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 정토사(주지 덕진 스님) 신도 분들과 함께 중국의 문수성지 오대산 가는 길이다. ‘성 안 내는 그 얼굴이 참다운 공양구요/ 부드러운 말 한 마디 미묘한 향이로다/ 티 없는 진실한 그 마음/ 언제나 한결같은 부처님 마음일세’ 게송이 처음 울려 퍼졌다는 그 산은 산시성(山西城 산서성)에 있다.
"석굴서 핀 자애미소 ‘감탄’
허공에 매달린 절 ‘압권’
부처님 닮으려 했던
북위 사람들 정성에 ‘합장’"
베이징(북경. 北京)에서 육로를 통해 산시성 중심부로 들어서려면 황토고원(黃土高原)을 지나야 한다. 그 언제부터인가 고비사막에서 인 바람길 따라 건너 온 모래가 쌓이고 쌓여 (평균 50-80m) 들판이 되고 야산이 되었다. 면적만도 한반도 2배에 이르는 40만㎢. 저 고원에 1년 내내 비 내려 봐야 고작 200mm. 얼마나 척박한 땅인가! 그러나 지금도 누군가는 저 메마른 땅을 일구며 웃음꽃을 피워내고 있다.
황토고원이 끝난 자리에 얼핏 보아도 예사롭지 않은 큰 산이 시야를 꽉 채우는데 오승화 중국 현지 가이드가 일러준다. “산시성에서 이동하는 내내 저 산은 순례객이 탑승한 차를 계속 쫓아 올 겁니다. 중국의 명산 타이항산입니다.”
타이항산은 한문으로 태항산(太行山)이다. 한문 행(行) 자는 ‘걷다’ 의미로 쓰일 때 ‘행’으로 읽고, ‘줄을 서다’의 ‘줄’로 쓰일 때는 ‘항’으로 읽는다. ‘큰 산이 줄지어 늘어서 있다’는 뜻이 있기에 ‘태항산’ 즉 타이항산으로 읽는다.
태항산은 중국 산시성 북부에서 허베이성, 허난성 등 3개 성 남북 600Km, 동서 250Km에 걸쳐 있다. 사실상 산맥이다. 그 중 산시성 북부에 자리한 산이 헝산(恒山 항산). 따라서 흔히 말하는 ‘태항산’은 태항산맥을 이르고, 항산(恒山)은 태항산맥에 솟아 있는 산 중 산시성 북부에 있는 산 헝산을 이른다. 지역 이름도 태항산맥을 중심으로 동쪽에 있기에 산동성(山東城)이고, 서쪽에 있기에 산서성(山西城)이다.
중국을 처음 통일했던 진시황이 북쪽의 유목민족 침입을 막기 위해 만리장성을 쌓았는데 기필코 그 성을 넘어 와 나라를 세운 민족이 있었으니 북위(北魏. 위진남북조시대)를 세운 선비족이다. 지금의 다퉁(大同 대동, 북위시대엔 평성)에 수도를 정하고는 대형석굴 2개를 조성했는데 그 하나가 뤄양(洛陽 낙양)의 용문석굴(龍門石窟)이고, 또 다른 하나가 순례객 눈 앞에 펼쳐진 다퉁의 운강석굴(雲崗石窟)이다. 북위의 종교 총 책임자였던 담요(曇曜) 스님이 황제(문성제)에게 건의해 조성(460년)하기 시작했다. 무주산 자락 1Km 길이의 절벽을 따라 석굴 252개가 펼쳐져 있다. 불감 1천100개에 5만불 이상이 조각돼 있다고 한다.
부처님 출생과 출가, 열반까지의 숭고한 일대기가 섬세하게 조각돼 있는 6번 굴이 인상적이다. 미려한 곡선으로 다듬어진 보살이 즐비한 7번 굴, 힌두교 흔적을 엿볼 수 있는 8번 굴도 유심히 보아둘 만하다. 북위 장인들의 올곧은 신심이 농축된 원강석굴이다.
항산(恒山)으로 들어서는 금룡협(金龍峽)에 이르렀다. 얼핏 보아도 100m 는 훌쩍 넘을 높이의 벼랑이 당장 푸른 하늘 속 구름 위로 올라서려는 듯 쭉쭉 뻗어 있다. 지금은 말라 있는 저 협곡 사이로 배가 들어왔을 터. 사공이 노를 젓는 동안 당나라 청련거사(靑蓮居士) 이백도 저 멋진 풍광 즐기며 이런저런 시상을 떠올렸겠지!
협곡의 위세에 기가 눌릴 즈음 1500여년의 숨결을 간직한 현공사(懸空寺)가 제 모습을 드러냈다. 아! 단애절벽에 사뿐히 걸터앉아 있다. ‘허공에 매달린 절’이라는 말은 결코 허언이 아니었다. 나룻배에 몸 싣고 들어 와 저 절 처음 보았을 이백도 감탄한 나머지 시를 대신 해 두 자를 적었다. 장관(壯觀)! 선상에서 떠올렸던 시상(詩想), 현공사가 내뿜는 신묘한 위용에 무너진 게 분명하다.
저 현공사 역시 북위 시대 요연(了然) 스님이 지은(491년)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궁금하지 않은가? 북위 왕족은 왜 저토록 장엄하면서도 현묘한 운강석굴과 현공사를 지었던 것일까? 다양한 역사 해석이 있겠지만 현지 가이드의 설명과 학자들이 전한 이야기 몇 토막을 묶어 그 깊은 사연을 엿보자.
북위가 다퉁에 도읍을 정할 때만해도 선비족은 서역에서 온 불교를 적극 수용해 선비족과 한족 모두가 불교를 믿도록 권장했다. 이는 당시의 강력한 불교세를 염두에 둔 것이기도 하지만 선비족과 한족의 융합을 꾀해 자국의 평화를 이루려는 정치적 역학관계 속에서의 선택이었다.
이를 곱지 않게 보았던 정치가 최호와 도사 구겸지가 서로 손을 잡고 황제(태무제)를 부추겨 불교를 탄압하게 했다. 최호, 구겸지의 의도는 하나. 선비족 중심의 불교국가를, 한족 중심의 도교국가로 바꾸려 했던 것. 당시 선비족의 황제가는 대륙의 원활한 통치를 위해 선비족의 한족화, 즉 한화(漢化)정책을 펴고 있었다. 태무제도 어쩌면 한화정책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오판에 두 사람의 정치적 제의를 수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불교탄압은 6년(446~452년) 동안이나 이어졌다. 장안의 모든 사원은 허물어졌고, 불경과 불상, 탑도 부서졌다. 승려는 투옥됐는데 일부 스님은 생매장 당했다. 극악무도의 탄압은 태무제가 죽고서야 끝났다. 문성제가 등극(452~465년)하며 북위불교는 다시 꿈틀댈 수 있었다. 문성제를 비롯한 북위 황제가 명산 곳곳에 석굴과 절을 건축한 건 ‘6년 법난’에 대한 보상내지 참회였던 셈이다.
불교와 황제 사이의 정치 관계는 접고라도 운강석굴과 현공사에 배인 북위 사람들의 신심은 실로 대단해 보인다. 부처님을 닮으려 했던 그들의 정성에 손을 모으며 삼배를 올린다. 참고로 현공사 맨 꼭대기 삼교전에는 석가모니와 공자, 노자 세 성인이 나란히 봉안돼 있다. 불교와 유교, 도교가 공존하는 현공사다.
오대산 길목에 들어서면서도 눈 앞에 지상 최고 높이의 목탑이 아른거린다. 응현목탑(應縣木塔)으로 알려진 현존 세계 최대 목탑인 불궁사석가탑(佛宮寺釋迦塔. 높이 67.31m)이 세워진 건 1056년. 거의 1000년에 이른 목탑이 지금도 사람들을 품을 수 있다니 놀랍다.
그렇다 해도 저 목탑 보는 내내 상상 속에서 그렸던 황룡사 9층 목탑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더랬다. 신라의 최대 목탑은 645년 세워졌고 높이만도 80m를 넘었다 하지 않는가. 저 응현목탑처럼 그대로 있었다면, 저 현공사처럼 1천여 년의 세월을 견디었다면 황룡사 9층 목탑에 올라 저 불궁사석가탑을 내려 보았을 터. 상상 속의 황룡사 목탑만 아른거릴 뿐이니 아쉽기 그지없다.
이제 저 길을 따라 오르면 오대산 중대다.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부처님의 정골사리를 받아 와 한반도 땅에 안치한 자장율사의 이야기가 시작되는 태화지가 저 산 위에 있다.
채문기 본지 상임논설위원 penshoot@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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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단이 찾은 명소 3
■ 평요고성
■ 만리장성 거용관
■ 판자원
[1300호 / 2015년 7월 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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