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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지난 백년간의 사찰림 규모 변화

60년대 이후 큰 폭 감소…생태가치 고양 대비해 보전 나서야

▲ 송광사 연산봉에서 바라본 장막동(현 지명, 장박골). 가운데 능선의 우측 계곡이 장막동이다. 송광사의 연산봉(송광산)과 선암사의 장군봉(조계산) 사이에 있는 장막동의 소유권은 1909년 계곡을 중심으로 나누어졌다.

사찰 숲은 최초로 파악된 1910년 이래 어떻게 변해왔을까? 이 물음에 답을 구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사찰림의 규모 변화 추이를 살펴보는 일이다. 사찰림 규모의 변화 추이는 나라 전체 사찰림과 개별 사찰의 산림면적 변화를 따로 나누어 살펴봐야 하는데, 전체 사찰림 규모는 북녘 사찰림의 상태를 파악할 수 없는 분단 현실이 있고, 개별 사찰의 산림면적은 정보 접근의 한계가 존재한다. 또 다른 접근 방법은 사찰 경제에 끼친 사찰림의 역할 변화와 산림구성(수종, 수령 등)의 추이를 살펴보는 일인데, 모두 간단하지 않은 작업이다. 그래서 비교적 쉬운 사찰림 규모의 변화 추이부터 먼저 살펴보았다.

사찰숲 구체적 면적산출은
일제의 산림정책에 덕분

광복 이후 70년 세월 동안
사찰 소유 30% 이상 감소

동국대학교 설립 과정에서
사찰들 대규모 숲 무상양도

사찰 숲의 경계는 수백년 동안 지속한 금양(禁養) 실적에 따라 대부분 산줄기나 계곡을 기준으로 확정되었다. 지형을 이용한 숲의 경계는 비록 분명했을지라도 개별 사찰의 산림면적을 정확하게 산정하기란 쉽지 않았다. 개개 사찰의 산림면적은 1920년대 시행된 근대적 임야조사 덕분에 제대로 파악되었다. 근대적 소유권이 확립되기 전에도 사찰림에 대한 소유권의 변동 사례가 없지 않았지만, 구체적인 면적을 산정하고 소유권을 확정할 수 있었던 계기는 일제강점기의 산림정책 덕분임을 부인할 수 없다.

나라 전체의 산림규모가 최초로 밝혀진 시기는 통감부의 임적조사가 이루어진 1910년도였고, 사찰림의 규모 역시 같은 시기에 밝혀졌다. 따라서 1910년 이전까지는 전체 사찰림의 규모는 물론이고 개개 사찰이 소유한 산림면적도 가늠할 수 없었다.

통감부에 의해 1910년 시행된 임적조사 결과, 사찰이 관리하는 사찰림 면적은 한반도 총 임야 면적(15,849,619정보)의 1.04%인 164,502정보였다. 사찰이 관리한 이들 산림 중 숲이 울창한 성림지(盛林地) 96,721정보, 어린나무들이 자라고 있는 치수림지(稚樹林地) 34,411정보, 나무가 없는 무입목지(無立木地) 34,270정보로 조사되었다.

사찰의 숫자가 16세기 초엽 1,684개, 18세기 중엽 1535개, 20세기 초엽 1,363개소였음에 비추어볼 때, 개개 사찰이 보유한 사찰림의 평균 면적은 약 100여 정보로 추정되지만 그 편차는 꽤 컸을 것이다. 평북 보현사의 벌채허가원(1939년)에 나타난 사찰림 면적은 48,192정보나 되었고, 반면 단 수 정보의 사찰림만 보유한 사찰도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날도 2,000ha 이상의 산림을 소유한 월정사(5,782ha), 신흥사(3,813ha), 해인사(3,253ha), 표충사(2,160ha), 법주사(2,156ha)와 같은 사찰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사찰이 더 많은 것이 현실이다.

 
사찰림의 면적 변화는 일제강점기와 광복 이후를 나누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일제강점기에 시행된 임야조사사업(1917~1924년) 결과, 전체 사찰림 면적은 임적조사사업(1910년)으로 파악된 사찰림 면적보다 15,000정보 더 늘어난 174,289정보(1930년)로 집계되었고, 1942년에는 189,967정보까지 늘어났다. 사찰림 면적이 증가한 근본적 이유는 임야조사사업 결과 사찰이 예로부터 실질적으로 금양했던 산림의 연고권을 인정받아 사찰림으로 확정되었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에 사찰림의 면적은 대체로 나라 전체 산림면적의 1.1% 선에서 유지됐다.

광복 이후 사찰림 면적은 남북 분단으로 남한의 면적만 산정되었는데 1950년대 중반까지는 면적이 늘었다가 1960년대 이후부터는 꽤 큰 폭으로 줄어들었다. 구체적으로 1946년 87,864정보, 1953년 84,669정보, 1954년 111,583정보, 1955년 118,833정보, 1957년 94,331정보, 1960년 91,951정보, 1968년 74,342정보, 1974년 67,514정보, 2008년 약 63,000정보로 집계되었다.

사찰림의 면적은 1954년과 1955년에 급격하게 증가하는데, 1954년도에만 26,914정보가 증가하여 전체 면적이 111,583정보에 이르게 된다. 이처럼 급증한 까닭은 그 당시 일본 사원이 소유하고 있던 귀속재산을 불교계가 불하받으면서, 귀속재산에 임야도 포함되었기 때문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증대 추세도 잠시일 뿐, 사찰림은 1956년부터 급격하게 감소한다. 학계에서는 이 시기에 진행된 사찰림 감소의 원인으로 농지개혁의 영향을 가장 먼저 들고 있다. 사찰림의 면적 감소 추세는 1960년대 중반에도 진행되었는데 특히 사찰림의 대대적 벌채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일각에서는 이 시기의 사찰경제를 ‘산판(山坂)’ 경제로 규정할 만큼 사찰림의 벌채가 대규모로 이루어졌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사찰경제와 사찰림의 관계는 지면 관계상 다음 기회로 미룬다.

지난 백년간 전체 사찰림의 면적변화 추이에 이어, 개별사찰들의 산림면적 변화 추이는 어떻게 변했을까? 정보 접근의 한계로 인해 확인할 수 있는 개별 사찰이 많지 않지만, 일제강점기와 현재의 사찰림 면적을 비교해 보면 사찰림을 많이 보유한 사찰의 산림면적 변화 추이를 짐작할 수 있다.

먼저 오늘날 가장 넓은 사찰림을 소유한 월정사의 사례를 살펴보자. 일제강점기 1941년 월정사의 벌채허가원에 기재된 사찰림 면적은 5,605정보였고, 2008년도는 5,782정보로 확인되었으니 산림면적은 오히려 180여 정보 더 늘어났다. 반면 대부분 사찰들은 조금씩 더 줄어들었는데, 표충사는 2,178정보(1927년)에서 2,160정보(2008년)로, 해인사는 3,316정보(1937년)에서 3,253정보(2008년)로, 법주사는 2,185정보(1943년)에서 2,156정보(2008년)로 사찰림 면적이 감소하였다. 사찰림 면적이 조금씩 줄어든 이유는 도로확장, 필요시설 증축 등은 물론이고 매도나 교환 등으로 추정할 수 있다.

▲ 1830년 율목봉산의 봉표로 추정한 송광사 사찰림 경계.

▲ 2000년대 산림청 임상도에 나타난 송광사 사찰림 경계.

송광사의 경우 1,572정보(1943년)에서 1,348정보(2015년)로 꽤 넓은 면적이 줄어들었는데, 그 이유는 161정보(송광면 장안리 산2)의 산림을 1964년에 학교법인 동국대학교에 무상으로 양도하였기 때문이다. 동국대학교에 무상으로 양도한 장안리의 산림은 송광사의 연산봉(송광산)과 선암사의 장군봉(조계산) 사이에 자리 잡은 장막골(현 지명 장박골)의 일부로, 1895년부터 1909년에 사이에 10차례나 소유권 송사가 진행되었던 분쟁지이다.

송광사와 유사한 사찰림의 무상양도는 운문사, 월정사, 수종사에서도 이루어졌음을 다음 기사로 확인할 수 있다. “동국재단은 종단 측에 학교 발전을 위해 임야 활용 건의서를 제출, 1963년 11월19일 열린 제5차 중앙종회에서 통과한다. 종회는 다음과 같이 결의했다. 첫째, 동국학원에 무상 양도하기로 결정된 사찰림에 대한 문교부의 승인 수속을 조속히 완료한다. 둘째, 동국학원 재단 임야의 집단화 계획을 통해 지정된 사찰림을 승인하고 그 집단면적 확보에 대하여 적극 협조한다. 셋째, 동국학원 재단 임야의 집단화 계획에서 제외된 임야는 매각 처분하는데 적극 협조한다.”(불교신문 2010년 10월 27일자)

동국대학교의 ‘동국 100년사’에는 “1965년 8월 말까지 전체 임야의 23%에 해당하는 4,000여 정보의 임야가 학교법인으로 이전 등기됐다. 이후에도 이전 작업은 계속돼 강원도 명주군 오대산 일대 1,527정보를 연습림으로 부설한 것”과 “운문산 운길산 오대산 조계산 등 1,500여 정보의 개발 사업에 착수했다”고 밝히고 있다. 전체 사찰림의 면적 감소나 개개 사찰의 산림면적 감소 원인을 헤아려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지난 100년에 걸친 사찰림의 변화 추이를 살펴보고자 시기별 전체 사찰림의 규모를 비교 분석해 보았다. 일제강점기에 큰 변화가 없던 사찰림의 규모는 광복 이후 지난 70년 동안 학교 운영 재원, 농지개혁, 도시개발, 산판사업 등으로 30%나 줄어들었다. 다양한 요인으로 사찰림이 줄어들었지만, 더 이상 사찰림의 감소를 용인하는 것은 불교적 가치 증진을 위해 옳지 않다. 사찰림은 일제강점기에, 6.25 한국전쟁 이후에, 그리고 1960년대에 이르기까지 사찰 재정의 마지막 구원 투수였고, 비상 금고였다. 더불어 사찰림은 생태 가치가 고양되는 미래를 대비한 자연유산임을 상기하고 현 세대뿐만 아니라 다음 세대의 생명자원임을 기억해야 한다.

전영우 국민대 산림환경시스템학과 교수  ychun@kookmin.ac.kr

[1307호 / 2015년 8월 2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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