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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경주 삼화령 삼존불상

기자명 신대현

가장 평화로운 얼굴로 시대 아픔 어루만졌던 불교미술의 진수

▲ 경주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경주 삼화령 삼존불상은 7세기 불상 가운데 연대가 뚜렷하고 봉안 장소도 분명하다는 점에서 아주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천진함이 묻어나는 상호에 온화하고 인자하기 그지없는 미소로 ‘삼화령 애기부처’라는 애칭을 가지고 있다.

미술은 화학작용 같다는 생각이 든다. 한 시대 특유의 사상 위에다 당시를 살아갔던 사람들의 감수성이 더해지면서 전혀 새로운 미술이 탄생하곤 해서다. 사상과 감수성은 서로 성질이 다르지만, 부처님을 흠모하는 마음을 촉매로 하여 하나로 섞일 때 그 시대가 염원하는 미술로 나타났다. 나라와 사회마다 추구했던 사상이 다를 수 있고, 감수성 역시 한결같지 않았으므로 시대마다 다른 성격의 미술들이 역사에 이름을 올렸으니, 미술을 보면 곧 그 시대를 알 수 있다는 말은 그래서 더욱 고개가 끄덕여지는 얘기인 것 같다.

644년 이전 조성된 삼국시대 불상
7세기 불상 중 연대 명확한 사례

삼국간 영토전쟁 이어지던 시기
고통으로 신음하는 시대상 대신
가장 순수한 경지로의 승화 담아

특유의 인자하고 온화한 미소로
‘삼화령 애기부처’ 칭해지기도
문화재청, 최근 보물 지정 예고
의미·가치 인정받는 계기 되길

7세기는 고구려·백제·신라의 영토전쟁이 치열하게 벌어지며 세 나라가 하나로 통합되는 격동의 시대였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으로 신음했을 건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그런데 그 시대 사람들은 그런 격렬함과 험한 분위기를 그대로 미술에 표현하지 않았다. 오히려 극한 고통의 마음을 가장 순수한 경지로 끌어올렸다. 이야말로 불교미술에서나 볼 수 있는 승화된 정신이요 고양된 감수성인 것 같다.

불상에서 그런 예를 찾는다면 세상에서 가장 평화로운 얼굴로 그 시대의 아픔을 어루만지려 했던 경주 삼화령 삼존불상이 아닐까 싶다. 삼화령 삼존불상은 지금 경주박물관에 함께 놓여있지만 본래 불상과 보살상들이 따로 발견됐었다. 불상은 경주 인왕동 상서장(上書莊)에서 금오산 정상을 향해 북쪽으로 800m 쯤 올라간 곳에서 발견되어 1925년 박물관으로 옮겨졌는데, 이후 이 자리를 ‘삼국유사’에 나오는 삼화령으로 비정하게 되었다. 두 보살상도 얼마 뒤 여기에서 멀지 않은 탑동 부락 민가에서 발견됐고, 역시 박물관으로 옮겨졌다. 이렇게 불상과 보살상은 따로 발견되었지만 그 독특한 양식이 서로 아주 잘 일치해 본래부터 삼존불상으로 봉안되었을 것으로 추정되었다. 그런데 금오산을 중심으로 그 반대편인 남쪽에도 ‘삼화령’이라는 곳이 있다. 금오봉 정상과 통일전을 잇는 탐방로 중간에 있는 고개로 여기에도 삼국시대 연화대좌가 있지만, 이 삼존불상과의 직접적 연관 관계는 확실하지 않다.

삼화령 삼존불상의 가치와 의미는 기록과 불상의 양식 등 두 가지 면에서 바라봐야 좀 더 뚜렷하게 이해된다. 먼저 ‘삼국유사’ ‘충담사’조에 나오는 ‘삼화령 불상’ 이야기를 간추려 본다.

“경덕왕이 즉위 24년째를 맞이한 해(765년) 3월3일 삼짓날에 신하들과 함께 귀정문(歸正門)의 누각에 나아가서 노닐었다. 왕은 문득 뜻과 예절을 갖춘 스님을 데려 와 공양하고 싶어졌다. 그런데 마침 낡은 옷을 입은 한 승려가 남쪽에서부터 걸어오고 있었다. 왕은 그 스님을 불러 자신을 위해 노래 한 수를 지어달라고 했다. 스님은 즉각 ‘임금답게, 신하답게, 백성답게 할지면, 나라는 태평할지니라’ 라는 내용을 담은 노래를 지었다. 이것이 곧 ‘안민가(安民歌, 백성을 편안토록 하는 노래)’다. 왕이 기뻐하며 누구인지 물으니 자신을 ‘충담(忠談)’이라고 소개했다. 충담 스님이 들고 있던 삼태기를 열어 보이는데 안에 다구(茶具)만 가득했다. 그러면서, ‘소승은 3월3일과 9월9일에 남산 삼화령 미륵부처님께 차를 공양하곤 하는데 오늘도 다녀오는 길입니다’라고 했다. 곧이어 왕에게 차를 끓여 바쳤는데 그 향기가 몹시 기이하고 훌륭했다. 경덕왕은 스님의 비범함을 알고 왕사로 삼고자 하였지만, 충담 스님은 기어이 사양하고 사라져 버렸다.”

위 이야기에 나오는 충담 스님은 향가(鄕歌)를 잘 지어 ‘안민가’ 외에 ‘찬기파랑가’도 지었다. 말하자면 신라 최고의 작가이자, 기록상 가장 첫줄에 이름을 올린 다인(茶人)이기도 한 것이다. 충담 스님을 기리기 위해 경주에서는 신라문화원 주최로 여러 차문화 동인회들이 해마다 ‘충담재’를 열고 있다. 충담 스님에게 차 공양을 받은 경덕왕은 바로 이 해 6월에 승하했다. 아마도 생애 마지막으로 가장 흡족한 차를 맛봤을 것 같다.

그런데 충담 스님이 일 년에 두 번씩 차 공양을 올리곤 했던 이 삼화령 불상은 언제 만들어졌을까? 이에 대한 해답을 역시 ‘삼국유사’에서 찾을 수 있다. ‘생의사 석미륵(生義寺石彌勒)’조에 이렇게 나온다.
“644년 도중사(道中寺)의 생의(生義) 스님이 어떤 스님이 자신을 꺼내어 잘 안치해 달라고 당부하는 꿈을 꾸었다. 일어나자마자 꿈에서 들은 대로 남산 북봉을 찾아가봤더니 땅 속에 삼존상이 묻혀있었다. 생의는 이 불상을 잘 꺼내어 삼화령에 봉안하였다.”

이 두 기록을 종합하면 삼화령 삼존불상은 생의 스님이 이를 처음 발견한 644년 또는 그 이전에 조성되었고, 그로부터 100년 쯤 지난 765년에는 충담 스님이 공양할 정도로 전국에서 유명한 불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삼화령 삼존불상은 조성 연대가 뚜렷하고 봉안 장소도 분명하다는 점에서 불상 연구자들에게 아주 중요한 자료여서, 우리나라 불교미술사의 태두인 황수영 박사는 “이 석상 3구가 모두 신라조각사의 첫머리에서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7세기 불상 중에 이렇게 연대가 명확한 것은 이 작품이 유일하다. 여기에 충담 스님과 경덕왕 등의 일화도 전해오고 있으니 여러 가지로 살펴볼 게 많은 불상이다.

앞서 본 것처럼 ‘삼국유사’에 이 불상의 존명이 미륵불이라고 나온다. 이 점은 신라에서 엘리트 집단인 화랑(花郞)을 미륵의 화신으로 여겼던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도 부합되어, 삼화령은 곧 화랑들이 문무를 닦던 장소 중 한 곳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본존불이 발견된 자리에 무덤으로 보이는 석실 세 개가 있던 것에 착안해 이곳이 ‘세 명의 화랑이 묻힌 곳’이라는 뜻으로 삼화령이라고 했을 것이라는 추정도 있다.

이 삼존불상은 5~6세기 혹은 8세기 이후의 양식과 비교할 때 신체 표현이 확연히 다르다. 얼굴이 둥글고 불신(佛身)은 상체가 하체에 비해 훨씬 크고 손발도 큰 편이다. 본존불의 경우 드물게 보는 의자에 앉은 모습이고, 특히 두 무릎에 신라만의 고유한 표현으로 생각되는 소용돌이 모양의 무늬가 뚜렷하게 새겨진 게 아주 독특하다. 이 삼존불상을 바라다보면 누구나 온화하고 인자하기 그지없는 미소를 짓고 있는 동안(童顔)에 가까운 젊은이의 얼굴에서 눈길을 떼지 못한다. 특히 협시보살의 아이처럼 둥그스름한 얼굴이 활짝 웃고 있는 모습에 사람들은 흠뻑 빠져들곤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보살상을 ‘삼화령 애기부처’라고 정겹게 불렀다.

불상의 상호(相好), 곧 얼굴은 시대마다 조금씩 다르게 나타난다. 조선 후기 불상의 상호는 사각형에 가까운데 말쑥하고 열경(悅境)에 든 표정이 압권이며, 나이를 가늠하기 어렵다. 고려 불상의 얼굴은 그보다 다소 긴 편이고 나이는 중년에 가까운 것 같다. 조금 더 올라가 통일신라에서는 갸름한 얼굴이 많이 선호되었고 신체도 비교적 늘씬한 체형의 불상이 많이 보인다. 그런데 이 삼화령 삼존불상처럼 아주 젊고 혹은 아이 얼굴 같은 모습을 한 불상은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다. 불상이 처음 나타난 1세기를 전후해 인도의 간다라 및 마투라 불상에도 청년의 얼굴은 나온다. 또 우리보다 불상을 먼저 만들었던 중국에도 청년에 가까운 얼굴은 있다. 하지만 이 삼존상 본존불의 온화한 미소, 보살상의 순진무구하다 할 만큼 어린 얼굴로 활짝 웃는 모습은 어디에도 없다. 그야말로 우리나라 불상에서만 보이는 천진(天眞)함이 가득 묻어나는 얼굴이다. 이 불상 하나만으로도 이 시대 우리 불교가 얼마나 싱싱했는지 느낄 수 있다면 지나칠까?

▲ 경주 배동 삼존방(보물 제63호). 입 주위로 피어난 미소가 얼굴 가득 흘러넘치는 특유의 양식이 삼화령 불상과 유사하다.

이런 양식은 우연히 나온 게 아니라, 겉으로 드러나는 화려함보다는 내면적 가치를 좀 더 중요시 했던 당시 사람들의 정서가 미적으로 완성된 결과로 보인다. 이것이 당시의 양식이었음은 작풍(作風)과 세부 묘사가 아주 닮은 다른 예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예를 들면 경주 배동 삼존상(보물 63호)이 있다. 삼화령 및 배동 삼존상의 공통된 특징은 머리카락이 나발이고 머리 위 육계가 3단으로 된 점, 사각형 얼굴에 뺨이 통통하고 턱이 단단하게 조각되어 힘과 활력이 느껴지고 양감(量感)이 좋은 점 등이다. 또 가늘게 뜨며 웃음 띠고 있는 눈의 두덩이 부풀어 있고, 입 주위로 피어난 미소가 얼굴 가득 흘러넘치게 한 점도 이 양식만의 특징이다. 이런 기법은 고구려·백제·신라가 다 마찬가지여서 삼국시대, 특히 7세기 우리나라 불상의 고유한 특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최근 문화재청은 이 삼화령 삼존불상을 보물로 지정예고 했다. 국가문화재의 가치는 물론 충분했으나, 그 동안 이 불상과 보살상이 각각 서로 다른 데서 발견된 데다가, ‘삼국유사’에 나오는 삼화령의 위치 비정에 대한 의문이 명쾌하게 풀리지 않아 지금까지 미뤄졌던 것 같다. 그래서 그동안 대중들이 이 삼존불상의 가치와 의미에 대해 알 기회가 적었던 것도 사실인데, 이제 삼화령 삼존불상의 보물 지정을 계기로 우리나라 불교미술의 고양된 아름다움을 다시 한 번 느껴볼 수 있게 됐다. 동서고금에 미인이 많지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 아이의 얼굴인 것 같다. 가식이 없고 때 묻지 않아 순수한 얼굴은 아무리 짙은 화장을 한 미인을 보는 것보다 훨씬 행복감을 준다. 여기에다 해맑은 미소까지 짓고 있으면, 이것이 바로 부처님 얼굴이 아닐까 싶은 것이다.

사찰문화연구원 대표 buam0915@hanmail.net

[1303호 / 2015년 7월 2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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