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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석굴암 본존불의 도상 문제

‘석가불 vs 아미타불’…위대한 작품 둘러싼 다양한 해석

▲ 경주 토함산 석굴암 본존불. 통일신라.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항마촉지인을 결한 자세는 기본적으로는 석가불의 도상이다.(문명대, ‘토함산석굴’, 한·언, 2000)

‘석굴암’이라는 단어에 많은 사람들은 그 안에 결가부좌하고 앉은 하얀 화강암의 부처님을 떠올린다. ‘불국사’ 혹은 ‘마곡사’라는 절간의 이름이 그곳에 모셔진 부처님을 연상시키는 것은 아닌데, 석굴암은 그렇다. 어느새 ‘석굴암’이라는 이름은 절간의 이름이 아니라 그 부처님의 이름처럼 되어버렸다. 그만큼 석굴암 본존불의 존재는 거대한 무게로 다가온다.

1907년 일제강점기 처음 발견
편단우견에 ‘항마촉지’ 수인
일본인들, 석가모니불로 판단

1964년 아미타불 주장 제기도
‘삼국유사’ 기록 조성이유 근거
다양한 학설 제기됐지만 미결
“당시 불교 전체 아우른 작품”

실제 ‘삼국유사’의 기록에 의하면 석굴암이 창건될 당시 원래의 이름은 ‘석불사(石佛寺)’였다. 그만큼 ‘돌로 만든 부처님’의 이미지가 중요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 웅장한 크기로 보아 흙이나 나무가 아닌 돌로 이룩해낸 업적을 자랑스러워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다만 도상학자들의 입장에서는 이렇게 중요한 작품을 단지 ‘석불’이라고만 했으니 석가나 아미타라는 존명보다도 돌이라는 사실이 그렇게나 중요했나 아쉬울 수 밖에 없다.

때문에 혹자는 지금의 도상학자들의 생각과는 달리 당시 불상조성에서 존명이라는 것은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을 수도 있다고 한다. 그럴 수 있다. 다만, 존명을 분명히 밝히고 있는 경우도 많아서 석굴암 본존불도 분명 이름을 가지고 계셨을 것이다. 그 이름이 당시 사람들에게 얼마나 중요했는지 아닌지는 차치하고, 우선은 본존불의 이름을 밝히기 위한 쟁점들을 살펴보려고 한다.

오랫동안 잊혀진 석굴암을 1907년 한 우체부(나중엔 일본인 우체부라는 이야기까지 더해졌다)가 발견했다는 것은 마치 우리의 잃어버린 역사를 일본인들이 다시 찾아다 준 것처럼 보이기 위한 과장된 이야기일 뿐이지만, 여하간 일본인들은 이 시기를 즈음하여 석굴암에 눈뜨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석굴암의 본존불을 석가모니불로 해석했다. 지금의 시각에서는 이러한 해석이 매우 자연스럽다. 우선 석굴암 본존불이 취하고 있는 항마촉지인이라는 자세가 바로 보드가야에서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으실 때의 모습을 묘사한 것이고, 그 주변으로는 석가모니의 십대제자가 둘러서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는 불상이 매우 드물다. 예를 들어 일본 나라(奈良) 호류지(法隆寺) 금당 석가삼존상의 주존불인 석가불 혹은 아스카데라(飛鳥寺) 금동석가불의 수인은 항마촉지인이 아니다. 그렇더라도 항마촉지인의 의미는 충분히 알고 있었기에 석가여래라고 보지 않았을까.

이후 석굴암은 일본인들의 손에 의해 1913~1915년, 1917년, 1920~1923년 세 차례의 수리를 겪고 나서야 해방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석굴암이 시멘트로 뒤덮이게 되었고 이로 인해 이슬이 맺히는 현상이 심해졌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석굴암은 1964년 문화재관리국에 의해 다시금 대대적인 보수를 거치게 되었다. 이때 수리를 총괄한 고 황수영(黃壽永, 1918~2011) 박사는 기존의 견해와 달리 석굴암 본존은 아미타불이라는 주장을 전개했다.

▲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소조불좌상. 고려시대 작품이지만, 통일신라 창건기의 도상을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석가불의 도상이지만 아미타불로 해석되고 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로 1891년 울산병사(蔚山兵使) 조순상(趙巡相)이 석굴암을 중수하면서 남긴 ‘석굴암중수상동문(石窟庵重修上棟文)’에서 석굴암을 ‘미타굴(彌陀窟)’로 지칭하고 있다. 둘째로 석굴암 암자의 현판이 ‘수광전(壽光殿)’인데, 이는 아미타불의 또 다른 이름인 ‘무량수불(無量壽佛)’과 ‘무량광불(無量光佛)’의 ‘수’와 ‘광’에서 따온 것이다. 나아가 셋째로 같은 항마촉지인이라고 하더라도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에 봉안된 불상처럼 아미타불로서 모셔진 불상도 있으므로, 항마촉지인이라고 해서 무조건 석가모니로 볼 수는 없다. 거기에 덧붙여 더욱 결정적인 것은 ‘삼국유사’에 의하면 재상 김대성은 불국사를 지으면서 석굴암을 함께 지은 것인데, 각각 현세부모와 전세부모를 위한 것이었다고 언급한 점이다. 현세부모를 위해서는 현재불인 석가모니를 모셨을 것으로 추정되고, 돌아가신 전세부모를 위해서는 극락왕생을 기원하며 아미타불을 모셨을 가능성이 매우 높아 보인다.

이에 대해 반론이 이어졌다. 우선 석굴암 본존불의 협시보살은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인데, 그 어디에서도 아미타불을 문수·보현보살이 협시하는 근거는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현재의 두 협시보살이 문수·보현보살로 강력히 추정되고는 있지만, 사실 문수·보현보살이라고 단정할 수 있는 근거도 찾기 어렵다. 따라서 이 비판은 큰 설득력을 얻기 어렵다. 두 번째 비판은 ‘수광전’ 현판은 석굴암의 전실에 걸려있는 것이 아니라, 석굴암 석실 아래에 있는 전각에 걸린 편액이므로, 그것으로 석굴암 본존불의 존명을 판별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더불어 ‘석굴암중수상동문’에서 언급한 ‘미타굴’이 등장하는 문장도 실은 “듣건데 미타굴 금강대는 거듭 새롭게 한 정토세계이며, 도솔궁 은색계는 다시 고친 기원정사가 아니었던가? (중략) 저 불국사 석굴암은…”이라고 하여 미타굴 금강대나 도솔궁 은색계처럼 석굴암도 계속 손을 보아야만 빛을 발할 수 있다는 뜻이지, 석굴암이 곧 미타굴이라고 지칭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비판이 있었지만 석굴암 본존이 아미타불일 가능성은 하나의 학설로 자리잡게 되었다. 8~9세기에 신라에서 아미타신앙이 크게 유행했던 것도 그러한 학설의 배경이 되었다. 그런데 뒤이어 이 본존불이 석가모니께서 깨달음을 얻으신 보드가야의 마하보디 사당에 봉안되었던 항마성도상을 본떠 만든 상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마하보디의 성도상은 지금은 사라졌지만 그 상에 대한 상세한 기록이 현장법사(玄奘法師)의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에 나와 있고, 당의 칙사(勅使) 왕현책(王玄策)은 이 불상을 모사해 중국으로 가져와 이와 동일한 상을 많이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어서 그러한 유행이 통일신라에도 전해졌을 것으로 본 것이다.

▲ 인도 보드가야 마하보디 사당에 봉안된 석가모니 성도상. 팔라시대 작품이지만, 현장법사의 기록에도 이같이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항마촉지인상이 봉안되어 있었다.

나아가 아예 석굴암 본존불의 크기가 인도 마하보디 성도상의 크기를 염두에 두고 결정되었다는 주장도 연이어 제기되었다. ‘대당서역기’에 의하면 마하보디 사당의 본존 성도상의 높이는 1장1척5촌, 무릎폭 8척8촌, 어깨폭 6척2촌인데 석굴암은 현장이 사용했을 당나라 척도(唐尺)로 환산해보면 각각 1장1척5촌3푼, 8척8촌, 6척6촌으로 거의 흡사하다. 이렇게 석굴암과 마하보디 사당 성도상을 연관지은 것은 동일하지만, 그 성격을 바라보는 시각은 조금 달랐다. 전자는 마하보디 사당에 대한 오마쥬(homage) 개념으로 보았다면, 후자는 이를 신화적으로 재해석한 ‘화엄경(華嚴經)’과 연관지어 해석했다. 이런 주장의 배경에는 석굴암 본존상이 석굴건축과 긴밀한 기하학적 연관성을 가지고 설계되었으며, 그 설계원리가 화엄의 우주관과 닮아있다는 생각이 자리 잡고 있었다.

▲ 용문석굴 뇌고대(擂鼓臺)내 남동 성도상. 8세기전반. 인도 마하보디사당 성도상은 현장과 왕현책에 의해 중국에 전래되었는데 보관을 쓰고 장엄을 걸친 형태로 모방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한 가운데 기본적으로 마하보디 성도상, 즉 석가불인 것에는 동의하면서도 이러한 도상이 처음 중국에 전래되었던 7세기 전반의 사정과는 다르게 석굴암이 창건되었을 8세기 중엽 당시에는 상당히 다양한 의미가 축적되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항마성도상은 이미 다양한 문맥 속에서 등장하고 있기 때문에 이 상을 특이한 석굴 형태와 수많은 권속들과의 결합이라는 의미 속에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문맥의 예로 ‘관불삼매해경(觀佛三昧海經)’을 들었다. 특히 이 경전에는 석가모니가 사나운 독룡을 제도하고 이 용을 위해 굴에 그림자를 남겨두었다는 ‘불영굴(佛影窟)’의 전설과 함께 석가의 멸도 후 부처를 뵙고자 하면 석굴 안에서 좌선하는 1장6척의 석가의 모습을 떠올릴 것을 언급하고 있어서, 왜 굳이 이 거대한 석불을 굴 속에 안치했는지 이해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이러한 해석은 불교미술을 ‘관불’이라는 수행의례와의 연관 속에서 해석한 선구적 사례이기도 하다. 나아가 석굴암은 단지 하나의 경전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신인종(밀교), 법상종(유가종), ‘다라니집경’, ‘유마경’ 등 다양한 종파와 경전의 결집체로서 해석하고자 했다.

현재 석굴암은 태장계, 혹은 금강계 밀교 등과 연관하여 다양하게 해석되고 있지만, 서로 배타적이라기보다는 마치 코끼리의 코는 뱀과 같고, 다리는 기둥과 같이 보이는 것처럼 다양한 탐색의 일부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어쩌면 석굴암은 그 당시 불교 전체의 총합이었을 수도 있다.
혹자는 하나의 답이 없는 이러한 현상을 연구가 미흡한 결과로 보기도 하지만, 다양한 해석이 나온다고 해서 미흡하다는 부정적 시각으로만 볼 수는 없다. 위대한 예술품은 왜 위대한가? 그것은 작품이 그만큼 다양한 해석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 아닐까? 이러한 다양한 의견 중에 어느 것이 옳은가의 시각으로 석굴암을 바라보기보다, 오히려 각각의 시선으로 보았을 때 느껴지는 각별한 아름다움을 모두 만끽하는 것이 중요하다.

석굴암 본존불을 보드가야의 석가모니로서 바라볼 때는 고요한 새벽에 일어났던 고다마 싯타르타 내면의 치열한 법열을 느낄 수 있을 것이며, 화엄경에서의 석가모니의 모습을 보고자 하면 연화장세계의 화려한 찬탄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아미타불을 보고자 한다면 마군이 사라진 정토의 청정함을 보게 될 것이며, ‘관불삼매경’의 시각으로 바라본다면 지금 내 앞에 현현한 생생한 석가모니를 만나게 될 것이다. 석굴암의 매력은 그런 것이다. 

주수완 고려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  indijoo@hanmail.net


[1300호 / 2015년 7월 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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