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38. 하퍼 리의 ‘앵무새 죽이기’

기자명 이미령

모순·편견 가득한 비겁한 세상, 무고한 앵무새를 죽이다

'앵무새 죽이기'
하퍼 리
김욱동 옮김
열린책들
1960년 소설가 지망생인 한 여성의 첫 번째 장편소설이 미국과 영국에서 출간됩니다. 그리고 이 작품은 이듬해 이 35살의 작가에게 퓰리처상을 안깁니다. 세상에 처음으로 내민 작품으로 엄청난 상을 거머쥐게 된 것이지요. 그 작품의 이름은 바로 ‘앵무새 죽이기(원제, To Kill a Mockingbird)’입니다.

35세 작가의 첫번째 장편소설
퓰리처상 수상 영광 안긴 작품
경제대공황 겪던 1930년 미국
여섯살 소녀 스카웃의 성장기

흑인 향한 사회적 차별 속에서
정의·양심 지키려는 아버지
흑인 변호 맡았지만 결국 유죄

이웃의 질시·위협 당하면서
올바르게 세상 보는 법 배워

원제에 등장하는 모킹버드(Mockingbird)는 앵무새(parrot)가 아니라 흉내지빠귀라고 합니다. 다른 새를 흉내 내며 따라 울기를 잘 하는 새라고 하지요. 하지만 이 소설이 우리나라에 처음 번역되었을 때 앵무새가 흉내를 잘 내기 때문에 그냥 ‘앵무새’로 옮겼다고 합니다. 작품 속에서는 이 새가 “인간을 위해 노래를 불러줄 뿐이지 사람들의 채소밭에서 뭘 따 먹지도 않고, 옥수수 창고에 둥지를 틀지도 않고, 우리를 위해 마음을 열어 놓고 노래를 부르는 것 말고는 아무 것도 하는 게 없는” 존재이며, 따라서 이런 새를 죽이는 건 “죄가 되는 것”이라는 마을 중년부인의 말 속에서 등장합니다.

이 소설은 1960년에 출간됐지만 작품 속 배경은 1930년대 중엽 미국 남부 앨라배마 주의 메이콤이라는 가상의 작은 마을입니다. 1930년대라고 하면 미국이 경제대공황을 겪던 때입니다. 인심이 각박하던 시기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그리고 미국 남부라고 하면 인종차별이 극심하던 곳이라고 짐작하기도 어렵지 않습니다. 여전히 백인들은 자기들만의 세상에서 어깨에 힘을 주고 흑인들을 억압하고 그 위에 군림하며 지내던 시기였고 그런 장소였습니다.

작품의 주인공은 여섯 살 말괄량이 소녀 스카웃입니다. 스카웃은 일찍이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로 아빠 애티커스와 네 살 위인 오빠 젬, 그리고 가사도우미인 흑인 여성 캘퍼니아 아줌마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 일러스트=강병호 화백

말괄량이 소녀 스카웃은 네 살 위인 오빠 젬, 그리고 남자친구 딜하고만 어울립니다. 이 셋은 늘 붙어 다니며 온갖 말썽을 부립니다. 궁금한 것은 참지 못했고, 연극거리를 만들어서 즉석에서 공연도 펼쳐보고, 들판을 뛰어다니고 나무를 오르내리며 온 종일을 보냅니다. 그 중에서도 이 아이들의 호기심을 가장 많이 자극하는 건 근처에 있는, 사연 많은 래들리 씨네 집입니다. 동네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고 두문불출하는 지라 아이들의 호기심과 상상력은 커져만 갔고, 그래서 틈만 나면 조용한 이 집을 염탐해서 어떻게 해서라도 래들리를 집 밖으로 끌어내려고 안달입니다. 세상에 절대로 해를 끼치지 않는 이웃에게 악동 셋은 너무나 가혹한 침입자입니다. 제목 속의 ‘앵무새’는 어쩌면 이 래들리일 수도 있습니다.

한편, 말괄량이 소녀 스카웃은 언제부터인가 마을 사람들의 분위기가 묘하게 달라지고 있다는 걸 눈치 챕니다. 평소 친하던 마을 사람들이 아빠를 불러내어 험악한 분위기를 연출하는가 하면, 심지어는 이런 욕도 듣습니다.

“스카웃, 네 아빤 깜둥이 애인이야.”

이런 욕설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건 바로 아빠가 새로 맡은 일 때문입니다.

스카웃의 아빠 애티커스는 능력 있는 백인 변호사입니다. 굳이 ‘백인’이라는 말을 붙인 이유는 좀 특별한 사건을 그가 맡았기 때문입니다. 톰 로빈슨이라는 젊은 흑인이 백인 여성을 성추행했다는 혐의로 고소되었고, 법정에 선 그를 변호하는 임무를 바로 스카웃의 아빠인 애티커스가 맡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에는 흑인 하나쯤이야 아무렇지도 않게 없애버릴 수 있었습니다. 백인들은 그렇게 생각하며 지내던 시대였습니다. 흑인들은 지저분하고 무식하고 윤리적이지 못하고 성적인 충동을 조절하지 못하는 철부지요, 잠재적인 범죄자라고 인식하던 시절, 톰 로빈슨이라는 흑인 남성이 범인으로 붙잡힌 것입니다. 그것도 ‘감히’ 백인 여성을 ‘성추행’했다는 혐의로 말입니다. 하지만 이런저런 정황상 그는 무죄가 틀림없었습니다. 스카웃의 아빠인 애티커스 변호사 역시 그의 무죄를 믿어 의심치 않았고, 계속 되는 재판과정을 통해 배심원들조차 톰 로빈슨의 무죄를 인정하는 분위기였습니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과 그 시대는, 흑인의 피를 원했습니다. 흑인은 죽어야 했습니다.

왜냐고요? 백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건 상식이고 윤리였습니다, 적어도 그 시절 미국 남부 앨라배마주에서는요. 죄 없는 한 사람의 목숨이 달려 있어도 소용없습니다. 그저 수많은 깜둥이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애초 래들리씨가 악동들에게 일종의 ‘앵무새’였다면, 당시 사회에서는 무고한 흑인들이 ‘앵무새’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백인들에게 전혀 해를 끼치지 않는 존재요, 그저 제 몫의 일을 묵묵히 해낼 뿐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앵무새와 같은 흑인을 희생해서 뭘 얻으려고 하는 것일까요? 마치 악동 셋이 조용히 은거하고 있는 래들리씨를 끊임없이 괴롭혀서 지루함을 달래려는 것처럼 저들도 뭔가 바라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백인 변호사인 스카웃의 아빠가 톰 로빈슨을 변호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고 아빠가 흑인을 동정하는 건 아닙니다. 힘없는 약자를 향한 동정 이전에 정의와 양심의 문제라는 것이 아빠의 입장입니다. 마을 사람들은 이런 애티커스 변호사의 입장을 더더욱 이해하지 못합니다. 대체 흑인에게 무슨 정의와 양심을 들이댈 수 있느냐며 쓸데없는 시간낭비를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빠는 꿈쩍도 하지 않습니다. 정의는 이긴다는 믿음이 워낙 확고하기 때문입니다.

아빠의 이런 인생관은 자녀들을 향한 교육에도 고스란히 적용됩니다. 아빠는 두 아이를 자유롭게 키우면서도 남에게 피해를 입히지 않고, 자신이 한 일에 대해서는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하고, 앙갚음 같은 것은 하지 말도록 가르칩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은 똑같이 소중한 존재이며, 그 누구도 다른 사람을 억압할 수는 없다고 누누이 일러줍니다. 때로 아빠의 이런 교육은 어린 남매에게는 부당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동네에 혼자 살고 있는 듀보스 할머니가 젬과 스카웃을 향해, 남매의 아빠가 깜둥이들 변호나 하고 있으니 “네 아빠는 자기가 도와주고 있는 그 쓰레기 같은 깜둥이들보다 나을 게 없다”는 폭언을 퍼부은 것입니다.

젬은 옳은 일을 하는 아빠를 모욕한 할머니를 용서할 수가 없었습니다. 할머니가 애지중지 여기는 정원의 동백꽃들을 죄다 꺾어버리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빠는 아들 젬에게 할머니에게 가서 정중하게 사과드리고 요구하는 건 뭐든 들어드리라고 일러준 뒤에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에게는 분명히 그렇게 생각할 권리가 있고, 따라서 그들의 의견을 충분히 존중해줘야 해. 하지만, 난 다른 사람들과 같이 살아가기 전에 나 자신과 같이 살아야만 해. 다수결에 따르지 않는 것이 한 가지 있다면 그건 바로 한 인간의 양심이다.”

분명 아빠의 생각과 행동이 옳고, 마을 사람들이 틀렸습니다. 하지만 스카웃의 아빠는 자신의 생각을 정의의 잣대로 삼지는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저 스스로가 생각해서 양심에 따라 움직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스카웃의 오빠 젬은 심술궂은 듀보스 할머니에게 사죄하고 잘못에 대한 대가를 치렀지만 더 이상 억울한 마음은 없습니다. 이런 길을 일러준 아빠가 믿음직스럽고 자랑스러울 뿐입니다.

그렇다면, 무고하게 성추행범으로 몰린 톰 로빈슨은 어찌 되었을까요? 그는 유죄로 확정되었습니다.

세상이 그런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진실이 빤히 두 눈을 뜨고 우리를 들여다보고 있는데 우리는 애써 외면합니다. 그게 세상입니다. 그 속에서 진실의 시선을 정면으로 마주보고 받아들였던 아빠는 쓰라린 패배를 맛봐야했습니다. 하지만 어른들의 부당함을 따지는 어린 아이들에게 아빠는 이렇게 말합니다.

“배심원들은 (이번) 평결을 내리는 데 몇 시간이나 걸렸어. 어쩌면 필연적인 평결이었기 때문일 거야. 하지만 보통 때라면 단지 몇 분이면 충분하거든. 그런데 이번엔….”

지금은 진실이 졌지만 언젠가는 이길 것이요, 이미 이번 재판에서 그 시작의 기미를 보았다는 데에 아빠는 큰 의미를 두는 것 같습니다.

여섯 살 말괄량이 소녀 스카웃은 이런 소동과 혼동 속에서 3년을 지냅니다. 그리고 스카웃이 아홉 살이 되던 해 오빠는 린치를 당하기도 하지만 이 모든 일들을 겪으면서 스카웃은 자신이 “부쩍 자라났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세상에 나아가 배워야 할 것들을 그 3년 사이에 다 배운 것이라는 말이지요. 소녀가 자기 마음의 키가 한 뼘은 자라난 것을 알아채면서 소설은 끝이 납니다.

하퍼 리의 소설 <앵무새 죽이기>는 이와 같이 한 소녀의 성장소설입니다. 편견과 차별이 여전히 힘을 갖고 있는 세상에서 서서히 눈을 떠가는 소녀. 바른 것과 그른 것을 구별해내는 지혜를 기르고, 바른 것을 향해 뚜벅뚜벅 나아가는 담금질이 이 소설에는 담겨 있습니다. 이 소설이 1960년에 출간되었음에도 지금까지도 미국에서 커다란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이유는 바로 이것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 아이들은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어떤 관점에서 바라봐야 하는지를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옳은 것을 위해 힘차게 나아갈 때 자신의 반대편에 서 있는 자들의 입장도 정당하게 바라볼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한다는 걸 배워야 합니다. 스카웃이 아빠에게서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배웠듯이 이 작품을 통해서 우리는 그걸 배울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강한 자에게 약하고 약한 자에게 강한 자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애꿎은 앵무새에게 화풀이를 해대서 앵무새만 죽이고 있지요. 이런 모순의 세상이기에 하퍼 리의 오래된 이 작품은 여전히 사람들의 필독서인 것이요, 영원히 읽혀야 할 작품입니다.

이미령 cittalmr@naver.com


[1305
호 / 2015년 8월 1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