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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제3칙 마 대사의 병(끝)

“모든 병이 일시해 발병했네, 겉치레 인사로구나”

▲ 마조도일 스님은 병석에서도 어리석은 중생의 어두운 눈을 밝히고자 애썼다. 마조 스님이 깨달은 바를 처음으로 설한 중국 복건성 건양 성적사.

수시의 세 번째 단락. “이래도 좋고, 이러지 않아도 좋다. 이것은 너무 자상하다.”

선사들은 비범한 지도 수완을 발휘하여 선의 종지(宗旨)를 세운다. 스승이 학인의 수행을 지도하는 방법에 ‘방행(放行)’과 ‘파정(把定)’이 있다. ‘방행’은 스승이 수행자에게 일체를 허용해 주어서 수행자의 자유에 맡기는 것이다. 한편 ‘파정’은 방행과 반대로, 수행자의 일체를 빼앗아 버리는 것이다. 수행자의 망견을 빼앗아 ‘나’가 발붙일 틈이 없게 하여, 일체의 생각과 언설이 종적을 감추게 하는 작용이다. 파정을 ‘파주(把住)’라고도 한다. ‘방행야와력생광, 파정야진금실색(放行也瓦礫生光 把定也眞金失色)’, 방행하면 와력(瓦礫, 하찮은 물건이나 사람)도 빛을 발하고, 파정하면 진금(眞金)도 빛을 잃는다.

스승의 수행 지도 방법 2가지
수행자 근기에 맡기는 ‘방행’
언설 끊긴 경지 보이는 ‘파정’

병든 마조 찾아 안부 묻는 원주
외려 평생 잠복했던 ‘분별’ 생겨
어리석은 원주는 바로 내 모습

‘일면불 월면불’로 대답한 마조
머리 굴리며 헤아리면 ‘지옥행’
분별 미칠 수 없는 세계 드러내

“이래도 좋고, 이러지 않아도 좋다”는 ‘방행’에 해당한다.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라는 질문에 대해, 마조 선사는 어떤 때는 ‘즉심즉불(卽心卽佛)’이라 대답하고 어떤 때는 ‘비심비불(非心非佛)’이라 대답한다. “마음이 곧 부처다”라고도 하고 “마음도 부처도 아니다”라고도 한 것이다. 마음이 부처라 해도 좋고, 마음이 부처가 아니라 해도 좋다. 마조 선사는 둘 다 허용하여 수행자의 근기에 맡김으로써 ‘방행’의 기량을 보여주고 있다.

수시의 네 번째 단락. “이래도 안 되고, 이러지 않아도 안 된다. 이것은 너무 높고 준엄하여 사람을 얼씬도 못하게 한다.” 이것은 수행자의 일체를 빼앗아버리는 ‘파정’에 해당한다. 수행자가 어떤 견처를 내보여도 스승은 허용하지 않는다. 때로 스승은 언설이 끊긴 경지를 보여 수행자를 꼼짝 못하게 다잡는다. 말해도 30방, 말하지 않아도 30방. 스승은 수행자의 숨통이 끊어질 때까지 밀어붙여 일체의 사량분별이 발붙일 틈이 없는 ‘일여(一如)’의 경지를 보여 준다. 스승의 예리한 기봉(機鋒)은 참으로 사람을 얼씬도 못하게 한다. 불법의 근본적인 뜻을 묻는 정상좌의 멱살을 붙잡고 뺨을 후려갈기고는 밀어 내쳐 버린 임제 선사의 기량은 ‘파정’의 작용이다.

수시의 다섯 번째 단락. “이 두 길에 구애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좋을까? 본칙에서 제시해 보겠다.” 수시의 마지막에 이르러 원오 선사는 방행이든 파정이든 어느 쪽도 모두 빼앗아 버린다. “이래도 좋고, 이러지 않아도 좋다.” “이래도 안 되고, 이러지 않아도 안 된다.” 이 두 가지 어디에도 걸리지 말아야 한다. 둘을 초월한 경지가 다음의 본칙에 드러나 있으니 잘 보라!

<본칙과 착어>
(본칙은 굵은 글씨로 표기했고, 착어는 괄호 속에 넣었다.)
마조 대사가 병이 들었다. (← 이 노인네 꽤 실수를 하는군. 남에게 폐를 끼치면서.)
원주가 물었다.
“화상이시여, 요즘 건강은 어떠신지요?”
(← 모든 병이 일시에 발병했네. 사흘 뒤에 장례식을 치르지 않는다면 더할 나위가 없겠군. 겉치레 인사로구나.)
대사가 말했다.
“일면불(日面佛), 월면불(月面佛).”
(← 참으로 멋지군. 자비심 넘치는 제자 양성법.)

[참구]
<본칙> 마조 대사가 병이 들었다. (착어 ← 이 노인네 꽤 실수를 하는군. 남에게 폐를 끼치면서.)

‘조당집’ 권14 ‘마조 화상’에서는 본칙이 “선사가 다음날 아침 입적하려는데, 그날 저녁에 원주가 물었다”라는 내용으로 시작된다. 따라서 본칙은 마조 선사의 입적이 가까웠을 때의 일로 보아도 좋을 듯하다.
나이 많은 한 수행승이 수술을 받을 때 고함치며 말했다. “아야?, 아야?, 아야?. 고통도 즐거움도 없다고 했는데 아무 것도 없는 것이 결코 아니다.” 고통이 너무 심해서 진정 아픔밖에 없을 때, 천지에는 온통 ‘아픔’뿐 자기는 없다. 자기가 없을 때의 그 아픔이 종전의 아픔과 같을까? “마조 대사가 병이 들었다”고 한다. 오직 고통만 있을 뿐, 자기는 없다. 자기가 없을 때 우주는 자기 아닌 것이 없다. 이 얼마나 통쾌한가?

“마조 대사가 병이 들었다”에 대해 원오 선사는 “이 노인네 꽤 실수를 하는군. 남에게 폐를 끼치면서”라는 착어를 붙였다. 병은 스스로 병이라 하지 않는다. 병이라 불러 주는 사람이 없으면 병은 없다. 병이라고 불러 줄 ‘자기’가 없는데 병이 어디 있는가? 마조 대사도 노쇠한 탓에 기력이 떨어져 실수를 저지르고 있다고 일침을 놓고 있다. 

마조 대사가 병이 나서 절의 원주(院主, 사찰의 사무 일체를 처리하는 직책의 스님)에게 폐를 끼치고 있다. 원주뿐만이 아니다. 지금까지 마조 대사의 병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폐를 끼쳐 왔다. 이 공안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빼앗겼던가? 철저히 죽어야 참다운 생명으로 되살아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본칙> 원주가 물었다.
“화상이시여, 요즘 건강은 어떠신지요?” (착어 ← 모든 병이 일시에 발병했네. 사흘 뒤에 장례식을 치르지 않는다면 더할 나위가 없겠군. 겉치레 인사로구나.)

절의 원주는 마조 선사의 병세가 악화되었다는 말을 듣고 문병하러 와서 “요즘 건강은 어떠신지요?” 하고 안부를 물었다. 이 말은 병문안의 인사말로 곧잘 쓰인다. 그러나 선의 거장은 이 한마디로 상대방의 선적인 역량을 간파한다.

“요즘 건강은 어떠신지요?” 하고 건넨 인사말에 원주 자신의 수준을 송두리째 드러내 보이고 말았다. 본래의 하나를 둘로 나누어 보는 것이 병의 원인이라는 것을 원주는 몰랐던 것이다. 둘로 나누어져서 보인 세계를 그대로 진실이라고 보는 것이 ‘무명(無明)’, 즉 어리석음이다. 무명은 무시겁래로 고(苦)라는 병의 근본 원인이었다.

마조 선사는 원주가 무안자(無眼子), 곧 진리에 어두운 자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마지막까지 원주를 지도하려고 했다. 본인에게는 결코 병도 죽음도 아니었지만 원주의 눈에는 병상의 마조 대사였다. 그래서 원주는 병문안을 와서 건강을 묻고 있다. 마조 선사는 이생의 마지막 순간에도 제자의 눈을 뜨게 하려고 한다. ‘지지유법 부지유신(只知有法 不知有身)’, 다만 진리가 있음을 알고 몸이 있음을 알지 못한다. 누가 감읍하지 않겠는가?

본칙의 이 구절에 대해 원오 선사는 “모든 병이 일시에 발병했네. 사흘 뒤에 장례식을 치르지 않는다면 더할 나위가 없겠군. 겉치레 인사로구나”라 착어했다. 원래 하나인 것을 나누어서 별개로 있다고 집착하는 사람은 마음이 항상 병들어 있다. 병은 스스로 병이라 하지 않는다. 발병한 사람은 마조 선사가 아니라 원주였다. 원주는 평생 동안 잠복해 있던 병이 지금 한꺼번에 발병했다.

이것을 원주의 일로만 여겨서는 안 된다. 어리석은 원주는 곧 나의 모습이다. 원주처럼 중병에 걸려 있지만 중병에 걸린 줄도 모르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많겠는가? 그래서 원오 선사는 “사흘 뒤에 장례식을 치르지 않는다면 더할 나위가 없겠군”이라고 비아냥거렸다. 자신이 중병에 걸린 줄도 모르고 병문안 온 원주. 그가 말하는 “요즘 건강은 어떠신지요?”는 중환자가 건강한 사람에게 하는 겉치레 인사이다. 아프지 않은 것 같지만 실제로는 아픈 사람이, 아픈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아프지 않은 사람을 병문안 왔다. 괴이하지 않는가?

<본칙> 대사가 말했다.
“일면불(日面佛), 월면불(月面佛).” (← 참으로 멋지군. 자비심 넘치는 제자 양성법.)

일면불은 1800년의 수명을 가진 장수하는 부처이고, 월면불은 하루 낮밤의 수명을 가진 단명의 부처이다. 마조 선사가 “일면불, 월면불”이라 한 것은 수명의 장단은 상대적인 것으로 절대적인 가치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을 보이기 위함이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마조 선사는 그런 지푸라기에는 용무가 없다.

“일면불, 월면불”은 ‘전통적인 참구해야 할 화두’이다. ‘일면불’, ‘월면불’을 말로 설명하면 할수록 진리에서 멀어진다. ‘일면불’, ‘월면불’에 한 순간이라도 머리를 굴리면 지옥행. 사려분별(思慮分別)이 미칠 바가 아니다. 일체의 분별이 끊어진 온 천지엔 “일면불! 월면불!”, 이 일성(一聲)뿐이다. 부처도 조사도 도저히 손댈 수 없는 철 쐐기다. 오직 “일면불! 월면불!”, 이 일성의 진실을 참구하여 “일면불, 월면불” 그 자체가 되라. 자, “일면불, 월면불”의 견처를 보여라.

원오 선사는 여기에 “참으로 멋지군. 자비심 넘치는 제자 양성법”이라는 착어를 붙였다. 마조 선사가 “일면불, 월면불”이라 했을 때 천지엔 이 일성의 노당당(露當當)뿐이었다. ‘노당당(露當當)’이란 숨김없이 있는 그대로 당당하게 드러나 있다는 뜻이다. 이 무심의 일성이 하늘을 뒤덮고 땅을 뒤덮으면 “일면불, 월면불”에 일체를 초월한다. 시간도 공간도 초월하고, 삶도 죽음도 초월한다. “일면불, 월면불.” 이 얼마나 크고 넓은가? 이것 이대로 너무나 분명하다. 여기에 무슨 말을 더 하겠는가?

마조 선사의 가르침이 이렇게 입을 여는 순간 뱃속을 다 보이듯 했기에 원오 선사는 “자비심 넘치는 제자 양성법”이라 착어했다. 그 가르침이 더할 나위 없이 친절하다는 것이다.

‘양면경상조(兩面鏡相照), 어중무영상(於中無影像)’, 두 거울이 서로 비추니 둘 사이에 어떤 상(像)도 끼일 틈이 없다. 보는 자와 보이는 것 사이에 간격이 없어 한 생각(一念)도 일어나지 않는다. “일면불, 월면불” 그 자체가 되어라. 그때 ‘냉난자지(冷暖自知)’, 스스로 분명히 안다.

오곡도명상수련원 원장 www.ogokdo.net

[1299호 / 2015년 6월 2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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