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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서정주-국화 옆에서

기자명 김형중

연기로 인생 노래한 최고의 한국시

한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에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개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고통 속에서 헤매던 중생
수행 통해 번뇌 털어내고
깨달음 얻어 부처된 모습
불교 연기사상 잘 드러내

우리는 미당 서정주(1915~2000)의 ‘국화 옆에서’에서 불교의 연기사상을 만날 수 있다. 모든 존재는 상호 관계 속에서 순환 윤회하고 있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하여 봄부터 소쩍새가 울고, 여름에는 천둥이 먹구름 속에서 울고, 초가을 간밤에는 무서리가 내렸다. 가을 국화가 피어나는 데는 온갖 시련과 풍파가 있었다.

우리의 인생도 그렇다. 지금 여기에 내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무수히 많은 인연들의 도움 공덕이 있었다. 수많은 병고를 이겨냈고, 무수한 좌절과 절망을 이겨내고 극복해낸 결과물로서 내가 존재하는 것이다. 인드라망처럼 무수히 얽히고설킨 인연(因緣) 연기(緣起)와 중중첩첩으로 상호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존재(存在)하는 인과(因果)의 세계 속에서 내가 여기에 서 있고 우주 만물이 그렇게 존재해 있는 것이다.

끈질긴 생명력과 황토색 포근함으로 시골 언덕길에 피어난 황국화 같이 젊은 날에 가슴 조이던 파란만장한 풍파를 헤치고 천신만고 끝에 거기에 서 있는 사람의 모습이 보인다. 마치 어리석고 고통 속에서 헤매던 중생이 수행을 통해 번뇌를 털어내고 마침내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되어가는 모습이다.

봄날 영산홍이 곱게 피어나기 위해서는 겨울에 매서운 바람과 추위를 겪어내야만 한다. 미당은 가을 황국화를 바라보면서 인생의 고난 과정을 시간적으로 읊은 것이다. 특히나 가을 국화는 연중 마지막 용트림으로 차가운 서리를 이겨내며 피어나는 꽃이다. 우리에게 인고(忍苦)의 깨달음을 주는 오상고절(傲霜孤節)의 군자화(君子花)이다. 이 시는 불교의 심오한 연기철학이 바탕이 되어 인생을 노래한 최고의 한국시이다.

길가의 풀 한 포기도 불덩어리 지구가 식어가면서 억 년의 시간 속에서 중중무진의 억겁 인연으로 서로 엉키고 섞이어서 기적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불 속에서 핀 한 송이 연꽃과 같다. 불가사의한 신비이다.
인생은 고뇌와 아픔으로 성장한다. 선사께서는 번뇌가 크면 깨달음도 크다고 했다. 많이 아파해야 인생의 스토리도 재미있고 훗날 추억이 아름답다. 미당은 봄·여름·가을에 한 송이 국화꽃이 피는 모습을 지켜보며 역경과 고난을 이겨오면서 한 사람의 인생이 성공하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인생의 풍파를 이겨낸 모델은 가을 황국화의 모습을 한 오십 대의 중년 누님 같은 여인이다.

여론조사에서 한국 사람이 제일 사랑하는 시가 ‘국화 옆에서’이고, 한국 사람으로서 최고의 시인이 미당으로 뽑혔다. 한국의 시성(詩聖)으로 인정하는 데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것이다. 미당을 극복하기 위해 불문(佛門)과 동악(東岳)의 제자로서 시에 미친 고은이나 신경림 등의 시인이 나타났지만, 그의 시는 한국시의 교과서가 되어 한국인의 마음을 사로잡고, 후배 시인들의 길잡이가 된 것이 엄연한 사실이다.

물론 미당이 보인 일제강점기 시절 친일행각이나 군사정권시대의 외도행각에 대한 비판이 있다. 그 점에 대해서는 본인도 생전에 과오를 인정했다. 만해처럼 끝까지 지조를 지켰으면 오죽 좋았겠는가. 그의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안타까운 마음이다.

김형중 동대부중 교감·문학박사 ililsihoil1026@hanmail.net

[1301호 / 2015년 7월 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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