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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이동호 늘사랑요양병원 대표원장

묵암 스님 가르침·신해행증 삶 속에서 행복 발견했죠

▲ 이동호 원장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어 의심치 않고, 그 진리를 알고자 노력하며, 배운 바를 실천하면 깨달음에 이를 수 있음을 확신하는 신해행증의 삶을 산다면 절로 행복해질 것”이라고 조언했다.

시간을 나타내는 말 가운데 겁(劫)이라는 단위가 있다. 1000년에 한 방울씩 떨어지는 낙숫물이 집채만 한 바위를 뚫어 없애거나, 100년에 한 번씩 내려오는 선녀의 옷자락에 사방 40리의 바위가 닳아 없어지는 시간이라고 한다. ‘잡아함경’에는 사방과 상하로 1유순(由旬, 15km)이나 되는 철성(鐵城) 안에 겨자씨를 가득 채우고 100년마다 겨자씨 한 알씩을 꺼낸다 하더라도 겁은 끝나지 않는다 했다. 초와 분을 다투면 살아가는 이 시대에 겁은 상상 속의 시간일 뿐 사실상 측정이 불가능하다. 불가에서는 옷깃 한 번 스치는 것도 500겁의 인연(因緣)이라고 한다. 하물며 부부가 되기 위해서는 7000겁, 부모와 자식은 8000겁, 형제자매가 되는 것은 9000겁의 인연이 필요하다니 일체 인연들엔 지고지순(至高至純)이 담겨있다. 그렇다면 스승과 제자의 인연 겁은 얼마나 될까. 무려 1만겁이란다. 육신은 부모에게 받지만, 마음을 눈뜨게 하는 것은 스승이니 그만큼 ‘지중하다’는 의미이리라.

짝사랑 열병에 존재에 대해 의문
묵암 스님 법문에 자성으로 귀착
생활·도시·거사불교 구현 매진
역경·묵암 일대기 편찬 등 추진

월담 이동호(78) 거사의 공식 직함은 전주 늘사랑요양병원 대표원장이자 심장전문의다. 그러나 그에게 의사는 생계 수단을 의미한다. 그의 전업(全業)은 수행자에 가깝다. 60여년 전 현공묵암(1895∼1969) 스님에게 가르침을 받은 후 세속에 발을 담고 있으면서도 끊임없이 수행하고 정진하면서 마음자리를 찾고 있다. 맑은 마음자리 관하는 그의 손과 발은 사단법인 원각회 이사장으로, 조계종 전법사로, 조계종 중앙신도회 고문으로, 전북불교네트워크 이사 소임을 맡아 생활불교, 도심불교, 거사불교를 빚는데 향하고 있다.

그를 좀 아는 이들은 그를 ‘유발도인’이라고 부른다. 부처님의 가르침과 이치를 삼장법사처럼 꿰고 있는데다 육바라밀을 실천하는 것도 빈틈이 없다. 조계종 원로의원 암도 스님은 “승속을 떠나 함께 수행하고 포교해온 도반으로 종단 차원에서 법사로 모셔야 할 거사 중 한 분”이라며 “묵암 스님 밑에서 제대로 불교를 공부하고 꺼져가던 호남불교가 다시 일어날 수 있도록 불씨를 되살린 으뜸 공신”이라고 소개했다. 진현종 대장경 연구가는 “실천적 지식인”이라고 했다.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 최고(最古) 선배로서 묵암 스님은 물론 해안, 월산, 법전, 청화 스님에게 가르침을 받았고 그 가르침들을 후배들에게 전하고 있단다. 또 내과전문의이자 물리학자로서 자연과학에 기반을 둔 불전(佛典) 연구에도 적지 않은 도움을 주고 있으니 스님으로 치자면 내전과 외전이 완벽하다는 것이다.

팔만사천 세포 하나하나에 불자(佛子)를 새겨 넣었을 듯한 이동호 원장이지만 정작 그는 불교와의 인연을 “묘하다” 했다. 그가 불교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존재 자체에 대한 궁금증 때문이었다. 대학 1학년인 19살 때 이웃집 누나를 짝사랑하게 됐고, 그 열병은 ‘도대체 인간이란 무엇이기에 이렇게 고통스러운 존재인가’ 의문을 갖게 했다. 타오르는 욕망과 의문의 불길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커졌고, 죽음을 떠올릴 만큼 절실해졌다.

“처음엔 철학에서 답을 찾고자 했습니다. 당시는 오직 서양철학뿐이었죠. 그러나 아무리 서적을 뒤지고 철학자를 만나 대화를 나눠도 의심만 커질 뿐 답이 없었습니다. 답답했습니다. 이번엔 종교계로 눈길을 돌렸어요. 성서를 탐독하고 광주시내 교회와 성당 7~8군데를 다녀봤지만 역시 시원한 답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거듭된 실패에 마음의 상처는 더욱 깊어갔어요. 그 즈음 동기생 하나가 광주시내에 동광사(東光寺)라는 절이 있는데 그곳에서 열리는 불교강좌에 함께 가보지 않겠느냐고 하는 겁니다. 깊은 산중에만 있는 것으로 알았던 사찰이 도심에 있다니, 그것도 불교를 강의한다는 게 신기해 호기심 반, 절 구경 반 심정으로 동광사로 향했습니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충격 그 자체였다. 족히 500명 이상의 사람들이 법당에 모여 앉아 입정한 채 법회의 시작을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까지 알고 있던 불교의 모습이 아니었다. 간신히 궁둥이 붙일 자리를 구해 끼어 앉았다. 잠시 후 소설 속에나 나올듯한 도인이 등장하더니 가장 높은 자리에 앉았다. 바로 묵암 스님이었다. 후에 안 일이지만 묵암 스님은 독립운동의 막후 기둥이셨던 용성 스님을 은사로 출가해 금강산 유점사에서 한 소식을 얻은 도인으로 소문이 자자했던 선지식이었다.

법상에 오른 묵암 스님은 누구에게나 자성(自性)이 있고, 이 자성을 찾는 것이 속박에서 벗어나 해탈하는 도리이자 번뇌망상에서 벗어나 열반에 이르는 길이라고 설하셨다. 또 본래 자신을 보지 못하고, 영원불멸의 자신을 보지 못하면 한 세상 허깨비로 살 뿐이라고 했다.

그 순간 광명이 비추는 듯 환해졌다. 무릎을 쳤다. 단 1시간의 법문에 머릿속이 맑아졌다. 그동안 품고 있던 혼돈은 잘못된 문제 제기에서 나온 것임을 알게 됐다. 본래의 나가 아닌 허깨비인 나에게 매달려 있었기에 답을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묵암 스님의 법문을 들으면서 일체의 문제는 나에게 비롯됐으며 해답 또한 나에게서 찾아야 하는 가르침임을 깨달았다. ‘나’를 찾는 공부, 부처님의 가르침을 몸과 마음, 의식에 온전히 담아내는 공부, 그것은 이번 생을 모두 걸어볼 만큼 충분히 가치가 있다고 확신했다. 이후 매일 수업이 끝나면 묵암 스님을 찾아 경률론 삼장과 대교과정을 공부하며 화두를 들었다. 정진 중에는 이마에 상처가 쉽게 낫지 않았다. 화두 참구에 들어 길을 걷다가 전봇대나 장애물에 머리를 부딪치는 일이 빈번했기 때문이다.

“공부의 시간이 더해지자 덩달아 출가의 마음이 간절해졌습니다. 그렇지만 현실은 5남매의 장남으로 동생들을 돌봐야 했습니다. 부모님의 간절한 기대도 저버릴 수 없었지요.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의대 졸업 후 대학원에서 동양철학이나 심리학을 공부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동양철학이나 심리학을 전공하려면 학부과정부터 다시 공부해야 한다는 말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할 수 없이 의대 대학원에 들어가 심장학을 전공했습니다.”

퇴임을 앞둔 담당교수의 권유로 선택한 전공인 만큼 박사학위만 받으면 교수 자리는 따 놓은 당상이었다. 그러나 뜻대로 되지 않는 게 인생이라 했다. 학위 수여를 앞둔 1967년 4월 전주도립병원 심장과장으로 파견근무가 결정됐다. 3개월 단기파견이라 그 역시 별다른 의미를 두지 않았다. 사건은 전주에 거처를 마련한 며칠 후 우연히 찾은 보문사에서 일어났다. 광주에 계셔야 할 묵암 스님이 이곳 보문사에 주석하고 계셨다. 아들, 형·오빠로서의 도리를 위해 잠시 놓았던 본분사에 대한 열의가 다시 활활 타올랐다. 일을 마치면 곧장 스님을 찾아 공부하는 생활이 다시 시작된 것이다. 파견기간이 끝난 뒤에도 그가 돌아오지 않자 학교에서는 큰 소동이 일어났다. 그를 설득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그의 마음자리에는 이미 묵암 스님을 모시고 평생 부처님 법을 공부하겠다는 발심으로 가득해 작은 틈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묵암 스님은 개인적인 수행과 함께 생활불교, 도시불교, 거사불교의 구현을 강조했다. 개인의 수행이 보리를 구하는 구체적 행동[上求菩提]이라면 생활불교, 도시불교, 거사불교는 대승보살의 구체적 실천[下化衆生]이었다. 스승의 가르침에 따라 그는 화두참구에 매진하며 전강, 구산, 고암, 해안, 월산, 성철, 청화 스님 등 당대의 선사들을 뵙고 가르침을 받았다. 동시에 불교의 저변을 확대하는 불사를 진행했다.

그는 무엇보다 불교미래의 기반이 될 청년불자가 절실하다고 판단했다. 겸임교수로 출강 중인 전북대 간호대학 불자학생들을 모아 정기법회 자리를 마련했다. 또 전북대 교수 가운데 불자를 찾아내 대불련 지부를 설립하도록 설득하고 지원했다. 뿐만 아니라 고등학생 불자모임 룸비니회와 중학생 보리수회를 차례로 창립시키고, 전주 관음선원과 정혜사를 찾아 어린이 포교의 필요성을 역설해 유치원 개원을 이끌었다. 어린이부터 청소년, 청년불자로 이어지는 연결고리를 만들어낸 것으로 생활불교의 구체적 실천이었다. 한편으로 순천, 남원, 목포 등 지역 도립병원과 적십자병원, 철도병원 등에 파견되면 병원불교회부터 조직했다. 도시불교의 구현이었다.

무엇보다 불교의 불모지라 할 수 있는 전주지역에 거사불교의 열풍을 일으키는 데 앞장섰다. 그는 1978년 당시 심성택 검사장을 비롯해 기관장과 언론대표, 기업대표 등 지역의 내로라하는 인사 23명을 결집해 원각회를 창립했다. 지역의 대표들이 매주 수요일과 일요일에 모여 법회를 열고 수행을 한다고 하니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원각회 모임은 당시 사회적·지역적 분위기로 불자임을 드러내지 못했던 이들에게 큰 용기가 됐고, 이후 전주를 비롯한 전북지역에 수많은 불교단체가 태동하는 계기가 됐다.

팔순을 목전에 둔 나이이지만 그의 일과는 청년시절과 크게 다르지 않다. 낮에는 진료하고 진료가 끝나면 촌음을 아껴 책을 보고 좌선을 한다. 여기에 한 가지를 더하자면 ‘묵암 스님 일대기’ 집필과 만해 스님의 ‘불교대전’ 및 묵암 스님의 ‘불교대성전’ 개정, ‘한글 불교대성전’ 편찬을 준비 중이다.

“일제강점기 민족정신의 회복을 위해 역경과 포교에 매진하며 불교대중화를 위해 헌신한 현공묵암 스님의 일대기 편찬은 제자로서 당연한 일입니다. 또한 선지식들이 부처님 가르침의 정수를 모아놓은 ‘불교대전’과 ‘불교대성전’의 내용을 더욱 풍부하게 하고, 한글세대를 위해 한글화 하는 작업 역시 후학으로서 의무일 것입니다. 지난 40여년간 틈틈이 진행해온 일들이 80세가 되기 전 마무리되기를 발원할 뿐입니다.”

이동호 원장은 신해행증(信解行證)의 삶을 강조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어 의심치 않고, 그 진리를 알고자 노력하며, 배운 바를 실천하면 깨달음에 이를 수 있음을 확신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삶을 산다면 절로 행복해질 것이라고 조언한다.

그는 또 불행을 맛보았기에 행복의 가치를 안다고 했다. 번뇌망상이 있기에 수행도 가능한 이치이다. 진흙이 없으면 연꽃이 피어날 수 없기에 이동호 원장은 번뇌망상이든 깨달음이든 모두 나의 소중한 인연으로 받들어 사랑하고 책임지며 자비로울 수 있는 삶을 발원한다. 내가 아닌 너를 둘이 아닌 나로 인식하는 삶, 그것이 바로 이 원장이 생각하는 중도연기의 가르침이다.

김현태 기자 meopit@beopbo.com

[1301호 / 2015년 7월 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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