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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자비-상

차별 버리고 모든 중생 평등하게 대하려는 마음

▲ 일러스트=김주대 문인화가·시인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쉽지만
이질적이고 나와 멀리 떨어진
사람까지 사랑하는 건 어려워
낯선 것도 차별 않는 게 자비

불교를 상징하는 단어를 하나 말해보라고 하면, 아마도 많은 이들이 ‘자비’라고 말하지 않을까? 무아와 무상, 공 같은 개념들도 있지만, 이는 체득하기는 물론 이해하기도 쉽지 않은 말인지라, 누구나 쉽게 이해할만한 말인 ‘자비’를 선택하는 게 아닐까 싶다. 자비란, 친구를 뜻하는 ‘mitra’에서 파생되었으니 ‘우정’과 근친성을 갖는 ‘maitri’를 번역한 ‘자(慈)’와 연인처럼 공감적인 사랑을 표현하는 ‘karuna’를 번역한 ‘비(悲)’가 합쳐서 만들어진 말이다. 우정과 사랑이라는, 우리 중생들을 고통에 찬 세상 속에서 살아갈 수 있게 버티어주는 두 가지 관계를 집약한 개념인 셈이다. 묘하게도 ‘슬플 자(慈)’자로 한역된 ‘maitri’는 실은 남에게 기쁨을 주는 것을 뜻하고, ‘karuna’는 남의 슬픔을 덜어주는 것을 뜻한다. 세간의 만남에서 능력의 증가가 발생할 때 동반되는 감응이 기쁨이고 능력의 감소가 발생할 때 동반되는 감응이 슬픔이라는 스피노자의 개념을 안다면, 자비란 흔히 ‘인연’이라고 명명되는 모든 만남에서 능력의 증가를 야기하는 실천을 설파한 스피노자의 윤리학과 강하게 공명하는 개념이라 할 것이다.

불교의 가르침은 무아의 깨달음을 얻는 것으로 귀결되지만, 그걸 얻지 못한 이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질문을 피하기 어렵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깨달음을 얻지 못해 무명 속에 사는 중생이니까. 내게 불교를 알게 해준 스님의 대답은 “깨달은 사람처럼 살라”는 것이었다. 평생을 깨달은 사람처럼 산다면, 깨달은 사람이 되는 거라고. ‘보살행’이란 아마도 그렇게 깨달은 사람처럼 사는 삶을 지칭하는 말일 게다. “네가 만나는 이들에게 최대한 기쁨을 주고 최대한 슬픔을 덜어주며 살라”고 요약될 수 있는 자비행은 이런 보살행의 일부일 것이다. 물론 ‘자리이타(自利利他)’의 가르침을 생각하면, 이는 남에게만이 아니라 자기에게도 마찬가지로 자와 비의 행을 행해야 한다고 할 것이다.

자비가 설하는 실천의 윤리학을 ‘기쁨의 윤리학’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고, 흔한 말로 ‘사랑의 윤리학’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뿐이라면 흔한 사랑의 언행과 별로 다를 것도 없지 않은가? 누구나 다 자기나 자기 가족, 혹은 친구나 연인을 사랑하지 않는가? 사실 일부 생물학자들은 그런 사랑의 이유는 물론 대상에 따라 달라지는 사랑의 강도조차 유전자라는 자연적 본능을 통해 설명하기도 한다. 본능에 속하는 것이라면, 굳이 사랑하라고 가르치지 않아도 다들 하는 것 아닌가? 그걸 굳이 ‘가르침’이라고 내세울 이유가 있을까?

세간에서 행해지는 ‘자연적인’ 사랑은, 유전자 비율을 굳이 끌어들이지 않아도, 자신과 가까운 이들을 향해 있다. 가까운 만큼 더 사랑하고 멀어지면 덜 사랑한다. 낯선 이들을 사랑하기는 어렵고, 경계선 너머에 있는 이들이나 적의 편에 있는 이들을 사랑하는 건 더더욱 어렵다. 반면 자비의 교설은 평등심을 요구한다. “진정한 자비심을 일으키기 위해선 우선 평등심을 담아야 합니다.”(달라이라마, ‘아름답게 사는 지혜(Power of compassion)’, 69) 평등심을 가지라는 말은 모든 중생을 평등하게 사랑하라는 말이다. 나와 가까운 자와 먼 자, 친한 이와 낯선 이, 내게 호의적인 이와 그렇지 않은 이 간에 차별을 두지 말고, 기쁨을 주거나 슬픔을 덜어주려는 마음을 동등하게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생물학자가 말하는 ‘본능적’ 사랑의 감정에 반한다. 왜 굳이 그래야 하는가? “우리 자신의 친구들에게[즉 나와 가까운 이들에게] 베푸는 자비와 사랑은 사실은 집착입니다.…무엇인가 ‘나의 것’이고 ‘나의 친구’이고 ‘나’를 위해 좋은 것이라는 생각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에 그것은 집착입니다.”(같은 책, 67~68) 달라이라마가 계속해서 지적하듯이, “친구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나를 대하는 태도가 바뀌면 그에 대한 친밀감이”, 사랑이나 자비의 마음이 사라져 버리기 십상이다. 오래전 영화지만 곽경택의 ‘친구’는 그렇게 태도나 이해관계가 달라지면 친구였던 이에게 심지어 남보다 더한 미움과 증오로 적대하게 된다는 것을 아주 잘 보여준다. 그런 사랑은 본질적으로 자기에 대한 애착의 연장선상에 있는 사랑일 뿐이다. 그런 사랑이 아상(我相)과 얼마나 가까운지를 안다면, 친소와 원근을 넘어선 평등한 사랑이 아니면 무아의 가르침과 이어질 수 없음 또한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모든’이란 말처럼 상투화되기 쉬운 것도 없다. 평등심을 갖는 자비는 또 다시 ‘모두를 사랑하라’라는 뻔한 말이 되기 십상이다. 그래서일 것이다. 니체는 ‘네 이웃에게 등을 돌리라’는 까칠한 말로 ‘이웃사랑’의 가르침을 비판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한다. “이웃에 대한 너의 사랑, 그것은 너 자신에 대한 좋지 못한 사랑”이라고. 그것은 “이웃 사람들 주변으로 몰려가는” 행동을 미화하는 미사여구라고. ‘이웃’이란 가까이 있는 이들이다. 통상적으로는 공간적으로 가까이 있는 이들을 뜻한다. 공간적으로 가까이 있는 이들만 이웃은 아니다. 하는 일이 비슷한 이들, ‘핏줄’이 가까운 이들, 사고방식이 가까이 있는 이들, 감각이 비슷한 이들 또한 모두 이웃이다. 가까이 있는 이들, 혹은 비슷한 이들을 사랑하는 것은 사실 쉬운 일이다. 나로부터 가족으로, 그리고 핏줄로 연장된 이들이나 공간적으로 연장된 이웃을 사랑하는 것도 ‘자연스런’ 일이고 쉬운 일이다.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에 아무도 토를 달지 않는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생각해보면, 애향이나 애국을 가르치고 요구하는 학교나 국가의 권고도 이와 그리 다르지 않다. 그것은 모두 나와 가까운 것, 나와 비슷한 것에 대한 사랑이다. 내가 나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그리 멀지 않은 사랑이다.

좀 더 냉정하게 말하면 이런 사랑은 나와 비슷한 이들에 대한 사랑을 통해 자신의 둘레에 동질적인 보호벽을 만드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이웃사랑이란 가까운 사람들, 비슷한 사람들끼리 뭉치고 몰려다니며 ‘떼거리(Herd)’를 짓고, 자신들과 다른 것을 배척하거나 자신들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비난하고 매장하는 것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만큼 쉽고, 그렇기에 문제인 줄조차 알기 어렵다.

그래서 차라투스트라는 가까이 있는 이들이 아니라, “더없이 먼 곳에 있는 이들을 사랑하라”고 설파한다. 즉 “이웃에 대한 사랑보다 더 숭고한 것은 더없이 먼 곳에 있는 이들에 대한 사랑”이다. 이웃주민이 아니라 멀리서 온 사람들, 동향인이 아니라 이방인들, 생각이 비슷한 이들이 아니라 생각이 많이 다른 이들을 사랑하라는 말이다. 또한 지금 우리 옆에 있는 이들보다 더 고귀한 것은 “앞으로 태어나 도래할 사람들에 대한 사랑”이라고 설파한다. 이는 생물학적 후손에 대한 얘기가 아니다. 지금 널리 퍼져 있는 것과 다른, 지금은 아주 생소한 어떤 감각을 가진 이들, 아직은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감각이나 생각을 가진 낯선 이들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비슷하고 가까이 있는 이들을 사랑하는 것은 쉽지만, 나와 이질적이고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을 사랑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쉽고 자연스런 것은 굳이 가르치지 않아도 행해지겠지만, 이처럼 낯설고 쉽지 않은 것은 애써 가르쳐도 행하기 어렵다.

나와 가까운 것, 나와 비슷한 것에 대한 사랑은 역으로 사랑받기 위해선 비슷해지고 가까워져야 한다는 강박을 만들어낸다. 특히 힘없는 이주민들, 남의 눈치를 봐야 하는 이방인들로선 사랑은 그만두고 미움 받지 않기 위해선 ‘나’라고 칭하는 내부자들과 비슷해져야 한다. 그들의 ‘이웃’임을 보여주어야 한다. 예전에 미국에서 이민법 개정이 문제가 되고 있을 때, 남미에서 온 이민자들이 집회를 하며 자신들 또한 ‘미국인’이고 미국을 사랑한다며 미국국가를 자기들 언어인 스페인어로 부른 적이 있었다. 미국국가가 스페인어로 불리어지는 것에 많은 미국인들은 당황했지만, 그것이 ‘이웃’ 아니면 사랑하지 않는 그들의 태도에 기인한다는 생각은 별로 하지 못했을 것이다. 미국인이 사랑하는 ‘이웃’이 되기 위해 그들과 가까운 생각을 일부러 드러내고, 그들과 비슷한 애국심을 일부러 과시하는 것이, 부지중에 강요된 것이었음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이는 가까운 이웃만이 아니라 평등심을 갖고 모든 중생을 사랑하라는 말이 실질적으로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려준다. 니체가 굳이 이웃이 아니라 가장 멀리 떨어진 이를 사랑하라고 했던 것이 얼마나 현실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지도.

이진경 서울과학기술대 교수 solaris0@daum.net
 

[1304호 / 2015년 7월 2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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