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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윤회-하

‘무아’ 잠재능력이 연기 따라 만들어 낸 상이한 ‘나’

▲ 일러스트=김주대 문인화가·시인
윤회하는 수많은 생들의 긍정, 그것은 수많은 생을 반복하여 사는 힘의 긍정이다. 그때마다 주어진 삶의 조건들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살아내는 힘을 긍정하는 것이란 점에서 그것은 니체가 말하는 영원회귀의 사상과 매우 가까이 있다. 극락이든 구원이든, 현세를 떠나는 게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의 현세적 삶 안에 있으며, 그 삶을 긍정할 만한 것으로 사는 것임을 말한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무아·윤회 모순으로 보이지만
윤회란 영원한 시간 반복해
돌아오는 무아라는 잠재력이
다른 형태로 나타나는 과정

그런데 불사의 삶은 그가 살아가는 여러 생의 삶을 관통하는 한 사람을 가정해야 한다. “불락에서 ‘아라비안나이트’를 필사하고, 사마르칸다 감옥에서 장기를 두고, 보헤미아에서 점성학을 연구하기도 하는” 식의 아주 다른 삶을 하나의 ‘불사의 삶’이라고 말하기 위해선 그 상이한 삶들이 어떤 한 사람의 삶의 계속이라고 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윤회의 관념 또한 그렇다. 윤회는 수많은 생들을 관통하여 살아가는 단 한 사람의 ‘나’를 가정한다. 아트만이라고 하든 ‘진아(眞我)’라고 하든, 그런 ‘나’가 없다면, 반복되는 삶이란 여러 사람의 삶일 뿐이니, 윤회한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불교적 사유와 윤회라는 관념 간의 근본적인 이율배반을 보여주는 것 같다. 왜냐하면 불교는 그 다른 삶을 관통하는 아트만은 물론 하나의 삶 안에서조차 ‘나’라고 부를 실체가 없음을 말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윤회란 무아를 요체로 하는 불교의 가르침에 반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윤회와 해탈이 다르지 않다고 긍정하는 대승불교의 논지는 불교로부터 벗어나는 것인가? 그게 아니라면 ‘나’라는 실체 없이 윤회를 긍정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여기서 택할 수 있는 쉬운 방법은 여러 삶을 관통하는 ‘나’라는 실체가 없기에 “윤회란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불사의 삶 또한 매번 죽는 삶이 이어질 뿐이며, 불사의 존재란 따로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윤회와 무아의 상충되는 두 개념에서 전자를 버리고 후자를 취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각자의 삶을 살고 죽는 것이라는 지극히 상식적인 통념과 전적으로 동일한 것이 되어 버린다. 불사의 삶을 추구하는 욕망이 태어난 늪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이것으로 불사의 욕망을 소멸시키고 윤회의 관념을 넘어설 수 있을까? 누구나 다 아는 통념을 넘어섰다고 믿는 욕망이나 관념을 기존의 통념으로 무력화할 순 없지 않을까? 그렇다면 삶과 죽음에 대한 뻔한 통념으로 돌아가지 않고 문제를 해결할 순 없을까? 불사나 윤회와 무아를 동시에 말할 순 없는 것일까?

보르헤스가 ‘죽지 않는 사람들’을 썼을 때는, 명료한 것은 아니지만, 불사의 삶을 말하면서 무아를 말할 수 있는 길을 찾고자 했던 것 같다. 불사의 삶을 산다는 것은 불락에선 ‘아라비안나이트’를 필사하는 누군가가 되어 살고, 사마르칸다에선 수인이 되어, 보헤미아에선 점성술가가 되어 살고 하는 수많은 삶을 사는 것이다. 그 삶들을 사는 ‘모든 사람(everybody)’이 되는 것이다. 누군가가 ‘모든 사람’이 되기 위해선 그는 ‘아무도 아닌 자(nobody)’가 되어야 한다. 계속 이집트어로 책을 필사하는 사람으로 있다면, 보헤미아의 점성술사가 될 수 없을 것이며, 중국에서 장수가 되었다가 인도에 가선 불가촉천민이 되어 신발을 만드는 삶을 이어가며 살 수 없을 것이다. ‘아무도 아닌 자’가 된다는 것은 ‘나’라고 부를 어떤 동일한 인물이 없을 때에만 가능하다. 요컨대 불사의 존재란 ‘모든 사람’이 되는 것이며, 그것은 ‘아무도 아닌 자’가 되는 것이다. 이는 그 모두를 ‘나’로서 사는 게 아니라, 정해진 ‘나’가 없는 것을 뜻한다. 결코 같다고 할 수 없는 수많은 ‘나’들을 통과하는 것이다. 보르헤스는 이렇게 쓴다. “나는 마치 율리시즈처럼 ‘아무도 아닌 자’가 될 것이다. 간단히 말해 나는 모든 사람이 될 것이다. 즉 나는 죽을 것이다.”(‘알렙’, 35~36)

윤회 또한 그럴 것이다. 이전 생에 살던 불가촉천민의 기억이 그대로 남아 있다면, 다음 생에서 왕의 아들로 태어나도 왕으로 사는 건 불가능할 것이다. 기억이 남아있다고 해도 지우려 할 것이고 지우고 말 것이다. 반대의 순서여도 그렇다. 왕의 기억을 갖고 어찌 천민의 삶을 살 것인가! 윤회하는 삶을 산다는 것은 전생의 기억들이 모두 지워지고, 전생과의 연속성이 완전히 사라져야만 가능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이렇게 말해야 한다. ‘나’라는 실체가 없을 때에만 윤회하는 삶은 가능하다고. 윤회의 시간을 관통하는 것은 수많은 삶, 그 ‘모든 이’들이 될 수 있는 ‘아무도 아닌 자’만이 있을 뿐이라고. 어떤 누구도 될 수 있는 ‘아무도 아닌 자’, 그것만이 윤회하는 것이라고. 그 ‘아무도 아닌 자’는 불변의 실체가 아니라 모든 것이 될 수 있는 절대적 가변성을 갖는 어떤 능력을 뜻하는 것일 뿐이라고.

절대적 가변성을 갖는 이 능력을 ‘무아’라고 한다면, 윤회란 그때마다의 연기적 조건에 따라 수많은 존재자가 될 수 있는 이 잠재적 능력이 펼쳐지는 장이 될 것이다. 이 능력을 ‘생명’이라고 부른다면, 윤회란 니체 말처럼 영원한 시간을 반복하여 되돌아오는 어떤 동일한 힘이 그때마다 다른 양상들로 펼쳐지는 장이 될 것이다.

이런 윤회는 생물학적 죽음에 의해 분할되는 여러 생들에 대해서만 해당되는 건 아니다. 불사의 인간이 된 루포가 불락과 사마르칸다, 보헤미아를 돌아다니며 다른 삶을 산 것처럼, 우리도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며 여러 삶을 산다. 나주에서 농사를 짓다가,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고, 부산에서 외국어를 가르치다가, 대전에 있는 감옥에 갇혀 바둑을 두기도 하고, 마산에 가서 공장에 다니기도 하고…. 길이만 좀 다르다는 것을 제외한다면 다를 게 별로 없는 연속적인 삶이다.

물론 윤회는 이와 달리 생물학적 죽음이 그 다른 삶들 사이에 있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의 생 안에서 이처럼 다른 삶을 살기 위해선, 하나에서 다른 하나로 넘어가는 지점마다 이 몸 안의 ‘누군가’가 죽어야 한다. 이전에 ‘나’라고 명명되던 누군가가 죽고 다른 누군가가 태어나야 한다. 농사를 짓던 ‘나’가 학교에서 그대로 지속되어선 안되며, 감옥의 ‘나’가 공장에 그대로 가선 제대로 일할 수 없다. ‘나’라고 부르던 존재자 안에서 ‘누군가’가 죽는 이런 사건을 블랑쇼는 ‘비인칭적 죽음’이라고 말한 바 있다. 장소와 양상을 바꾸어가며 하나의 생 안에서 내가 사는 삶이란 하나의 ‘나’가 죽고 다른 ‘나’가 태어나는 그런 과정의 연속이란 점에서, 일종의 ‘윤회’라고 할 것이다. 이를 블랑쇼 개념을 다시 써서 ‘비인칭적 윤회’라고 하면 어떨까?

이 비인칭적 윤회라는 관점에서 보면, 흔히 말하는 ‘나의 삶’에서 우리는 내가 거쳐가는 ‘모든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아무도 아닌 자’가 되어야 한다. 이미 보르헤스가 지적했던 것처럼, 거기에 ‘나’는 없는 것이다. 즉 “나는 죽은 것이다.” 한 사람의 삶이란 ‘무아’라고 명명될 수 있는 잠재적 능력이, 그때마다의 연기적 조건에 따라 상이한 ‘나’들, 그 모든 ‘나’들이 되며 펼쳐지는 과정이다. 윤회가 그랬듯이, 비인칭적 윤회 또한 니체 말대로 ‘생명’이라고 부를 어떤 힘이 다양한 양상으로 펼쳐지는 장이라고 할 것이다. 여러 생의 윤회든, 한 생 안에서의 윤회든, 윤회란 ‘나’나 ‘진아’, ‘아트만’보다는 ‘무아’나 ‘생명’이라고 불리는 게 더 적절한 어떤 힘의 영원한 흐름이라는 사실이다. 윤회를 긍정한다 함은 이 힘의 되돌아옴, 이 흐름의 가변성 그 자체를 긍정하는 것이다.

이진경 서울과학기술대 교수 solaris0@daum.net
 

[1303호 / 2015년 7월 2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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