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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푸티상사의 지상법문] 13. 선의 경지(2)

기자명 법보신문
  • 법공양
  • 입력 2015.06.23 16:44
  • 수정 2016.01.05 16:09
  • 댓글 0

기울지 않은 저울처럼 사물·사욕서 벗어나야 해탈에 다가갈 수 있어

 
1. 깨우친 인생
밴쿠버에 사는 수행자가 만능 스패너 한 세트를 샀습니다. TV에서 “이 만능 스패너만 있으면 생활 속의 모든 나사를 돌릴 수 있습니다.”라고 광고하는 것을 보고 몇 십 달러를 주고 샀습니다. 한 번은 그 집 화장실이 막혔어요. 하수도 전문 수리공을 불러 수리하면 금방 해결될 간단한 일이었지만, 그는 도구로 사용하기에 적당하지 않은 쇠막대기로 뚫어보려다가 결국 변기를 깨트렸습니다. 하는 수 없이 변기를 새로 사서 설치하려 했지만, 아무리 애써도 생각처럼 설치가 착착 진행되지 않았습니다. 그가 산 만능 스패너 중에 가장 굵은 것이 겨우 호두 크기만 했기 때문에 하수구 파이프를 돌릴 수 없었습니다.

벽에 부딪히면 비켜가는게 정답
상황 따라 변할줄 아는 열린 마음이
해탈로 나아가는 수행인의 자세
막힌 마음은 심신의 질병 되기도

청정하고 사욕 줄어든 마음으로
사물 대해야 ‘0’의 균형 유지 가능

청정·자재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
선 수행을 하는 궁극적인 목적

이 수행자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아 화병이 났습니다. 가족들은 망을 보면서 정원에서 볼일을 봤지요. 결국, 아내를 시켜 나에게 전화했더군요. “상사님, 문제가 있습니다. 장사꾼들은 정말 믿을 수가 없어요. 만능 스패너 세트를 사면 생활 속의 모든 나사를 돌릴 수 있다고 하더니 하수구 파이프는 돌릴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변기가 고장 난 사연을 쭉 이야기하더니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라고 물어보더군요. “아주 간단합니다. 신문 한 장을 사면 전문 수리광고를 찾을 수 있습니다. 전화 한 통이면 100달러 이내에서 하루 만에 금방 해결됩니다.” 변기가 설치된 후에도 그는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광고에서는 분명히 생활 속의 모든 나사를 돌릴 수 있는 만능 스패너라고 했는데 왜 이 나사는 돌려지지 않을까?”

모든 사물을 이렇게 고지식하게 대한다면 깨우친 것이 아니라 “하수구가 막힌 것”입니다. 깨달은 마음은 임기응변할 수 있으며 해탈을 위해서는 상황에 따라 언제나 변할 수 있습니다. 아기로 돌아가 봅시다. 아기가 기어가는데 벽이 있으면 계속 앞으로 갈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벽이 있으면 아기는 생각할 것도 없이 바로 머리를 돌려버립니다. 하지만 오히려 어른들이 같은 상황에 부닥치면 분명히 막혀 있음에도 끝까지 앞으로 나아가려고 합니다. 이런 분들은 생각보다 많습니다. 특히 도를 깨우치려 하는 사람들일수록 위에서 말한 부류에 속하는 사람들이 절반 이상입니다. 벽이 막혀 있어도 앞으로 가고 문틈만 보이면 그곳을 뚫고 지나가려고 합니다. 이는 모두 잘못된 것으로 마음의 문을 여는 것이 필요합니다. 먼저 연다는 의미의 개(開)를 이해하여 열린 사고를 해야 합니다.

타이완에서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를 해드리겠습니다. 한 어머니가 아들을 데리고 어린이 놀이터에 왔습니다. 마침 나도 그 부근에 앉아 있었습니다. 저는 가끔씩 일부러 사람 많은 곳을 찾아가 수행합니다. 놀이터 옆에는 고리 던지기를 하는 가게가 있었습니다. 바닥에 술병 몇 개를 말뚝처럼 박아 놓고, 쇠사슬이나 대나무로 고리를 만들어 아이들에게 술병에 걸게 하는 거였죠. 1달러에 10회를 던질 수 있고, 걸리면 상품을 줬습니다.

이 남자아이는 10살 정도 되어 보였는데 근시안이어서 아무리 던져도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무척 애가 달아했습니다. 그래서 엄마가 그를 도와 걸려고 해 보았지만, 엄마는 아이보다 더 둔해서 다 던져도 안 걸렸습니다. 제법 많은 돈을 썼지만, 상품을 눈앞에 두고도 가질 수가 없으니 안달이 나서 아이는 울며 떼쓰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둘이서 울고불고하는 소리에 도대체 무슨 큰일이 있나 싶어서 가봤습니다. 아이는 “꼭 걸어야 해!” 라고 말하고 엄마는 “그래, 꼭 해내야 해!” 라며 애쓰고 있었습니다. 급한 마음에 아이 두 눈에 눈물이 맺혀 시야가 흐릿해져서 더욱 걸리지 않았습니다. “어떡해요?” 그래서 제가 “안 하면 되잖아요.” 라고 했더니 애 엄마가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내가 이야기했습니다. “오늘 놀러 나오지 않았어도 여느 때처럼 잘살고 있었을 거잖아요.” 그제야 엄마가 깨닫더군요. “그래, 얘야, 우리가 오늘 놀러 나오지 않았다면 고리 던지기도 하지 않았을 거야. 그거 안 던진다고 밥도 안 먹고, 살지도 못하는 건 아니잖아.” 그러면서 아직도 진정되지 않은 아이의 손을 잡고 자리를 떴습니다. 엄마도 고리 던지기에 빠져 버린 것입니다.

인생도 그렇습니다. 가야 할 길만 가는 것이 아닙니다. 가는 도중에 고리가 안 걸린다고 애를 태우며, 걸릴 때까지 안 가고 있습니다. 내가 봤을 때는 걸려도 골치 아픕니다. 상품을 타내려고 더욱 집착하게 될 것입니다. 내려놓을 줄 알아야 합니다. 이 게임은 쉽지가 않으니 걸려고 하지 말고 그냥 놓아 버리면 됩니다. 또한, 그만한 가치가 있는 일인지 봐야 합니다. 의미가 없는 일일 경우 미련 없이 놓아버릴 줄 알아야 합니다.

제가 이야기한 것 외에도 많은 사람과 일이 이렇게 막혀 있습니다. 이러한 마음의 벽은 몸의 질병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심경’에서 이야기한 경지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 경지에 도달하면 지혜가 크게 열립니다. 그렇게 되면 생활 속에서 마주하게 되는 여러 가지 일들을 대하는 태도나 마음가짐이 예전과 많이 달라질 것입니다. 이 선원의 문을 나서는 순간부터 우리의 생각이 새로워져 ‘공불이색, 색불이공’의 경지에 도달할지도 모릅니다.

반드시 잘 사용해야 하며, 집착하거나 곧이곧대로 사용하지 않아야 합니다. 적색등에서는 서고, 녹색등에서는 가야 하는데 상사님이 ‘공불이색, 색불이공, 공즉시색, 색즉시공’이라고 했으니 나는 교통신호에 얽매이지 않겠다고 마음먹으면 안 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렇게 하면 남들보다 조금 더 빨리 ‘해탈’하게 되겠지요.

2. 0의 상태
내 수업에서 많은 사람이 “보리선수는 우리에게 건강을 가져다줍니다.”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나는 “보리선수가 우리에게 즐거움을 더 많이 가져다줍니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건강은 즐거움에서 비롯됩니다. 즐거움은 우리의 스트레스를 줄여주고 질병을 줄여주며, 완전히 회복되게 하기도 합니다.

여기서 즐거움이란 일부러 만들어 낸 즐거움이 아니라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것입니다. 당신의 생각이 더는 어떠한 사물 또는 사욕의 지배를 받지 않을 때 우리는 평등한 상태로 돌아가게 됩니다. 만약 저울을 예로 든다면 그 위치가 바로 ‘영점’일  것입니다. 0은 수학에서는 0이지만 문자로 보면 ‘공(空)’이 될 수도 있지요? 도가에서는 ‘기(炁)’라고 하지요? ‘기(炁)”가 ‘무(無)’일까요? 아닙니다. 양측에 많은 물건을 달고 있으니까요. 단지 양쪽이 같은 중량이라는 의미가 될 뿐입니다. 영점의 양쪽에 각각 천근을 달고 있으면 ‘무(無)’가 될 수 없습니다. ‘0’은 ‘무’가 아닙니다. 분명히 존재합니다. 이 때문에 ‘无’자에 연화 발을 더한 ‘炁’자를 쓰며, 연화 발은 저울이 영점으로 돌아가게 하는 4개의 ‘저울추’가 됩니다.

우리의 마음이 청정하고, 사욕이 줄어든 상태가 되어야만 사물을 대할 때 ‘0’의 상태를 유지할 수가 있습니다. 이 ‘0’의 상태가 ‘공불이색, 색불이공’의 상태라고 확정 지을 수는 없지만 근접한 상태이며, 지혜로운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인지를 떠나 일 처리할 때 청정과 평등으로 조율한다면 그 일을 잘 처리할 수가 있습니다.

중국전통의 중의학과 영양학은 치료의 근본 기준이 무엇이라고 주장할까요? 그들의 주장은 바로 ‘음양의 균형’입니다. 어떤 이는 광둥 사람들은 매일 탕을 끓여 몸보신을 한다면서 음양의 균형을 부정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는 광둥의 탕을 잘 모르고 하는 소리입니다. 광둥 사람들은 탕을 끓일 때, 시기와 계절에 따라 다른 탕을 끓입니다. 겨울에는 열량을 보충하는 ‘원자탄’탕, ‘핵무기’탕 등을 끓입니다. 여름에는 열을 내리는 수박 탕 등을 끓입니다. 탕이 모두 보신용은 아니며, 탕의 주요기능은 조절입니다. 미래의 아내나 며느리에게 온 가족의 균형 잡힌 음식섭취와 건강의 이치를 따르게 하려면 중국 광둥의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면 됩니다. 그곳의 아가씨들은 어머니나 주위 사람의 영향을 받아 탕으로 신체의 열과 냉의 균형을 잡을 줄 아는데 이것은 중국 전통의학의 정수인 균형의 이치입니다.

균형의 이치를 학습이나 관직에 적용하면 그것이 곧 중용의 도입니다. 중용의 도에도 여전히 ‘중(中)’과 ‘공(空)’이 필요하며, 눈으로 이 세계를 많이 살펴 어느 한 쪽으로 기울지 않고, 위험이 도사리는 잘못된 길로 들어서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관료가 되면 처세가 더욱 어려운데 한발만 잘못 내디뎌도 누군가가 놓은 지뢰를 밟아 무죄도 유죄가 됩니다. 균형의 도, 중용의 도, 공정(空凈)의 도는 바로 순수로 돌아가는 도입니다.

우리가 선 수행을 하는 근본적인 목적은 청정하고 자재한 상태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청정하고 자재한 상태는 반드시 ‘0’의 상태이어야 하며, 어느 한 쪽으로도 치우치지 말아야 합니다. 빨간색을 좋아한다고 해서 빨간색 옷만 입으면 화를 부르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검은색을 좋아한다고 해서 늘 검은색만 입게 되면 자신이나 가족의 건강과 여러 측면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게 됩니다. 그 때문에 고요하고, 중용적이며, 공정(空凈)한 생각을 바탕으로 우리는 순리에 따른 자재함을 배워야 합니다.

친구랑 같이 식사하는데 친구가 여러분이 싫어하는 음식을 주문하더라도 괜찮습니다. 그 요리를 안 먹으면 되니까요. 여러분이 싫어하는 색의 옷을 사람들이 입었다고 해도 ‘나 혼자 사는 세상이 아니니까 좋아하면 입는 거지.’라고 생각하고 마음속으로 받아들이는 것도 자재하게 순리를 따르는 것입니다. 내 눈으로 확인하면 있는 것이고 그 상태를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니므로 자연스럽게 이러한 사물, 현상의 발생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설령 여러분이 받아들이지 않는다 해도 눈앞에 나타난 현실이니까요. 우리가 마음속으로 저항하고, 대립하면 어떤 결과가 올까요? 번뇌가 생기기 때문에 마음의 병에 걸리게 됩니다.

여러분은 긴 머리를 싫어하는데 친구들 모임에 머리카락이 긴 사람이 왔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가위로 그 사람의 머리카락을 잘라버릴 권리가 여러분에게 있습니까? 없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강제로 사람들의 머리카락을 자른다면 히틀러가 다시 살아왔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마음속으로 불편함을 느끼는 순간부터 여러분의 번뇌는 시작됩니다. 긴 머리를 싫어하기 때문에 그 사람의 모든 행동이 싫어질 것이고, 심지어는 상대방이 아주 근사한 선물을 건넨다 해도 반감이 가시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여러분의 표정이나 말, 행동에서 그런 마음이 드러나지 않을까요? 분명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친구가 되기 전에 적부터 만들게 되면 즐거울 수가 없겠지요.

일상에서 어떤 이유에서든 이러한 적이 10명만 있어도 여러분은 끝장입니다. 여러분의 ‘아(我)’가 10명을 싫어한다면 그 10명도 그것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 역시 여러분을 싫어하고 미워하며 심지어는 암살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상대에 따라 정도가 더 강하거나 약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마음 놓고 살아갈 수 있는 안전지대는 아니겠지요. 자재할 수 있을까요? 물론 아닙니다. 즐거울까요? 절대 그럴 리 없을 것입니다. 밤에 그곳에서 수련하든, 염불하든, 청정을 얻으려고 하든 ‘0의 상태’에 들 수 있을까요? 안 될 말씀입니다. 10분 앉아 있으면 마이너스 10이 될 것이고, 마음에 번뇌가 좀 더 많으면 10분이 지난 후 마이너스 40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균형은 깨지고, ‘0의 상태’가 아니라, 차갑고, 생명력이 없는 상태가 됩니다.

만약 여러분의 마음이 차갑게 굳어 버리면 그 마음이 여전히 살아있다고 할 수 있을까요? 그래서 우리는 항상 자신의 마음, 자신의 정신세계가 순리에 따라 자재할 수 있도록 ‘공불이색’의 경지를 유지해야 합니다. 이 경지를 말하는 가장 적절한 단어는 ‘사리자’입니다. ‘사리자, 색불이공, 공불이색’을 잘 이해하고, 실제 수행의 기초가 있으면 철저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진푸티상사의 홍법시리즈 ‘선의 경지’ 중에서
번역 : 정금주 / 제공 : 한국 보리선수 약사선원

[1299호 / 2015년 6월 2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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