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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년 멸빈은 비불교적이고 잔혹한 처사”

기자명 법보신문
  • 기고
  • 입력 2015.07.27 16:37
  • 수정 2015.07.27 16:50
  • 댓글 57

이자랑 동국대 불교학술원 HK연구교수가 ‘94년 멸빈자 사면 논란’과 관련해 7월27일 법보신문에 ‘멸빈에 대한 재검토가 필요하다’는 기고문을 보내왔다.

이자랑 교수는 기고문에서 “멸빈당한 승려는 출가자로서의 삶에 종지부를 찍게 되므로, 멸빈은 세간의 사형에 비유되곤 한다”며 “사람의 목숨을 빼앗은 살인범이라도, 극악무도한 정치범이라도 재판을 받을 권리가 있으며,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할 권리가 있다. 하물며 함께 수행하며 기쁨을 일구어 가야 할 승가공동체에서 멸빈이라는 가혹한 처벌이 명확한 사실 파악이나 증거 제시, 또한 적법한 절차 없이 이루어지는 일이 어찌 용납될 수 있겠는가”라고 지적했다.

이자랑 교수는 일본 도쿄대학 인도철학·불교학과에서 율장 및 초기불교 교단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했으며, ‘나를 일깨우는 계율 이야기’ ‘붓다와 39인의 제자’ ‘인도불교의 변천’ 등 다수의 저술 및 번역서가 있다. 또 여성학자로서는 처음으로 지난 6월 불이상을 수상했으며, 여성불자 108인에도 선정됐다. 편집자

■이자랑 불교학술원 HK교수 기고 전문

이자랑 불교학술원 교수 기고
멸빈은 세간의 사형에 해당
출가자에게 가장 가혹한 처벌

개혁종단, 9명 승려에 ‘멸빈’
일방적 절차 거쳐 징계 부과
현 멸빈제도 정치적 악용 우려

“정치적 꼼수”라는 한 마디로
이번 사안 묻혀 사라져선 안돼

서의현 전 총무원장에 대한 호계원의 재심 판결을 두고 현재 조계종단은 안팎으로 큰 진통을 겪고 있다. 의현 스님은 94년 개혁종단으로부터 멸빈의 징계를 받고 승적을 박탈당한 인물이다. 당시 종단 개혁을 주도하거나 혹은 이에 동참했던 출․재가자들은 20여년이 흘러 이루어진 공권정지 3년이라는 재심 판결에 엄청난 분노를 느끼며 ‘94년 종단 개혁 정신의 훼손 혹은 부정’이라 비난하고 있다.

8년간의 총무원장 재임 기간 동안 절대 권력을 휘둘렀던 의현 스님이 3선을 강행했을 때, 총무원의 무모한 시도를 대중의 힘으로 바로 잡겠다는 열망 하에 많은 불교도들이 동참하였다. 당시나 지금이나 구세력의 핵심으로 의현 스님을 인식하고 있는 사람들이 이 재심 판결을 대중의 염원을 저버린 종단 수뇌부의 배신으로 여기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교계 안팎에서 가혹한 비난의 목소리가 쏟아지고 있다.

하지만, 이번 사태를 개혁의 한 과정으로 보고 새로운 논의를 전개하는 계기로 삼을 수는 없는 것일까? 대다수의 관련자들이 하나의 목소리를 내며 호계원의 판결을 비판하는 이 와중에 굳이 필자가 비난의 여지를 감수하고 이런 질문을 던지는 이유는 94년 개혁종단이 자신들의 반대편에 섰던 승려들에 대해 비불교적인 방법으로 인적청산을 감행한 것은 분명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서의현 세력을 제압한 개혁종단은 곧바로 의현 스님을 비롯한 수많은 반대편 승려들을 징계하였다. 특히 일부 승려들에 대해서는 승가의 구성원에게 적용할 수 있는 가장 가혹한 징벌인 멸빈(당시는 치탈도첩)을 적용하여 가차 없이 승려로서의 목숨을 끊어버리기도 하였다. 하지만 당시 의현 스님을 비롯한 9명의 비구에게 내려진 멸빈이란 징벌은 정말 합당한 것이었을까, 이 문제에 대해서는 검토의 여지가 있다고 생각된다.

율장에 의하면, 멸빈은 출가자에게 내려지는 가장 가혹한 처벌이다. 멸빈당한 승려는 출가자로서의 삶에 종지부를 찍게 되므로, 멸빈은 세간의 사형에 비유되곤 한다. 필자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이 가혹한 처벌은 사실상 바라이 음욕죄를 저지르고 그 사실을 숨기거나, 반복해서 저지른 경우 외에는 정식 비구에게 적용되는 예가 없다. 왜일까? 그것은 수행의 근본적 장애 요소인 음욕과 관련하여 스스로 부끄러움을 모를 정도의 파렴치한 수준이 아니라면, 다른 악행은 모두 참회를 통해 승단이나 동료 수행자가 이끌어가야 한다고, 아니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죄의 경중(輕重)에 따라 마음속의 참회로 용서되는 경우도 있고 혹은 승단의 엄격한 제재 하에 관리를 받으며 힘든 참회의 기간을 보내야 할 경우도 있어 참회의 방법은 다양하지만, 기본적으로 승단이나 동료 수행자는 아무리 악독한 범계자라도 참회를 통해 청정비구로 거듭나도록 지도하고 서로 격려하며 이끌어 갈 의무가 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94년 당시 다수의 승려에게 내려진 멸빈은 율장의 규정이나 이념을 외면한 매우 비불교적이고 잔혹한 처사였다고 생각된다.

이와 관련하여 또 한 가지 문제는 절차상의 문제이다. 94년 사태는 분명 승단의 구성원들 간에 벌어진 분쟁이었다. 그렇다면 이는 승단의 고유한 분쟁 해결법에 근거하여 해결이 도모되었어야 한다. 그것은 바로 칠멸쟁법(七滅諍法)이다. 칠멸쟁법이란 구족계의 마지막 일곱 조항을 장식하는 조문으로 승단에 분쟁이 발생했을 때 이를 가라앉히는 일곱 가지 방법이다. 구족계 조항으로 명시되고 있기 때문에 모든 비구들이 반드시 지켜야 할 의무가 있으며, 지키지 않는다면 범계에 해당한다. 칠멸쟁법에 의하면, 승단의 분쟁을 해결하는 멸쟁갈마는 당사자의 출석, 죄상, 문책, 자백이라는 일련의 요건을 갖추고 실행되어야 한다. 즉, 문제의 당사자가 반드시 출석해야 하고, 승단은 그에게 무엇 때문에 지금 이 자리에 출석하고 있는지 죄상을 일러 주고 문책해야 하며, 이에 대해 당사자가 자백을 하면 그때 비로소 죄가 확정되는 것이다.

하지만 94년의 경우, 호법부나 호계원으로부터 출석 통보를 전혀 받지 못했다는 경우도 있고, 출석할 수 없는 사유를 호법부에 통보하고 초심호계위원회에 징계 사유(제소 요지)를 알려달라고 하였지만 알려주지 않은 채 당사자가 없는 상태에서 궐석징계를 해버린 사례도 있다. 또한 대부분의 경우 죄상과 문책, 자백은 아예 이루어지지 않은 채 일방적으로 치탈(멸빈)이라는 중벌이 내려졌다. 자신이 왜 멸빈되었는지 명확한 이유도 모르고 인정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멸빈자가 된 승려가, 판결 결과를 받아들이는 일이 어찌 쉽겠는가. 이런 적법한 과정을 거치지 않고 판결이 내려졌을 때, 이미 그 판결은 불완전한 것으로 표류하며 또 다른 분쟁의 씨앗으로 남게 된 것이다. 그 씨앗이 드디어 20여년 만에 싹을 틔웠다고 하면 과언일까. 94년 종단 사태는 현재 진행형인 것이다.

개혁종단은 출범 후 지금까지 적지 않은 성과를 일구어 냈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종도들의 화합’은 실현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출가자들은 출가자들끼리 반목하고, 재가자들은 출가자를 불신하고 있다. 이번에 의현 스님의 재심 판결이 나왔을 때도 수뇌부의 정치적인 의도에 가장 먼저 의혹의 시선들이 집중되었다. 이는 너무나도 당연한 결과이다. 물론 94년 멸빈자 문제는 예민하고도 어려운 부분이 있어 종단 나름대로의 고충이 있었을지 모르지만, 만약 종단이 화합 차원에서 94년의 멸빈 문제를 해결하고 싶었다면, 좀 더 적극적이고 개방적인 논의가 사전에 진행되었어야 하며, 재심 대상 역시 의현 스님 한명이 아닌 당시 멸빈당한 모든 승려가 포함되었어야 한다. 종단이 비난을 자초한 셈이다.

하지만 이로 인해 이번 의현스님 사태가 ‘정치적 꼼수’라는 한 마디에 묻혀 사라져 버리지 않기를 바란다. 또 다시 과정상 문제가 발생하여 종단이 혼란에 빠졌지만, 94년 당시 이루어진 멸빈은 분명 재검토의 여지가 있다. 멸빈이라는 징벌은 그 후에도 끊임없이 조계종에서 기능하고 있다. 98년 조계종 사태에서도, 또한 최근에는 선학원 사태에서도 멸빈자가 발생하였다. 이것은 절대로 바람직한 현상이 아니다. 멸빈은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수행자로서의 삶을 박탈당하는 것이며, 승단 차원에서는 ‘화합’이라는 승단 운영 최고의 이념을 완수하지 않는 것이다.

멸빈이 지니는 무게에 대한 재인식과 고민이 필요하다. 현재 승려법 제46조에서는 ‘불조에 대하여 불경한 행위를 한 자’를 시작으로 총 8가지 경우를 멸빈 대상으로 정하고 있다. 하지만 대다수가 지극히 애매한 표현으로 정치적 싸움이 벌어졌을 때 권력을 쥔 측이 자의적인 해석 하에 상대방을 제거하는 방법으로 악용할 수 있는 여지가 농후하다. 반드시 시정되어야 한다.

▲ 이자랑 불교학술원 교수
일반 사회에서조차도 인권 보호는 최후의 보루이다. 사람의 목숨을 빼앗은 살인범이라도, 극악무도한 정치범이라도 재판을 받을 권리가 있으며,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할 권리가 있다. 하물며 함께 수행하며 기쁨을 일구어 가야 할 승가공동체에서 멸빈이라는 가혹한 처벌이 명확한 사실 파악이나 증거 제시, 또한 적법한 절차 없이 이루어지는 일이 어찌 용납될 수 있겠는가. 서의현이라는 한 승려 혹은 현 종단 수뇌부의 행보에 대한 사부대중의 분노가 종단이 안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를 덮어버리는 안타까운 상황이 벌어지게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1305호 / 2015년 8월 1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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