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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금산사 금강계단

기자명 신대현

독특한 구성양식·뛰어난 작품성…고려시대 불교미술의 백미

▲ 금산사 방등계단 전경.

사찰 문화재는 우리 문화의 정수이니 이를 보려 사찰을 찾는 일은 문화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해야 할 문화순례다. 문화재를 보러 사찰로 가는 걸음은 그래서 고단한 여정이 아니라 즐거운 여행길이다. 어떤 사찰에는 한둘이 아니라 여러 점의 훌륭한 문화재들이 자리한다. 이럴 때면 많은 시간 들이지 않고서도 한 곳에서 많은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어 여간 고마운 게 아니다. 이렇게 눈이 즐거운 안복(眼福)을 한껏 누리면서도, 별 힘 들이지 않고 이런 작품들을 대한다는 게 어쩐지 우리 문화에 대한 불손 같기도 해 슬며시 걱정이 될 정도다. 우리 사찰 중에 이런 문화재의 보고가 적지 않은데, 예를 들면 전북 김제에 자리한 금산사(金山寺)가 바로 그런 곳이다. 워낙 좋은 작품들이 가람 곳곳에 있어 제대로 보려면 한 이틀은 지내며 찬찬히 살펴봐야 할 것 같다.

고려시대 조성된 손꼽히는 유적
부처님께 계 받는 여법한 장소

계단 중앙 진신사리 모신 탑
‘부도’로 보는 견해는 잘못
탑 정상 ‘구룡토수’ 조각 압권

기단부 조각의 가치도 뛰어나
김시습, 참배 감동 시에 담기도

금산사의 여러 문화재 중에서 금강계단(金剛戒壇)은 고려시대에 세운 것으로 가장 오래된 금강계단 중 하나이고, 그 구성 양식도 미술사에서 특기할 만큼 독특하고 성취도가 높은 중요한 유적이다. 꼼꼼히 살펴보면 어디 한 부분 신기하지 않은 데가 없고 감탄사가 절로 나오지 않는 부분이 없는 ‘작품’인 것이다. 이 금강계단만 잘 보고 와도 우리 문화 공부는 제대로 한 셈이다.

▲ 통도사 금강계단.

금강계단이란 부처님에게 계를 받는 장소를 말한다. 불교의 정수를 계(戒)·정(定)·혜(慧)의 삼학(三學)이라고 할 때 그 중 계를 가장 으뜸으로 삼는다. 그래서 계를 받고 지킴은 불교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다. 금강계단에는 석가모니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시고 있으니 여기서 계를 받으면 곧 석가모니부처님에게 계를 받는 것이다. 금강계단은 우리나라 한국 불교의 독특한 유산이다. 금강계단은 646년에 창건과 함께 세운 것으로 생각되는 통도사 금강계단이 효시인데 지금의 통도사 금강계단은 1645년에 중건한 것이니 고려시대의 작풍이 그대로 남아 있는 금산사의 그것이 좀 더 고풍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밖에도 하동 쌍계사, 고성 건봉사, 달성 용연사, 완주 안심사, 무주 백련사, 개성의 불일사 등에도 금강계단이 있다.

금산사 경내 북쪽 나지막한 언덕은 예로부터 소나무가 울창하게 우거져 있어서 송대(松臺)라고 부르는데 금강계단은 여기에 자리한다. 일명 방등계단(方等戒壇)이라고도 하는 것은 계의 정신이 모든 일체에 평등하고 골고루 미친다는 의미라고 한다. 이 금강계단의 구조와 구성을 쉽게 이해하려면 널찍한 기단과 그 중앙에 모셔진 진신사리탑 등 두 부분으로 크게 나누어 보면 좋다. 기단부는 수계식을 열 때 삼사(三師)와 칠증(七證) 등 계를 전수하는 품계 높은 스님들과 계를 받을 스님들이 자리할 수 있도록 두 단의 층을 두어 넉넉한 공간을 만들었다.

기단 주변은 여러 겹의 난간이 둘러쳐져 있어 바깥과의 경계를 두었다. 기단의 가장 긴 쪽이 850㎝에 이르니 다른 곳의 금강계단에 비해 규모가 꽤 큰 편이다. 기단은 다시 대석·면석·갑석으로 구성되는데, 면석마다 여러 다양한 무늬장식을 새겨서 장엄했다. 조각은 불상과 여러 신장상 등인데 하나하나 모두 아주 솜씨 좋은 작품들이다. 계단이라는 웅장함과 엄숙함에 가려져 이 조각들의 가치가 제대로 조명되지 못하고 좀 소홀하게 다루어진  아쉬움마저 있다. 이 조각들은 대부분 고려시대에 장엄된 것이고 이 중 일부만 조선시대에 새롭게 추가된 것인데 이것 때문에 계단 자체를 조선 중기 이후에 조성된 것으로 잘못 생각하는 경우도 있다.

하층기단의 네 면에는 난간을 둘렀던 것으로 보이는 석주가 남아 있다. 난간석은 근래에 보완했지만 석주는 완연한 고려시대 작품이다. 석주에는 인왕상으로 보이는 조각이 새겨졌는데 얼굴 표정이 아주 섬세하고 실감나게 만들었다. 고려시대 불교미술 중에서도 압권이 아닌가 한다. 그 안쪽 난간의 네 모서리에 사천왕상을 세워 여기를 지나는 사람들로 하여금 한 겹 더 부처님 가까이 다가갔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 그런데 이 사천왕상은 호법신중이라고 해야 옳은 표현일 텐데, 문화재청 설명이나 많은 학술서에 한결같이 ‘수호신’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건 문제다. 얼핏 보면 비슷한 말 같지만 이 두 단어는 사실 개념이 많이 다르다. 수호신이란 우월한 존재가 상대적으로 연약한 상대를 지켜준다는 의미이고 호법신중은 법, 곧 부처님을 따르며 불세계를 옹위한다는 뜻이다. 사소해 보이지만 본질은 다르다. 불교미술사에서 의미가 전혀 다른 단어나 용어가 정제되지 않고 쓰이는 풍조는 어서 고쳐져야 한다.

▲ 금산사 금강계단 석종.

계단의 중심에는 한 장 돌로 기단을 마련하고 그 위에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신 탑(보물 26호)을 세웠다. 그런데 이 탑에 대해서도 ‘석종형(石鍾形) 부도’라고 잘못된 명칭을 쓰고 있다. 금강계단은 진신사리를 봉안하고 있으니 이는 분명히 ‘불탑’이지, 승려 사리를 봉안한 ‘부도’가 아니다. 또 조선시대에 나타난 부도의 한 형태인 석종형에 따라 그렇게 부르는 것도 잘못이니, 이런 형태는 인도에서 유래한 스투파이지 조선시대의 석종형 부도와는 전혀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잘못된 설명으로 인해 사람들이 이 금강계단을 ‘조선시대에 세워진 부도’로 알고 있으니 어서 바로 고쳐야 한다.

▲ 금산사 금강계단 석종 정상의 구룡.

탑의 기단 모서리에는 사자(獅子)의 머리를 크게 새겼는데 이는 불법을 지키는 용맹 정신을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 상층기단 중심에 꽃잎이 밑을 향하고 있는 연꽃을 죽 둘러서 새기고 이 위에 진신사리 탑을 세웠다. 그런데 이 탑의 상단에 꽃무늬가 장식된 띠를 빙 둘러 새긴 것은 부분적으로 상원사 범종(725년)이나 성덕대왕신종(771년) 같은 신라시대 범종을 참고한 디자인 같다. 이 탑의 가장 독특한 부분은 정상 바로 아래에 아홉 마리 용을 조각해 ‘구룡토수(九龍吐水)’를 상징한 점이다. 구룡토수란 석가모니가 태어났을 때 아홉 마리 용이 하늘에서 내려와 물을 뿜어 목욕시켰다는 고사를 말하니, 구룡은 이 금강계단에 석가모니의 진신사리가 봉안되어 있음을 아주 잘 표현한 장엄인 것 같다. 그리고 탑 꼭대기에는 별개의 돌로 앙련을 섬세하게 조각하고, 그 위에 복발과 보주를 얹어 금강계단의 아름다움을 완성했다.

646년에 자장율사가 통도사를 창건할 때 함께 지은 금강계단이 가장 이른 예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우리나라 금강계단의 근원은 무엇일까? 금산사나 통도사의 금강계단은 형식이 일정하다. 먼저 널찍한 상하층의 이중기단을 둔 다음 그 주변에 난간을 둘러 구획하고, 기단 중앙에는 지붕이 돔(Dome)처럼 둥근 스투파 형태의 탑을 세운 모습이다. 고고학자들은 이런 구성의 원류를 1세기 인도 쿠샨 왕조에서 찾는다.

▲ 우즈베키스탄의 파야츠테파(Fayaztepa).

쿠샨 왕조는 전성기인 3세기에 중앙아시아를 중심으로 그 서쪽인 파르티아, 곧 지금의 페르시아 지역까지 세력을 넓혔다. 그 때 지은 스투파 중에서 우리나라의 금강계단과 기본 구도가 아주 비슷한 경우가 많이 있는 것이다. 최근 우리나라가 펼치고 있는 ‘유라시아 이니셔티브’ 정책에 따라 중앙아시아 각국과의 인적·문화적 교류가 활발한데, 최근 한국을 찾은 한 전문가는 우즈베키스탄의 파야츠테파(Fayaztepa) 스투파 유적과 금산사 금강계단 기단의 모습과 축조 방식이 기본적으로 서로 비슷하다는 것을 지적하기도 했다. 또 중앙 탑신의 정상 바로 아래에 용이나 사자를 장식한 모티프라든지 기단의 난간과 모서리 등에 베풀어진 장식도 의장(意匠) 면에서는 일맥상통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지금의 금산사 금강계단은 고려 때 지었지만, 이것은 중창한 것이고 어쩌면 그 시원은 자장율사가 금산사를 창건할 당시로 올라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추정도 할 수 있다.

금산사 금강계단을 신앙 면으로 볼 때 미륵불이 머무르는 도솔천의 세계를 표현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금산사가 미륵신앙의 근본도량인 것은 앞에서도 말했는데, 이런 미륵신앙 구현의 결정체가 바로 이 금강계단이라는 것이다. 미륵불의 하생처(下生處)가 금산사 미륵전이고 공간적으로 그 보다 위에 있는 금강계단은 곧 미륵보살이 도솔천으로 상생(上生)한 것을 상징한다는 생각이다. 금산사와 미륵신앙을 연계시켜 금강계단의 의미를 연구한 것으로서 경청할 만한 이야기인 것 같다.

작품의 현상과 아름다움을 이해할 때 이론적 설명보다는 번뜩이는 문학적 감수성이 실체에 더 잘 접근되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조선의 대시인 매월당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이 금산사 금강계단을 참배하고 남긴, ‘하늘 높이 솟은 별 금찰(金刹, 금산사)을 밝히고/바람과 우뢰 석단(石壇, 금강계단)을 감싸 안네’ 라는 시구가 바로 그런 예인 것 같다. 금산사가 뭇 사찰 중의 으뜸이고 그 안에 금강계단이 우뚝한 위용을 시로써 잘 표현했다.

금산사는 올해로 창건 1416년이 되었다. 창건 이래 지금까지 이렇게 긴 역사 동안 법등을 밝혀 오는 절은 한 손으로 꼽을 만큼이다. 문화재로 보더라도 우리나라 미륵신앙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미륵전을 비롯해서 당간지주·금강계단·오층석탑·석련대·육각다층석탑·석등·노주 등 그야말로 우리 불교문화재를 대표하는 훌륭한 국보와 보물들이 가람 곳곳에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한 절에서 이렇게 많은 문화재들을 감상할 기회는 흔치 않다. 또 각각의 작품마다 그와 관련된 전설과 숨은 이야기들이 오롯이 전해오고 있어 이 작품들을 감상하다보면 책에 기록되지 않은 금산사의 또 다른 역사를 알아가는 즐거움도 있다. 특히 금강계단은 구성과 형식의 원류가 고대 인도, 특히 중앙아시아 스투파 유적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다. 이 금강계단을 통해 우리 불교문화의 원류를 좀 더 멀리까지 넓힐 기회를 얻을 지도 모르겠다.

신대현 사찰문화연구원 대표 buam0915@hanmail.net


[1305
호 / 2015년 8월 1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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