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4. 화엄사 4사자석탑 중심 존상의 도상문제

기자명 주수완

석탑 속 인물입상의 미스테리…비구니인가 부처인가?

▲ 화엄사 4사자 삼층석탑. 국보 제35호. 높이 5.5m. 통일신라시대.

전남 구례 화엄사에는 귀중한 성보가 많이 전해 내려오고 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잘 알려진 것은 4사자 석탑이다. 일반적인 탑과 달리 이 석탑은 네 귀퉁이에 사자가 앉아서 머리로 탑을 떠받들고 있고, 그 가운데 안쪽에는 어떤 인물이 서있는 형상이어서 매우 독특한 느낌을 준다. 다보탑과 더불어 통일신라의 이형(異形) 석탑을 대표한다.

석탑 안에 인물 입상 봉안
일반적 탑과 달라 ‘눈길’
석탑 앞엔 무릎 꿇은 인물
독특한 구도 궁금증 유발

‘화엄사적기’ 청건설 따라
연기조사·어머니로도 해석
탑 앞 인물 주목한 새 견해도
공양 대상 ‘부처’로 보는 시각

외면의 존재 상징하는 탑 속에
내면 드러낸 ‘부처’로 볼 수도
존명 넘어 진지한 탐구에 의미

거기에 덧붙여 이 석탑 앞에는 승려로 보이는 인물이 석탑을 향해 머리에 석등을 이고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데, 이 역시 보는 이로 하여금 궁금증을 자아내게 한다. 미술 작품을 감상하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첫걸음은 먼저 궁금증을 유발하는 것에 있는데, 화엄사 4사자 석탑을 보는 이는 누구든 이 탑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있을까 궁금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이 석탑은 어떤 이야기를 전달하고자 했던 것일까? 아마도 그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보이는 탑 안쪽 인물이 누구인지를 밝히는 것이 해석의 실마리가 될 것이기에 많은 연구자들이 이에 대한 견해를 제시했다. 가장 먼저 주목되는 것은 탑을 향해 무릎을 꿇고 있는 인물은 화엄사를 창건한 연기조사(緣起祖師)이고, 탑 안의 인물은 연기조사의 어머니라는 해석이다. ‘화엄사사적’에 의하면 인도의 승려 연기조사는 백제 성왕 22년(544년)에 백제로 건너왔는데, 그때 자신의 어머니를 등에 업고 왔다고 한다. 그리고 지금 화엄사가 자리한 ‘황둔골’에 머물며 불법을 가르쳤는데, 마을 사람들은 특히 연기조사가 어머니를 극진히 모시는 것에 큰 감명을 받아 화엄사를 세웠다는 것이다.

연기조사의 어머니는 단지 속세의 어머니일 뿐 아니라, 어쩌면 비구니 스님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연기조사는 어머니로서 뿐만 아니라, 자신의 스승으로서 그렇게 극진히 어머니를 모셨던 것일 수도 있다. 여하간 그것이 스승으로서였건, 어머니로서였건 간에 백제 사람들에게는 효(孝)의 성격으로 더 크게 받아들여졌고, 이를 기념하여 화엄사에 효대(孝臺)를 마련하여 이 탑을 세웠다고 하는 이야기이다.

매우 아름다운 이야기이지만, 역사학자들은 이 설에 그다지 신빙성을 두지 않는다. 화엄사의 ‘효대’라는 표현은 고려시대 대각국사 의천(義天, 1055~1101)의 ‘유제지리산화엄사(留題智異山花嚴寺)’에 처음 등장한 이후 15세기 남효온(南孝溫, 1454~1492)의 ‘추강문집(秋江文集)’, 그리고 17세기 무렵 활약했던 정시한(丁時翰, 1625~1707)의 ‘산중일기(山中日記)’ 등에서 언급된 바 있다. 그러나 의천이 시에서 언급한 효대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지칭하는 것인지 알 수 없고, 조선시대 문집에 등장하는 효대 및 이에 얽힌 설화는 4사자 석탑이 세워졌던 통일신라시대로부터 한참 후에 서술된 글일 뿐 아니라, 왠지 이렇게 ‘효’가 강조된 것은 조선시대 유학자들의 생각이 가미된 것이 아니었을까 추측하게 만든다.

하지만 아니 뗀 굴뚝에 연기가 나지는 않는 법인지라, 이러한 설화도 무엇인가 근거가 있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었음에 틀림없다. 그 근거란 아마도 탑 안의 인물이 왠지 부처처럼 보이지는 않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나아가 왠지 여성으로 보이기도 한다는 점이 바로 이런 설화를 만들어 내는데 기초가 되었을 것이다.

▲ 비구니, 고승, 혹은 부처로 해석되는 화엄사 4사자 석탑 내부 인물입상.

이에 반해 탑 안의 인물을 중국 화엄종의 제3조 현수 법장(賢首法藏, 643~712)으로 보고자 하는 새로운 해석이 등장했다. 이는 ‘화엄사’라는 절의 이름에 맞게 화엄사상으로 이 탑을 해석하고자 시도한 것이 특징이다. 즉, 법장이 측천무후에게 화엄의 십현연기(十玄緣起)를 설법하며 비유로 든 궁전 내부 귀퉁이의 네 마리 사자상을 이 석탑에 형상화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가운데 인물은 바로 그러한 비유를 들고 있는 법장 스님이라는 주장이다. 이는 연기조사와 그의 어머니라는 주제보다 더 넓고 보편적 성격을 가진 해석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중국에서조차 시도된 바 없는 방식으로 그 내용을 신라에서 시각화했다는 것에는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다.

▲ 충북 제천 사자빈신사지 9층석탑. 보물 제94호. 같은 4사자 석탑이지만, 내부 인물상의 모습은 지권인을 한 지장보살처럼 보인다.

여기서 더 나아가 4사자 석탑과 화엄사상과의 관계를 보다 폭넓게 고찰한 새로운 견해도 등장했다. 그 근거는 우선 화엄사 4사자 석탑과 유사한 형태를 가지고 있는 ‘사자빈신사지(獅子頻迅寺址)’ 석탑과의 관계에서 비롯되었다. ‘사자빈신’이란 이름은 ‘화엄경’‘입법계품’에 석가모니가 대중에게 법계(法界)의 경지를 보여주기 위해 사자좌 위에 앉는 ‘사자빈신삼매’에 드셨다는 내용에서 등장한다. 사자를 탑 사면에 내세운 것도 사자빈신의 경지를 시각화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뜻이다. 만약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이 탑 안에 서있는 인물은 ‘입법계품’에 등장하는 사자빈신비구니가 되고, 탑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있는 인물은 선재동자로 볼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게 된다.

4사자 석탑은 화엄사, 사자빈신사지 외에 홍천 괘석리, 금강산 금장암지 등에서도 발견되는 형식이다. 따라서 연기조사와 어머니라고 하는 화엄사에 국한된 이미지 보다는 화엄종의 법장, 화엄경의 입법계품 등과 같은 보편적인 어떤 내용이 함축되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사자빈신삼매’의 표현이라는 주장에 대해서도 반론이 제기될 수 있을 듯하다.

탑의 형태가 비록 사자빈신사지와 유사하다고 할지라도 그 안에 모셔진 입상의 모습이 서로 다른데, 이를 단지 4사자 석탑 형식이라는 이유만으로 동일한 내용을 표현했다고 단정할 수 있을까? 만약 동일한 형식이 동일한 내용을 담고 있다면, 다른 지역에서 보이는 4사자 석탑 안의 모든 인물상을 비구니의 형상으로 해석해도 될 것인가?

그런데 이와는 또 다른 해석이 등장했다. 이 주장은 석탑 앞의 인물상에 더 주안점을 두었다. 공양인으로 알려진 이 인물상은 현재 양 옆에 세워진 기둥으로 머리 위에 지붕을 얹고, 다시 그 위에 석등을 올리고 있는데, 원래의 모습은 머리 위에 바로 석등을 얹은 형태였다는 것이다. 이는 공양자상을 둘러싼 석조 부재의 짜임새가 매우 엉성한 것으로 보아 현재의 모습은 원래의 모습이 아니며, 머리 위에 얹어둔 석등이 구조적으로 불안정해지자 급조해서 받쳐둔 것이라는 설명이다. 원래의 모습은 금장암지에 있었던 공양자상의 오래된 사진에서처럼 승려가 머리 위에 석등을 이고 있는 형태였다는 것이다.

▲ 금강산 금장암지의 석등을 머리에 인 공양승려상. 화엄사 4사자석탑 앞 공양상도 원래 이런 모습이었다.

이렇게 등을 머리에 이고 있는 공양상의 공양대상은 대체로 연등불과 같은 부처임을 지적하고 있다. 이를 통해 탑 안의 인물이 연기법사의 어머니나 법장, 혹은 비구니가 아니라 여하간 부처라는 주장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을 듯하다. 이 입상이 부처라는 주장은 어쩌면 가장 기본적인 해석이 되어야 했겠지만, 논의에서 뒤늦게 등장한 것은 그만큼 부처로서의 상호, 예를 들어 육계라든가 수인이 부처의 정형을 따르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지 이 상을 부처로 보려는 시각이 오히려 조심스럽다.

하지만 사자를 제외하고 바라본 석탑은 전형적인 신라의 불탑이다. 즉, 부처의 사리를 봉안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건축적 구조이다. 만약 탑 아래의 인물을 탑을 머리에 이고 있는 형상으로 해석한다면 이는 승려나 비구니도 될 수 있다. 하지만 팔자는 조금 다르게 생각한다. 이것은 머리에 이고 있는 형상이 아니라, 탑이 공중으로 솟아오른 형상처럼 보인다. 즉, 탑이라는 존재와 그 아래의 인물은 별도의 존재가 아니라, 사실은 같은 존재이고, 단지 내면적 존재를 둘러싼 외면적 존재가 거둬지는 순간, 내면적 존재가 드러나는 순간으로 해석하면 어떨까 한다. 단지 그 탑이 공중으로 솟아오른 것을 표현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사자들이 이를 떠받치고 있는 것이고, 이를 통해 탑 내부에 있던 부처가 비로소 모습을 드러내게 된 것이다.

이와 함께 마치 영산법회에서 괘불이 펼쳐지면 그 앞에서 범패(梵唄), 즉 음악공양을 행하는 것처럼, 화엄사 4사자 석탑 기단부에는 음악공양자들이 돌아가며 새겨져 있다. 아마도 그 앞의 공양자가 몸을 태우는 듯한 등불 공양을 한 덕분에 탑 안의 부처가 모습을 드러내자 부처를 환영하는 음악이 울려퍼지는 것을 표현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4사자 석탑이 연기조사의 설화에 바탕을 두었다는 해석은 아직도 하나의 믿음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후대에 덧붙여진 의미도 의미로서 가치가 있을까? 어쩌면 화엄사 4사자 석탑의 논쟁이 주는 문제는 단순한 존명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작품에 의미가 덧씌워지는 과정에 대한 진지한 탐구 그 자체로서 의미를 지니고 있을지도 모른다.

주수완 고려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  indijoo@hanmail.net

[1304호 / 2015년 7월 2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