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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윤회-상

‘근본적 죽음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에 대한 가르침

▲ 일러스트=김주대 문인화가·시인

보르헤스의 소설 ‘죽지 않는 사람들’은 불사의 삶이란 무언가를 다룬다. 로마 시대의 군단장이었던 주인공 마르코 플리미니오 루포는 불사의 강 하구에 있는 죽지 않는 사람들의 도시에 대한 얘기를 듣고 그걸 찾아 나선다. 갖은 고초 끝에 드디어 그는 그 강물을 마시고 불사의 인간이 된다. 그리하여 그는 이집트의 불락 교외에서 ‘아라비안나이트’의 어떤 얘기를 필사했고, 사마르칸다 감옥 마당에서 수없이 장기를 두었으며, 보헤미아에서 점성학을 연구하기도 하며 수많은 생을 살게 된다(‘죽지 않는 사람들’, ‘알렙’, 민음사, 13~35).

윤회하는 과정에서 죽음은
삶의 중단 아닌 변환 문턱
불사는 피할 수 없는 불행
되돌아오는 삶 긍정 못하면
현재의 삶도 긍정 어려워

불사의 삶을 찾고자 한 것은 진시황만은 아니었다. 이집트의 파라오들이 미라가 되어 거대한 피라미드 속에서 사후의 시간을 보내고자 했던 것도 잘 알다시피 불사와 영생에 대한 욕망 때문이었다. 영원성에 대한 플라톤의 철학적 꿈으로부터 레닌의 방부 처리된 시신까지 모두 이 불사의 삶에 대한 욕망의 산물이다. 영생이야 불가능하다 해도, 그것을 향하여 생명의 길이를 늘이는 것 또한 이런 욕망과 다르지 않음을 안다면, 수명을 연장하고 노화를 방지하려는 현대과학자들의 집요한 노력 역시 ‘영생’이라는 ‘종교적’ 단어와 공명하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을 터이다.

보르헤스가 저 소설에서 쓰고 있는 루포의 불사의 삶이란, 생각해보면 ‘윤회’라는 관념과 거의 비슷한 것이다. 불락에서 아라비안나이트를 필사하다 사마르칸다에 가고, 다시 보헤미아에 가서 점성학을 연구하는 아주 다른 종류의 삶을 천년 이상의 세월 동안 이어가는 것, 그것은 그 상이한 삶 사이에 ‘죽음’이라는 사건을 끼워 넣기만 하면, 우리가 익히 아는 윤회하는 삶이 된다. 그 다른 삶 사이에 있는 죽음이 두려운 것이기는 하지만, 사실 윤회 안에서 그것은 결코 삶의 중단을 뜻하는 것이 될 수 없다는 점에서 ‘죽음’이라 할 수 없다. 그것은 하나의 삶에서 다른 삶으로 넘어가는 변환의 문턱일 뿐이다. 윤회란 어두운 터널 같은 그 문턱을 수도 없이 통과하며 진행되는 삶의 연속이다. 죽음에 대한 공포란 그 터널의 어둠 앞에서 인간이 느끼는 공포일뿐이다. 그래서 "죽지 않는 사람들"에서 보르헤스는 말한다. “죽음에 대한 관념이 없다면 우리는 모두 사실 불사의 존재”라고. 컴컴한 어둠 앞에서 느끼는 공포 때문에, ‘죽음’이란 두려운 관념 때문에 우리는 죽는 것이라고.

하지만 ‘윤회’의 관념은 이런 영생의 욕망과 정반대되는 방향을 향한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윤회란 영생불사의 삶을 추구하는 게 아니라, 반대로 그로부터 벗어날 수 없음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윤회의 관념 안에서 불사란 기정사실이다. 그것은 피하고 싶지만 결코 피할 수 없는 근본적 불행이다. 그래서 윤회에서 벗어나는 법을 찾아 수행을 한다. 남들은 모두 얻지 못해 안달하는 불사의 삶을 여기선 떠나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왜 떠나야 하는가? 삶이란 모면할 수 없는 고통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영원히 산다는 것은 그런 고통 속에 영원히 머무는 것이다. 삶의 영원성이란 고통의 영원성을 뜻한다.

이런 의미에서 윤회는 근본적인 죽음의 불가능성에 대한 교설이다. 거기엔 불사에 대한 욕망과 반대로 죽음의 불가능성 앞에서 출현하는 절망이 깃들어 있다. 죽어도 죽지 못하고, 죽고자 해도 죽을 수 없는 기이한 무능력에 대한 사유가. 그러니 거기서 인간의 욕망이 윤회의 중단을 향하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할 것이다. 윤회의 중단, 그것은 고통스런 삶의 중단이요 그로부터 벗어남이다. 이런 벗어남을 ‘해탈’이라고 명명한다. 그것은 윤회의 형식으로 반복되는 삶에서 벗어나는 것이고, 죽을 수 없는 무능력에서 벗어나는 것이며, 영원한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죽음이고, 진정한 떠남이다. 번뇌나 고통의 소멸을 뜻하는 열반이 부처나 수행자의 죽음을 뜻하게 된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일 게다.

이런 윤회의 관념이 현세적인 삶에 대한 부정이라는 점에서 니체가 비판하는 ‘니힐리즘’임은 분명하다. 고통으로 가득 찬 이 현세의 삶을 하루 빨리 떠날 수 있도록 해 주소서. 하지만 이미 니체가 지적한 것처럼 불사와 영생에 대한 욕망 또한 동일한 의미에서 니힐리즘이다. 죽음으로 귀착되는 가변적이고 불확실한 삶으로부터 벗어나, 영원하고 불변적인 피안의 삶을 동경하기 때문이다. 후자는 현세적 삶의 가변성과 죽음이 두려워 피안의 영원성을 동경하고, 전자는 현세적 삶의 고통과 영원성이 두려워 그것을 떠나는 것을 동경하지만, ‘지금 여기’의 삶을 부정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보르헤스가 ?죽지 않는 사람들?이란 소설을 쓰게 된 것은, 불사의 삶을 추구하는 그런 이들에게, 죽음의 불가능성을 말하며 모두가 상이한 형태로 반복되는 삶을 영원히 살고 있다는 윤회의 가르침이란, 좀더 진지하고 좀더 강하게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더없는 축복의 전언 아닌가 하는 발상에서가 아니었을까? 하나의 생에서 다음의 생으로 넘어가는 문턱을 ‘죽음’이라고 오인하는 관념만 제거한다면, 우리는 모두 불사의 삶을 사는 존재임을 알려주려는 것이 아니었을까? “불사의 존재가 되는 것은 매우 흔한 일이다. 인간을 제외하고 모든 피조물들은 죽음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에 불사의 존재들이다. 신성하고 공포스럽고 불가해한 것은 인간이 불사의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알렙, 26)

그러나 윤회라는 이름의 영원히 되돌아오는 삶을 그저 축복으로 받아들이지 못한 것은 단지 인도인들만은 아니었다. 삶(Leben, life)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생명(Leben)의 힘을 가장 일차적인 능동적 힘으로 찬양하고, 삶이 영원히 되돌아온다는 것을 ‘복음’으로 전하던 차라투스트라는, “그렇다면 네가 그토록 혐오하는 왜소한 자들, 왜소하고 추한 종류의 삶 또한 영원히 되돌아옴을 뜻하지 않는가?”라고 묻는 난쟁이의 질문 앞에서 깊은 병에 들어간다. 죽지 않음을 그저 기뻐하는 생각 없는 순진한 영혼이 아니라면, 그 영원성과 함께 끝없이 되돌아올 고통과 추함을 어떻게 생각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인가! 그렇기에 윤회의 고통에 대한 관념을 쉽게 비판할 수는 없다. 그것은 생각 없이 한 말이 아니라 너무 많이 생각하여 한 말이고, 무지 아닌 통찰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윤회를 삶의 영원성에 대한 가르침으로 해석하며 그저 기뻐하는 것이 쉽지 않은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되돌아오는 삶을 긍정할 수 없다면, 현세의 삶 또한 긍정할 수 없다.

‘위대한 것’이라고들 하는 것 역시 자신의 목을 틀어막고 질식시키는 왜소한 것과 그리 다르지 않으며 양자가 놀랍도록 닮아 있음을 알면서 차라투스트라는 더욱 절망한다. 되돌아오는 삶을 부정하도록 만드는 깊은 니힐리즘으로부터 차라투스트라가 벗어나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위대함이나 왜소함이 다르지 않다는 사실로 인해서였다. 삶의 긍정이란, 인간적인 척도로 재서 얻은 위대함이라는 어떤 ‘크기’에 의해 얻어지는 게 아니라, 위대함과 왜소함이라는 크기를 넘어설 때, 그 ‘인간’이라는 척도 자체를 넘어설 때 가능해짐을 깨닫게 되면서다. 큰 것이나 작은 것이나 동일한 생명이며, 살아있음 자체를 기뻐하며 춤추고 노래하는 생명력이 취하는 여러 양상들임을 깨닫게 되면서다. 이는 위대한 것마저 혐오하던 것과 반대로, 아주 미소한 것마저 긍정하게 되는 깨달음이다. 큰 것은 큰 것으로, 작은 것은 작은 것으로 생명의 힘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로써 모든 차이, 모든 변화를 긍정하게 된다. 그렇다면 삶의 즐거움과 고통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즐거움만큼이나 고통 또한 영원히 되돌아오는 생명의 표현인 것이다. 윤회하는 삶의 고통은 영원히 되돌아오는 생명의 힘을 통해 긍정되게 된다.

이진경 서울과학기술대 교수 solaris0@daum.net

[1302호 / 2015년 7월 1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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