답다고 할 순 없고, 모든 소리가 바로 음악적 소리는 아니다. 우리는 시끄러운 소리와 아름다운 소리를 여전히 구별하고 음악적 소리 안에서 좋은 소리와 그렇지 않은 소리마저 구별한다. 어떤 소리가 아름다운 소리인가 아닌가는 그 소리가 만나게 되는 연기적 조건에 의해 규정된다. 심지어 똑같은 소리도 어떤 때는 아름답게 들리고 어떤 때는 시끄럽게 들린다. 가령 힘들고 지친 이에겐 베토벤이나 브람스의 멋진 음악도 시끄럽고 불편한 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소리가 음악적 소리가 되었다는 것은 어떤 주파수의 소리도 음악적 소리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즉 모든 소리가 음악적 소리가 될 잠재성을 갖게 되었다는 말이고, 음악적 소리로 규정될 수 있게 되었음을 뜻한다. 이는 그 소리가 연기적 조건을 떠나 아무런 규정성을 갖지 않은 상태에 대해 하는 말이다. 반대로 조건에 따라 지금 음악으로 연주되고 있는 저 소리도 시끄러운 소음이 될 수 있음을, 그런 잠재성을 갖고 있음을 뜻한다. 소리의 공성을 본다 함은 이를 보는 것일 게다. 따라서 이런 차원에서 소리에는 아름다움도 추함도, 깨끗한 소리와 더러운 소리도 없다. 어떤 것도 될 수 있는 소리, 혹은 공기의 파동 그 자체만 있을 뿐이다. 순수잠재성의 세계, 공의 세계에는 깨끗함도 더러움도 없다(不垢不淨)함은 이런 의미일 것이다.

어떤 것도 될 수 있는 무규정적인 소리 그 자체, 그것은 공기가 파동을 갖게 될 잠재성 자체에 속한 것이다. 개개의 소리가 갖는 소리와 다른 차원에서 모든 규정가능성을 갖는 이러한 소리 자체, 공기가 파동화될 수 있는 능력 자체는 모든 소리의 ‘근본’이고 ‘바탕’이란 점에서 소리의 ‘체(體)’라고 할 수 있다. 각각의 소리는 이런 체로서의 소리 자체, 순수잠재성으로서의 소리가 특정한 조건에 의해 특정한 파동을 얻게 되고, 그런 파동이 이웃한 다른 파동이나 소리가 들려지는 조건 등과 만나며 이런저런 소리로서 규정되게 된다.

구체적인 소리들은 조건에 따라, 가령 음악당인가 선방인가, 강연장인가 도서관인가에 따라 늘어나고 줄어들 수 있겠지만, 그런 소리가 될 수 있는 순수잠재성으로서의 소리 자체, 파동화될 수 있는 공기의 능력 자체는 늘지도 않고 줄지도 않을 것이다(不增不減). 심지어 아무것도 연주되지 않고 말하거나 우는 동물이 모두 멸종한 시대라고 해도, 파동이 될 수 있는 공기의 능력 자체, 순수잠재성으로서의 소리 자체는 사라진 것이 아니다. 반대로 신디사이저 같은 전자 장비를 통해 새로운 소리를 무수히 만들어낸다고 해서, 파동이 될 수 있는 공기의 능력이 새로 생겨나거나 늘어난 것은 아니다.

개개의 소리는, 우리가 발성을 하거나 듣고 있거나, 연주를 하거나 자고 있을 때처럼, 조건에 따라 발생하기도 하고 소멸하기도 하겠지만, 순수잠재성의 차원에서 모든 소리가 될 수 있는 소리 자체는 발생하지도 않으며 소멸하지도 않는다(不生不滅). 만약 어떤 주파수의 소리로 발생했다면, 그것은 피아노 소리, 클랙션 소리 등 특정한 소리가 들리겠지만 그것은 파동이 될 수 있는 잠재성으로서의 소리 자체는 아니다. 하나의 소리일 뿐이다. 그 소리는 파동이 사라져 0이 되면 사라지고 들리지 않게 되겠지만, 그렇다고 소리가 될 공기의 잠재성 자체가 사라지는 건 아니다. 순수 잠재성으로서의 소리 자체, 소리의 체는 특정한 소리가 생멸하는 바탕에 있으며 그 생멸을 가능하게 하지만, 그 자체는 생멸하지 않는다. 생멸하지 않는 그 공성으로 인해 사실은 바로 그 생멸하는 소리가 만들어지고 변화되며 들리는 것이다. 소리가 존재하는 곳이면 어디가 존재하는 것이 바로 불생불멸의 소리 자체, 파동이 될 수 있는 공기의 능력(잠재성) 자체이기 때문이다.

공의 세계에 대해 말하며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을 말하는 것은 연기적 조건을 추상하여 순수잠재성으로 거슬러 올라가, 이처럼 체를 이루는 영역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이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도 아니고 따로 존재하는 별개의 원소적 소리를 찾아내는 것도 아니다. 체로서의 소리 자체가 갖는 공성이란 각각의 소리가 연주되거나 중지되거나 하는 생멸의 활동이 있는 바로 그 상태에 존재하는 것이다. 공기의 파동을 감지해 피리소리인지 망치소리인지를 듣는 능력이 없다면, 그 귀에 들리는 구체적인 소리가 없다면 공기가 파동은 그저 공기의 흔들림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그건 나뭇잎이나 비행기를 흔드는 진동이나 바람 같은 건 될지언정 ‘소리’로 포착될 순 없을 것이다. 그 경우 공기의 파동을 소리라고 말하는 건 무의미하거나 불가능할 것이다. 공한 소리 자체의 본성은 구체적인 소리가 없다면 없는 것이다. 생멸의 세계와 불생불멸의 세계가 둘 아닌 하나로 존재한다 함은 이런 의미일 것이다.

그러나 양자를 단지 하나라고 할 수는 없다. 소리 자체라고 명명한 공기의 그런 잠재성을 피리소리, 북소리로 현행화된 소리와 같다고는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북소리라는 특정한 소리로 현행화된 순간에도 공기의 파동화될 능력인 소리 자체는 동시에 존재하지만, 그 경우 그 잠재성은 북소리라는 규정성 바깥으로 물러나 존재한다. 북소리라는 규정성의 조명 뒤에 만들어지는 무규정성의 어둠 속에 머문 채 존재한다. 북소리 아닌 다른 소리가 될 가능성을 열어두는 잠재성의 세계 속에 존재한다. 순수 잠재성으로서의 소리 자체는, 어떤 소리로도 현행화될 수 있는 규정가능성을 갖지만, 어떤 소리로도 규정될 수 없으며, 하나의 규정된 소리가 나는 순간 무규정성의 어둠 속으로 숨는다는 점에서 규정불가능한 것이다. 그 규정불가능성은 어떤 소리든 될 수 있다는 규정가능성의 이면이다. 북소리로 현행화된 규정성과, 무규정성 속에 머문 채 다른 규정가능성을 열어두며 존재하는 규정불가능성은 하나인 동시에 하나가 아닌 것이다. 요컨대 공이란 규정가능성을 갖지만 규정하는 순간 그 규정성 밖으로 벗어나버리는 무규정적 잠재성이다. 모든 규정성의 바깥이다. 그렇기에 말할 수 없는 것이고, 규정불가능한 것이다. 모든 규정성을 가능하게 해주는 규정불가능성이다.

소리에 대해서처럼 색채에 대해서도, 형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말할 수 있다. 이런저런 색채들이 칠해지고 지워지며 만들어지는 세계란, 모든 색채가 될 수 있는 빛의 잠재성으로 인해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형태도 될 수 있는 선이나 면의 능력(잠재성), 하지만 어떤 형태도 아닌 무규정적인 순수잠재성이, 그때그때의 조건에서 이런저런 형태들을 가능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색채가 사라진다고 해도 빛의 그 능력이 사라지는 건 아니고, 모든 형태가 사라진다고 해도 선이나 면의 그런 능력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것은 빛의 파동을 색으로 포착할 능력이 없다면, 선의 움직임을 형태로 지각할 능력과 만나지 못한다면 결코 색도, 형태도 될 수 없는 것이란 점에서 그런 능력과, 그 능력이 포착하는 이런저런 색이나 형태과 더불어 존재하는 것이라고 해야 한다. 생명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말해야 할 것이다. 사람이든 코끼리든, 혹은 소나무든 버들강아지든, 이런저런 규정을 갖는 생명체가 자신이 처한 조건에서 살아가게 하는 능력, 그 순수잠재성이 바로 생명이고 생명력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런저런 조건에서 어떤 생명체가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능력 그 자체다. 그런 능력은 특정한 생명체의 능력이 아니라, 생명 그 자체에 속하는 능력이다. 코끼리나 소나무 같은 생명체와 별개로 따로 떨어져 존재하지 않는다. 그 생명체들과 함께 존재하며, 그런 생명체들로만 존재할 뿐이다.

이진경 서울과학기술대 교수 solaris0@daum.net

[1299호 / 2015년 6월 2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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