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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자비-하

악행을 저지른 자도 부처의 삶으로 이끄는 것

▲ 일러스트=김주대 문인화가·시인

모든 중생들에게 기쁨을 주고 슬픔을 덜어준다는 건 얼마나 아름답고 소박한 꿈인가? 그건 모든 이들이 서로 도우며 사는 세상만큼이나 아름답지만 소박한, 불가능한 몽상 아닌가? 왜냐하면 우리가 실제로 사는 세상은 경쟁과 적대로 가득 차 있고, 심지어 가까이 이웃한 이들과도 다투고 충돌하는 걸 피할 수 없는 그런 곳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웃이라도 사랑하라고, 아니 가족이라도 좀 사랑하라고 호소해야 하는 게 차라리 현실적인 곳이 바로 세상 아닌가! 거기서 모든 중생을 평등하게 사랑하는 말이나, 모든 중생을 부처로 응대하고 부처로서의 우정을 나누라는 말은, 산속에서 술 마시며 신선놀음 하는 거 아니냐고 해야 하지 않을까?

자비란 이웃에게 기쁨을 주고
고통을 덜어주는 것만이 아닌
악행을 지은 자가 스스로 알아
악업을 최소화하도록 돕는 것

좀 더 난감한 것은 자비와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응대하는 것이 결코 좋다고 믿기 어려운 그런 상황일 것이다. 며칠 전 변호사가 된지는 좀 되었지만 형사재판은 처음 맡았다는 후배의 하소연을 들었다. 인권운동을 하며 없는 자, 핍박받는 자들을 위해 활동하며, 여러 집회나 투쟁의 책임을 기꺼이 떠맡아, 그 덕에 수도 없이 감방에 드나드는 분의 변호를 맡았다는 말은 전에 들은 적 있는데, 며칠 전 그 양반 영장심사 때문에 변호인단의 일원으로 법원에 갔다는 것이다. 구속의 이유를 대는 공안검사의 어이없는 얘기를 들으면서, 몇 번이나 ‘빡쳐서’ 미칠 것 같았다고 한다. 결국 구속영장이 발부되었다는데, 이 착하고 온순한 친구는 법원에서 자신의 눈으로 확인한 불의에 대한 실망과 분노로 며칠을 술을 푸며 한탄어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이 친구에게 모든 중생에게 평등하게 자비를 행하라고 한다면, 놀라서 물었을 것이다. 이렇게 없는 자들을 핍박하고 남을 위해 헌신하는 이들을 어이없는 말로 비난하고 구속하는 저 공안검사에게도 똑같이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는 건가요?

이웃을 사랑하라고 가르쳤던 예수가 ‘원수를 사랑하라’고 했던 것은, ‘멀리 떨어진 이를 사랑하라’는 니체의 말을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그러나 철거에 대항하다 불에 타 죽은 가족을 범죄자라고 비난하며 기소하는 검사에게 자비의 마음을 가지라고 용산 철거민들에게 말하기는 결코 쉽지 않다. 입으론 정의를 말하지만, 권력자의 편에 선 이들에겐 엔간하면 면죄부를 주고 그 반대편에 있는 이들은 엄혹하게 처벌하는 검사들에게 자비행을 하라고 한들, 씨도 먹히지 않을 것 같다. 이런 사례가 정치적으로 편향되었다고 한다면, 옆에서 강도질을 하는 이들에게 ‘기쁨을 주고 슬픔을 덜어주는’ 자비행을 말할 수 있을까 바꿔 물을 수 있을 것이다. 이 경우 자비란 오히려 세상을 지배하는 기회주의와 질 나쁜 이기주의, 혹은 알고도 행하는 악에 대해서조차 용서하고 받아들이라는 정신없는 선행 아닌가? 그건 세간의 악덕과 비천함을 확산시키는, 의도치 않은 공범이 되는 거 아닌가?

자비의 가르침도, 사랑의 가르침도 이런 질문을 피할 순 없을 것 같다. 자비를 근본적인 차원에서 사유해야 하는 것은 오히려 이런 이유에서다. 자비란 내가 만나는 이들에게 직접적인 기쁨을 주거나 당장의 고통을 덜어주는 것만은 아니며, 많은 이들을 고통스럽게 하는 이들에게 공감하고 동조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진정한 자비란 악행을 행하는 그들이 부처로서의 잠재성을 향해 거슬러 올라가게 하는 것일 게다.

꽤나 긴 시간 동안 공동체를 하면서 체험한 것인데, 공동체란 선물을 통해 인간관계를 형성하지만, 공동체 안에서조차 선물은 잘못하면 사람들의 의존성을 만들고 그들을 무능하게 만든다. 여러 가지 선물이 있지만, 최고의 선물은 선물하는 마음, 선물하는 능력을 선물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선 선물을 하는 것 못지않게 선물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심지어 선물하지 않거나 선물을 그저 받기만 하는 것으론 불편한 일, 고통스런 일이 발생할 수 있음을 알게 하는 것이 필요하기도 하다.

자비행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눈앞의 누군가를 기쁘게 해주는 것이나 그의 고통을 나서서 덜어주는 것을 무조건 자비라고 할 순 없다. 오히려 그로 하여금 부처라는 말에 근접한 사고와 행동을 하도록 촉발하는 것이 바로 자비행의 요체일 것이다. 악행을 한다고 판단된다면, 그가 지금 하고 있는 악행들, 남에게 고통을 주는 일들로 인해 불편함이나 고통을 느끼도록 해야 한다. 대부분의 경우 저항 없이는 지금 하고 있는 생각이나 행동을 바꾸지 못하고, 고통 없이는 자신의 올바른 삶이 무언지에 대해 생각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저항과 고통이라는 스승을 만나 그들이 부처를 향해 살아갈 수 있도록 반복하여 마찰의 촉발을 일으켜야 한다. 세간에 악행의 업을 쌓는 것을 최소화하도록 해야 한다. 그게 공안검사든, 강도든 간에.

가까이 지내는 초등학교 교사가 한 분 있다. 교육이나 삶에 대한 원칙이 확고하고 특이한데, 타협할 줄 몰라서 고생을 많이 하는 분이다. 며칠 전 이 분에게 인상적인 얘기를 들었다. 자기는 대개 6학년 학생들을 맡는데, 그 나이쯤이면 맡은 학급에 대개는 힘없는 애들을 못살게 구는 ‘나쁜 넘’들이 있게 마련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 때문에 애들 사이에 사고가 발생하거나 분란이 이는 일이 흔하다고 한다. 그런데 옆에선 그 ‘나쁜 넘’도 본성은 착하니 잘 달래야 한다고들 하지만, 자기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단다. 오랜 경험에서 알게 된 것인데, 그런 친구는 습관 때문이든 자잘한 계산 때문이든, 나쁜 삶의 습성을 계속하기 마련이고, 좋은 말로 달래봐도 잘 고쳐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넘들을 설득하고 달래는 일은 자기는 하지 않는단다. 대신 그 넘 때문에 고통 받는 아이들을 만나 말한단다. 너희들이 그냥 당하고 살면 쟤도 너희도 평생 이런 식으로 살 거라고. 너희들이 모여서 그런 넘에게 대항하고 싸우고 해야 너희들이 겪는 고통도 줄어들고, 저 넘도 저런 식의 삶을 고치게 될 거라고. 그게 너희들을 위한 길이고 저 넘을 위한 길이라고.

옆의 교사들이 들으면 경악할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 분의 언행이, 미움의 감정에 따른 것이 아니라면, 악행을 반복하는 학생에 대해 적절한 자비의 행이 될 거라고 믿는다. 자비란 어떤 대상에게 듣기 좋은 말을 하거나 당장 기쁨을 주는 언행을 하는 게 아니다. 그가 좋은 삶을 살고 훌륭한 능력을 갖도록, 때로는 칭찬하지만 때로는 경책하며, 때로는 설득하지만 때로는 이 짓을 계속해선 안되겠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도록 적절한 고통을 주는 것이 적절한 자비행이다. 불교식으로 말하면 누군가가 자신의 불성을 보고 부처가 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는 촉발을 제공하는 것, 그게 자비행이다. 많은 이들이 사랑하는 이의 죽음 같은 큰 고통 속에서 수행을 시작하게 되고, 견디기 힘든 고통 속에서 자유로운 삶을 위한 각성의 계기를 얻는 것을 안다면, 때로는 안타깝지만 그런 고통을 제공하는 것이 진정 그에게 최대의 자비를 행하는 것이 될 수 있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다시 의문을 하나 덧붙여야 할 것 같다. 악행을 하거나 부적절한 행동을 하는 이에게 고통을 주거나 마찰을 일으켜 그 관성적인 힘(업력)을 정지시키는 것과 어떤 행동에 대한 분노나 미움, 앙심으로 인해 그에 반발하여 마찰을 일으키고 고통을 주려하는 것은 어떻게 다른가? 악인이나 권력자들의 부당한 행위에 대해서 대항할 때조차, 자비심이 아니라 미움이나 분노의 감정에 의해 행하는 경우가 많지 않은가? 그건 사실이다. 그것을 ‘자비’라고 한다면, 그건 자신의 감정적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한 위선적 개념에 불과할 터이다. 감정적 행위가 대개 분노나 미움 같은 ‘반동적(reactive)’ 감정을 동반하며 그에 의해 이루어진다면, 부처의 마음으로 행하는 자비행은 저 중생이 부처의 삶을 등지는 것을 저지하고 제 방향을 찾아가게 하려는 ‘능동적(active)’ 판단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마찰을 야기하든, 침묵으로 거리를 두든, 최소한 분노나 미움의 감정 없이, 그것이 일어났다면 그것에서 벗어나서 판단했을 때에도 그렇게 했으리라고 확신할 수 있다면, 그것을 감정적 행위와 구별되는 자비행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말해보라, 던진 물음에 제대로 대답하지 못한 제자들에게 있는 힘껏 뺨따귀를 때리기도 하고, 손가락 하나 들어 답하는 걸 따라하던 동자승의 손가락을 잘라버리기도 하고, 고양이들 두고 논쟁하던 학인들 앞에서 고양이의 목을 잘라버리기도 하는 선승들의 행동에서 더없는 자비심이 보이는가?

이진경 서울과학기술대 교수 solaris0@daum.net

[1306호 / 2015년 8월 1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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