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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조선총독부의 사찰림 정책

총독부 규제 대상으로 전락…신라 이후 경험하지 못한 시련

▲ 운길산 정상에서 바라본 수종사의 숲. 운길사는 일제강점기에 경기도 소재 사찰 중 가장 넓은 사찰림을 소유했다.

조선말까지 사찰은 왕실과 상호보험적 관계를 지혜롭게 유지하면서 억불숭유의 힘든 세월을 견뎌내었다. 조선 말기에는 봉산을 자임하면서 양반 권세가나 토호의 탐욕에서 사찰 숲을 지켜내었다. 미약하게나마 긍정적으로 작용하던 조선왕실의 보호막마저 사라진 일제강점기에 사찰 숲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

사찰숲 기록이 많지 않지만
‘조선임업사’에 일부내용 담겨

국권침탈 다음해 사찰령반포
사찰재산·승려활동 모두규제

일제 수탈로 사찰재정 열악
이에 따른 사찰림 남벌 우려

사찰 숲의 유래와 관리에 관한 조선시대의 기록을 쉬 찾을 수 없듯이, 일제강점기의 사찰 숲에 대한 기록도 많지 않다. 사단법인 조선임업협회가 1944년 12월에 펴낸 ‘조선임업사’에 수록된 사찰림에 관한 소략한 내용을 주시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관변단체인 조선임업협회가 조선총독부의 산림정책을 옹호하고 업적을 선전하고자 2000여쪽 분량으로 펴낸 ‘조선임업사’는 총설(1장), 임정의 연혁(2장), 임야조사(3장), 국유림의 관리처분(4장)과 경영(5장), 민유림야 경영(6장), 사방사업(7장), 임업시험(8장), 임업교육(9장), 대학 연습림(10장), 임업회단체(11장), 조선임업개발회사(12장), 민간조림경영(13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비록 대부분의 내용이 식민사관에 입각하여 1940년 말까지의 통계로 기술된 한계도 있지만, 우리 임지제도상 사적소유제도의 도입과 산림소유권의 형성과정을 상세하게 밝히고, 더불어 각 도의 사찰림 상황을 확인할 수 있어서 ‘조선임업사’의 서지적(書誌的) 가치는 작지 않다.

‘조선임업사’ 중, 사찰림에 관한 내용은 6장 ‘민유림야 경영’의 제4절 ‘공유림’의 4항 ‘사찰유림(寺刹有林)’에 수록되어 있으며, 그 내용은 사찰 숲의 기원, 총독부의 사찰림 시책, 도별 사찰 숲의 상태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지만 전체 2000여쪽 중 3쪽으로 그 분량은 소략하고, 각 도별 집계 내용 역시 1939년 말의 통계만 제시하고 있다.

‘조선임업사’에서 사찰 숲의 기원을 ‘사원의 존엄을 부르고, 아울러 일상의 용재신탄(用材薪炭)자급을 위해 보존되었던 것’이라고 간략하게 정의하고 있다. 이어지는 설명에는 ‘불교의 성쇠에 동반하여 사원의 유지상 혹은 주직(住職)의 고의에 의한 남벌(濫伐), 개간 등을 감행하여 삼림의 황폐를 초래하고 사원의 존엄을 손상시킴은 사회 교화상 영향하는 바가 적지 않기 때문에 이의 경영에 대해서는 관헌의 지시감독’이 필요한 이유를 들면서, 사찰령을 반포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우회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사찰령(1911년)은 국권 침탈 다음 해에 조선총독부가 사찰 및 승려의 일체 활동을 장악·관리하고자 반포한 전문 7조의 법령이다. 사찰령 중, 사찰 숲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내용은 ‘각 사찰에 소속되어 있는 토지, 산림, 건물, 불상, 석물, 고문서, 고서화 등의 귀중품은 조선총독의 허가를 받아야만 처분할 수 있다’고 규정한 제5조이다. 총독부의 동의가 없으면 사찰 재산을 함부로 매각하거나 변동할 수 없도록 규정한 이 조문에 따라 각 사찰 숲도 신라시대 이래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새로운 규제의 대상이 되었다. 조선총독부가 사찰의 귀중품(불상, 석물, 고문서, 고서화 등)과 마찬가지로 사찰림도 규제 대상에 포함시켰기 때문이다.

사찰림에 대한 조선총독부의 규제(또는 정책)는 사찰에 하달된 ‘관통첩’(官通牒, 행정 지침서)으로도 확인된다. 1911년 8월의 13호 관통첩은 ‘사찰에서 입목(立木)의 벌채를 출원할 때는 도 또는 부군(府郡)의 관리가 직접 현장을 방문하여 벌채사유, 풍치, 방풍, 위생 등에 관한 장애유무를 상세히 조사한 후, 벌채를 허가하며, 벌채할 때에는 남벌의 피해가 없도록 하고, 벌채한 곳에는 어린나무 가꾸기[稚樹保育]나 나무를 심어야 한다’고 통첩하고 있다. 곧이어 1911년 12월의 173호 관통첩은 ‘해당 사찰의 주지는 법령에 따라 산림 피해를 예방하고, 낙엽채취와 같은 임상의 유지 보존에 장애가 될 만한 행위를 일절 금하여 산림을 보호하라’고 통첩하고 있다. 사찰림의 경영과 보호에 대한 조선총독부의 정책의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병탄 이후 7년이 지난 1918년 6월의 99호 관통첩은 ‘사찰림의 입목벌채원에 관한 취급방법을 제시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이 내용은 1918년에 김용사, 갑사, 도갑사에 발급된 조선총독부의 ‘사유림(寺有林)벌채허가’ 통첩서류와 정확하게 일치한다.

‘사찰유림’에서 가장 많이 기술된 항목은 도별 사찰림으로, 해당 도의 사찰림 면적, 사찰림을 보유한 사찰 수와 보유 면적, 사찰림 운영 실태 등을 간략하게 소개하고 있다. 이들 내용은 비록 간략할망정 일제강점기 30여년(1910~1939) 동안 시행된 조선총독부의 사찰림 정책을 엿볼 수 있기 때문에 간과할 수 없다.

도별로 기술된 내용을 살펴보면, 먼저 경기도의 경우, 87개소의 사찰이 숲을 소유하고, 가장 많이 숲을 소유한 수종사(888정보), 흥룡사(868정보), 현등사(606정보)의 산림면적만 밝혔을 뿐 도 전체의 사찰림 면적은 언급하지 않고 있다. 충청남도에는 41사찰이 4064정보를 소유하며, 사찰 재정 문제로 지나치게 많이 벌채[過伐]할 염려가 있다고 기술하고 있다. 충청북도는 평안남도나 제주도와 마찬가지로 사찰림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전라북도는 사찰의 개소는 밝히지 않은 채 사찰림의 면적만 5958정보라고 밝힌 반면, 전라남도의 경우 70여개의 사찰이 1만4065정보의 사찰림을 소유하고, 특히 송광사, 선암사, 화엄사, 백양사, 대흥사가 1000정보 이상의 숲을 소유한다고 밝히고 있다. 넓은 숲을 보유한 이들 사찰이 필요한 재원을 사찰림에서 구하려는 경향이 있어, 그 대비책으로 10개년 산림작업[山林施業]규칙을 수립하여 경영함으로써 매년 상당한 벌채 수입을 얻는다고 밝히고 있다.

▲ 운문사의 들머리 솔숲. 운문사는 일제강점기에 경상북도에서 가장 넓은 사찰림을 소유하고 있었다.

경상북도는 129개소 사찰이 2만2073정보의 산림을 소유하며, 14사찰이 300~1000정보, 3사찰이 1000정보 이상을 소유하고, 운문사(3113정보)의 임야가 가장 넓다고 밝히고 있다. 역시 임상이 양호한 사찰림의 과벌 위험을 경계하며, 1937년까지 4개 사찰의 사찰림(7040정보) 시업안을 편성했고, 1936년의 조림면적(392정보)도 밝히고 있다.

경상남도는 79개소의 사찰이 2만713정보의 사찰림을 소유하고, 곤란한 사찰 재정 때문에 과벌의 위험이 있어서 역시 1937년도까지 1만7221정보의 시업안을 편성하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황해도의 경우 5453정보의 사찰림이 있지만, 남벌로 인한 사찰림의 황폐를 막고자 1934년에 사찰유림 시업규칙을 발포하여 시업안을 편성하였고, 평안북도는 4만7263정보의 사찰림 중 묘향산 보현사가 그 절반을 보유하며, 임상은 일반 사유림보다 더 좋다고 기술하고 있다.

강원도에는 14개 사찰이 4만2905정보의 사찰림을 보유하고 월정사, 유점사, 건봉사, 장안사가 우량한 임상의 넓은 사찰림을 보유하지만, 과벌의 염려 때문에 시업계획을 수립하여 합리적 경영을 유도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함경남도에는 9903정보, 함경북도에는 25사찰이 1072정보의 사찰림을 소유하지만, 역시 과벌을 방지하고자 지도감독을 엄히 할 필요가 있다고 밝히고 있다.

1939년 말의 각도별 사찰림의 상황을 정리하면, 조선의 전체 사찰림 면적은 17만6000여 정보이상이었다. 충청북도와 평안남도와 제주도가 제외되고, 3사찰의 산림면적만 산정한 경기도를 감안하면, ‘조선임업사’에 언급된 사찰림 면적은 조선총독부연감(1940년)의 사찰림 면적(18만 7000 정보)과 크게 다르지 않다.

평안북도(4만7263정보), 강원도(4만2905정보), 경상북도(2만2073정보), 경상남도(2만713정보)의 사찰림은 넓은 반면, 충청남도, 황해도, 경기도, 함경북도의 사찰림은 수천 정보로 좁았다. 또한 개개 사찰이 보유한 산림면적도, 보현사처럼 수만 정보를 보유하거나 또는 다수의 사찰이 수천에서 수백정보를 보유하고 있듯이 그 편차가 컸다.

‘조선임업사’에는 대부분의 도에서 사찰림 경영에 필요한 시업안(施業案) 편성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사찰의 재정문제로 인한 사찰림의 남벌과 과벌에 대한 우려를 반복하여 기술하고 있다. 궁핍했던 식민지 경제 여건에서 사찰 숲은 어떤 역할을 감당했기에 산림경영에 필요한 시업안 편성을 애써 강조하고, 남벌과 과벌을 걱정하는 것일까? 일제강점기 사찰 숲에 도대체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일까?

전영우 국민대 산림환경시스템학과 교수  ychun@kookmin.ac.kr

[1299호 / 2015년 6월 2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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