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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자비-중

절대평등의 경지서 잠재 부처들이 나누는 ‘우정’

▲ 일러스트=김주대 문인화가·시인

자비도 사랑도 동정이나 연민으로 쉽게 오인된다. 그것은 남들에 대한 동정이나 연민이 남들에게 자비의 마음을 내는 감정적 요인이 되는 것이 흔하기 때문일 것이다. 남들의 고통에 대한 연민이 ‘나를 넘어선’ 사랑, 혹은 ‘윤리’의 본질이라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 가령 프랑스 철학자 레비나스는 ‘고통 받는 얼굴을 하고 있는 타인’들을 철학의 중심으로 끌어들인다. 누군가 옆에서 고통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으면, 대개는 어느새 그 고통에 연민을 느끼며 그것을 덜어주고자 하는 마음이 일어나게 된다. 그러나 그 고통은 ‘타인’의 고통이기에, 내가 근본적으로 알 수 없는 어떤 것이다. 그런데 고통을 덜어주려는 마음이, 결코 근본적으로는 알 수 없는 타인을 향해 나아가게 한다. 그것은 기존의 ‘나’가 갖고 있는 생각이나 감정을 넘어서지 않고선 불가능하다. 내 생각에다 남의 고통을 갖다 맞추는 것은 타인에 가하는 또 한 번의 ‘폭력’에 지나지 않는다. 이처럼 내가 알 수 없는 타인의 고통, 그 타자성을 향해 ‘나’를 넘어서는(‘초월’) 것이 바로 ‘윤리’가 시작되는 지점이다.

동정·연민은 주고받는 자의
지위의 차이가 전제되지만
자비는 중생에 대한 평등심서
시작된다는 점에서 서로 달라

가까이 있는 이웃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내가 충분히 알 수 없을 만큼 멀리 떨어져 있는 ‘타자’에 대한 연민과 사랑, 그것이 레비나스가 말하는 ‘타자의 윤리학’의 요체다. 물론 타자라는 게 근본적으로 알 수 없는 것이라면 타자의 고통 또한 알 수 없는 거 아니냐고 비판할 수도 있을 것이고, 진정 알 수 없는 게 타자라면 나를 넘어가도 고통을 겪는 그의 마음에 이르지 못할 것이고 그의 고통을 덜어줄 수도 없지 않겠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레비나스 철학의 근본적인 난점이다. 하지만 그것 못지않게 거리감을 느끼게 되는 건 고통과 연민이 특권화 되어 있다는 점이다. 고통을 덜어주려는 공감 못지않게 기쁨을 주려는 마음 또한 중요한데, 그것은 개념적으로 처음부터 배제되어 있다. 연민이라는 개념을 통해서 보이는 타인들이란 모두 ‘고통 받는’ 불쌍한 사람들(레비나스는 과부, 고아, 빈민 등을 예로 든다)뿐이다. 반면 달라이라마는 인간 아닌 것을 포함하는 “모든 중생이 나와 마찬가지로 기쁨을 얻고자 하고 고통을 피하고자 함을 인식하는 것”으로부터 평등한 자비심이 나온다고 말한다. 연민의 감정이 아니라 중생에 대한 인식이 오히려 강조되어 있다. 기쁨을 말하니 자비심의 색조 역시 동정과 연민의 어두운 색만은 아닐 것이다. 세간의 삶에서 고통은 피할 수 없지만, 중생은 불쌍하고 무력한 존재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부처’가 될 능력을 가진 존재인 것이다.

자비는 물론 고통 받는 중생들에 대한 공감이나 연민을 포함할 것이다. 니체는 동정이나 연민을 비판하지만, 당장 필요로 하는 것을 들고 달려가는 연민이 필요한 이들이 있음을 어찌 부정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그게 다가 아님은 분명하다. 기쁨을 추구하는 이들에게 기쁨을 주고 웃고자 하는 이들에게 웃음을 주는 것도 자비행의 중요한 일부일 것이다. 하지만 이와 다른 근본적인 차원의 자비가 있는 것 같다. 무아와 훨씬 더 가까이 잇닿아 있는 자비의 개념이.

그것은 모든 중생이 부처가 될 수 있는 잠재적 능력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평등하다는 인식에서 나온다. 인간 아닌 것이 불성이 있는지, 생명이 없는 것이 불성이 있는지를 둘러싼 유명한 논쟁이 있었지만, 지금은 대체로 모든 중생이 불성을 갖고 있음을 인정하는 것 같다. 그 불성을 ‘참나(眞我)’라고 부르는 것에는 동의하기 쉽지 않지만, 그것을 연기적 조건이 달라짐에 따라 다른 존재자로 현행화 될 수 있는 잠재력이라고 이해한다면, 굳이 생명체로 국한하지 않아도 모든 중생이 불성을 갖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중생이 바로 부처”라는 말을 나는 이런 의미로 이해한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모든 중생은 ‘부처’라는 점에서 평등하다. 부처에 높고 낮음과 멀고 가까움이 어디 있으랴! 자비의 평등심은 부처 간의 평등성에서 나오는 평등심이다. 자비란 모든 중생들에 대해서 부처로서 평등하게 대하는 것이다. 친하든 낯설든, 멀든 가깝든, 심지어 친구든 적이든, 모두가 부처라면, 모두를 부처로서 평등하게 존중하고 도와주는 것, 그게 바로 또한 잠재적으로 부처인 내가 마땅히 행할 바일 것이다. 즉 자비란 스스로가 부처로서, 자신과 만나는 모든 잠재적 부처들에 대해 갖는 마음이고 그들에 대해 행하는 바다. 그렇다면 자비란 잠재적 부처인 모든 중생과 또한 잠재적 부처로서의 내가 맺는, 존재론적 차원의 우정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아직 부처로 현행화되지 못한 모든 중생들이 기쁨을 얻고자 함에 응하여 기쁨을 주려하고, 고통이나 슬픔을 덜고자 함에 응하여 슬픔을 덜어주려는 잠재적 부처의 사랑이 자비행이다. 그렇다면 자비란 모든 중생에 대해 잠재적 부처인 내가 평등하게 행하는, 존재론적 차원의 사랑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모두가 부처임을 보는데서 나오는 이런 우정이나 사랑은 연민이나 동정과는 거리가 멀다. 동정이나 연민에는 주는 자와 받는 자의 비대칭성이, 제거할 수 없는 지위의 차이가 전제되어 있다. 그것은 상대적으로 남보다 ‘나은’ 처지에 있는 이가 자신보다 ‘낮은’ 처지에 있는 이에게 느끼는 감정이다. 그것은 평등한 관계가 아니라, 있는 이가 없는 이에게 주는 것이고, 높은 위상을 갖는 이가 낮은 위상을 갖는 이에게 ‘베푸는’ 것이다. 이방인에 대한 환대 또한 그렇다. 갈 곳 없는 이주자, 쫓기는 이방인들에게 내미는 환대의 손길은 그를 손님으로 맞이하는 주인이 행하는 것이다. 손님이 주인을 환대할 순 없는 것이다. 부자들이 자신에 대한 빈민의 동정을 감사하게 받아들일 가능성은 별로 없다. 화를 내지 않으면 다행이다. 마찬가지로 쫓기는 이주민이 주인에게 환대를 해줄 순 없는 것이다. 따라서 동정이나 환대는 평등성과는 거리가 멀다. 반면 동등한 위치가 가정된 친구 간의 관계에서, 한 사람이 어려워서 도와줄 때에도 그것은 동정이나 연민과는 거리가 멀다. 그건 그런 조건에서 두 친구 간의 평등한 우정이 행해지는 한 양상일 뿐이다. 사랑 또한 다르지 않다. 동정과 사랑을 구별하지 못했을 때 발생하는 후과에 대해선 길게 말하지 않아도 잘 아는 바일 것이다.

모든 중생은 잠재적 부처라는 점에서 평등하지만, 현행의 현실에선 그렇지 않다. 조건에 따라 다른 지위와 규정을 갖고 살아간다. 그렇기에 현행화 된 세간에서는 조건에 따라 많고 적음, 멀고 가까움, 높고 낮음이 교차하며 자비행이 행해지게 마련이다. 그래서일 것이다. 불교에서는 상이한 차원의 자비를 구별한다. 중생연자비(衆生緣慈悲)와 법연자비(法緣慈悲), 무연자비(無緣慈悲)가 그것이다. ‘중생연자비’는 고통스러워하는 중생의 현실적인 모습을 보고 연민의 마음을 일으켜서 행하는 자비다. 이는 고통과 번뇌를 통해 행해지는 것이니, 번뇌를 끊지 못한 중생이 행하는 자비라 하겠다. 중생이 다른 중생과의 관계 속에서 행하는 자비다. 동정이나 연민은 이런 자비의 범주 안에 들어갈 것이다. 그러나 고통과 연민 없이 기쁨을 주는 것도 여기에 들어갈 것이다.

‘법연자비’는 일체제법을 깨닫고 행하는 자비다. 자연의 법칙이나 세간에서 작동하는 마음의 법칙을 깨달은 이가 행하는 자비행이다. 자기와 가까운 이웃이나 멀리 떨어진 이웃 모두에게 평등심을 갖고 대하려 하고, 생각이나 감각이 자신과 가깝든 멀든 남들과의 만남에서 언제나 기쁨의 증가와 슬픔의 감소를 추구하는 자비행이 여기에 들어갈 것이다.

‘대자대비’라고도 불리는 ‘무연자비’는 온갖 차별된 견해를 여읜 절대평등의 경지에서 제법의 진여실상(眞如實相)을 깨달은 이가 행하는 자비다. 현행화 된 연을, 연기적 조건을 거슬러 올라가(無緣) 모든 중생이 잠재적 부처라는 점에서 절대 평등함을 깨달은 이가 행하는 절대적 자비행이다. 다른 모든 중생이 부처임을 알고, 그들과 부처로서 만나고 응대하며 부처 간의 우정을 나누는 것이 그것일 게다.

이진경 서울과학기술대 교수 solaris0@daum.net
 


[1305
호 / 2015년 8월 1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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