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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석승조-하

기자명 성재헌

운문사를 방문할 때마다 문선제는 절문 앞에 내려 군사와 무기를 물리고 직접 걸어서 들어갔다. 그렇게 전각을 일일이 돌며 예배를 마친 뒤, 승조선사의 작은 방으로 찾아가 황제가 아닌 한 사람의 제자로서 예를 올렸다. 이런 일이 잦아지자 신하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고, 그들의 불만이 운문사 스님들의 귀에 전해졌다. 어느 날 저녁, 조바심이 난 제자들이 스승을 찾아갔다.

황제를 일반 불자로 대하자
신하들, 벌 줘야한다 이간질
살기어린 황제 마음 알고도
의연하게 황제 꾸짖은 스님

“스님, 황제께서는 수레에서 내려 직접 스님을 찾아뵙고 있습니다. 하지만 스님께서는 황제를 마중하거나 배웅하신 일이 한 번도 없습니다. 산문까지 나서기는커녕 늘 스님 방에 앉아 일어서지도 않으셨습니다. 한편에서 예의를 모르는 처사라며 볼멘소리가 터지고 있습니다. 이 일로 황제나 신하들이 감정이 상해 좋지 않은 일들이 생길까 걱정입니다.”

그러자 승조가 아이들을 달래듯 말했다.

“내 권위나 높이자고 이러는 게 아니란다. 그건 불법의 권위를 추락시키는 행동이고, 아울러 황제의 복을 감하게 하는 짓이란다. 옛날에 빈두로(賓頭廬)존자를 지극히 공경했던 왕이 있었단다. 그 정성을 갸륵하게 여긴 존자가 어느 날 왕이 찾아온 것을 보고 앉았던 자리에서 일어나 일곱 발자국을 걸어가 왕을 마중했단다. 그 결과 왕의 복이 감해 7년 만에 나라를 잃고 말았단다.”

결국 조정의 신하들이 황제의 처사를 문제 삼고 나섰다.

“황제가 고개를 숙이는 것은 고금에 없는 법도입니다.”
“그분은 나의 스승이시다. 제자가 스승에게 예를 올리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그러자 상서령(尙書令) 양준언(楊遵彦)이 나섰다.

“일개 백성에게 극진한 예의를 보이시는 것은 폐하의 아량과 은혜가 바다처럼 넓기 때문이니, 도리어 칭송받아 마땅한 일입니다. 하지만 백성이 그런 은혜를 입고도 기꺼워할 줄 모른다면 이는 천벌을 받아 마땅한 일입니다. 승조가 자리에서 일어서지 않는 것은 품성이 거만하기 때문이며, 폐하의 극진한 예의에도 고개를 숙일 줄 모르는 것은 폐하를 우습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승조에 대한 온갖 폄훼에도 끄떡 않던 황제였다. 하지만 자신을 “우습게 본다”는 한마디에 벌컥했다. 황제의 눈에서 시퍼런 독기가 흘렀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내일 운문사를 방문하리라. 내일도 일어서지 않으면 그의 목을 베리라.”

바로 그때, 운문사에서 선정에 잠겨있던 승조선사가 갑자기 일어서더니 평생 들어간 일 없던 부엌으로 향했다. 그리고 공양주에게 뜬금없이 말하였다.

“내일 큰 손님이 오실 게야. 공양거리를 넉넉히 준비하게나.”

그리고 다음 날, 새벽 5시쯤 되자 대중 몰래 소달구지를 끌고 혼자서 골짜기를 나섰다. 그렇게 사원에서 20여리쯤 걸어갔을 때였다. 근위대를 앞세운 황제가 마주오고 있었다. 황제가 거만한 태도로 물었다.
 
“스님, 여긴 웬 일이십니까? 이 달구지는 또 뭡니까?”

승조가 황제를 보고 웃었다.

“폐하께서 오시길 기다렸답니다. 이 몸이 피가 깨끗하질 못합니다. 이런 피로 사원을 더럽혀서야 되겠습니까. 제 목은 저 달구지에 실어 절로 보내주십시오.”

속내를 들킨 황제는 깜짝 놀랐다. 그는 얼른 말에서 내려 땅에 엎드렸다. 그의 얼굴에 부끄러움과 후회가 가득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스님, 제 등에 업히십시오. 제가 절까지 모시겠습니다.”

승조가 황제의 등을 가볍게 밀쳤다.

“승려는 마소의 등에 올라도 안 됩니다. 하물며 사람의 등이겠습니까.”
“스님을 업고 천하를 두루 돈다 해도 저의 죄를 다 뉘우치지 못할 겁니다.”

승조는 황제의 손을 잡고 함께 운문사로 돌아왔다. 그리고 예전처럼 자신의 작은 방에서 둘이 마주하였다. 아무런 말씀이 없는 승조에게 황제가 공손히 물었다.

“스님, 제자는 전생에 무엇이었습니까?”
“나찰왕(羅刹王)이었답니다. 그래서 지금도 여전히 살생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왕을 꾸짖는 승조선사의 얼굴에 한 점 두려움도 없었다.

성재헌 동국역경원 역경위원 tjdwogjs@hanmail.net


[1307호 / 2015년 8월 2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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