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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김명국, ‘달마도’

기자명 조정육

캄캄한 밤 어둠 밝히는 등불 하나, 전법의 역사 되다

▲ 김명국, ‘달마도’, 17세기, 종이에 먹, 83×57cm, 국립중앙박물관.

‘아, 원효대사는 동방의 성인인데 비석하나가 없다니….’

의천, 퇴락한 분황사 찾은 뒤
원효대사 업적 선양에 주력
왕에게 시호 내려줄 것 건의
‘대성화쟁국사’ 추봉에 일조

원효대사의 흔적을 찾아 분황사를 찾은 의천(義天,1055~1101)은 안타까움으로 가슴이 미어졌다. 퇴락한 분황사에는 무성한 풀만 자라고 있었다. 의천은 대웅전에 들어가 제수를 갖추고 제문을 읽었다. 제문을 읽는 의천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런 의천을 진흙으로 빚은 원효대사의 소상(塑像)이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아버지를 그리워하던 설총이 옆에서 절을 하자 그를 향해 돌아보았다는 그 소상이었다. 그는 원효대사와 설총을 생각하며 제문읽기를 마쳤다.

“오늘 계림의 보살님 계시던 옛 절 분황사에서 다행히 생존해 계신 듯한 거룩한 모습을 보고 옛적 부처님께서 설법하시던 저 영취산 봉우리에서 처음 만나 뵈옵던 때를 그리며 이에 변변치 못한 공양을 드리옵고, 감히 작은 정성을 올리오니, 바라옵건대, 두터운 자비를 베푸사 밝게 굽어 살피소서.” 

그가 오늘 분황사를 찾은 것은 선지식으로서 원효대사의 가르침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는 침체된 불교를 재건하고 교종과 선종의 대립을 융합하기 위해 고심했다. 그때 생각난 사람이 원효대사였다. 다양한 종파간의 분열과 대립에도 불구하고 오직 중생제도라는 종교 본연의 사명을 위해 ‘한마음(一心)’을 강조했던 원효대사야말로 의천이 찾아야 할 해답이었다.

의천은 11세에 고려 문종(文宗,1046~1083)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영통사의 난원(爛圓,999∼1066) 문하로 출가해 화엄종을 공부했다. 그 후 13세에 승통(僧統)에 임명되었고 스승이 세상을 떠난 후에는 스승을 대신해 강학을 도맡았다. 그는 불교뿐만 아니라 유교와 도교, 제자백가의 학설까지 폭넓게 공부했다. 그 후 더 깊은 공부와 연구를 위해 송나라에 가고자 했지만 신변을 걱정한 왕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결국 30세에 제자 두 사람만을 데리고 몰래 송나라로 떠났다. 그곳에서 여러 고승대덕을 만나 법을 물으며 학문에 전념했으나 국왕과 태후의 간절한 청에 의해 14개월 만에 귀국했다. 귀국 후 흥왕사(興王寺)의 주지로 있으면서 제자를 양성하며 불교전적의 정비와 교학 진흥에 진력했다. 특히 교장도감(敎藏都監)을 두고 전적을 정비하고 목록을 작성해 교장을 간행했다. 교장(敎藏)은 신라 고승의 저술 400여 권을 비롯하여 송, 거란, 일본 등에서 수집하여 간행한 대장경에 대한 연구 해석서다. 경율론 삼장에 대해 연구하고 해석한 장소(章疏)를 수집하고 그 목록을 만들 것으로 불교가 생긴 이래 처음이었다.

의천은 35세에 화엄종을 기반으로 한 천태종을 개창하기 위해 국청사(國淸寺)를 세웠다. 그러나 법상종과 다른 종파의 반대가 심해 국청사를 세우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는 선암사와 해인사를 돌아다니며 때가 되기를 기다렸다. 그 후 42세에 다시 흥왕사에 올라와 중단되었던 국청사 공사를 재개했다. 드디어 국청사가 완공되고 그는 제1세 주지가 되어 천태교학을 강했다. 그의 강의를 듣기 위해 전국에서 1000여명의 학인이 몰려들었다. 그는 교학의 중심을 ‘화엄경’에 두었지만 ‘법화경’과 ‘열반경’ 등 300경론에 대해서도 강론을 계속함은 물론 선과 계율, 정토사상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가졌다. 그는 화엄종을 개창한 의상대사와 화쟁(和諍)과 화회(和會)를 강조한 원효대사의 업적을 선양하는 데 주력했다. 특히 교종과 선종을 통합하려는 입장에서 원효대사의 회통사상은 좋은 본보기였다. 그는 숙종에게 원효대사에게 어울리는 최고의 시호를 내려줄 것을 건의했다.

“이제까지 수많은 성인들의 저서를 읽고 법문을 들었습니다만 부처님을 빼놓고 우리나라에선 원효 스님 같이 훌륭한 사상가가 없었습니다. 부처님의 사상을 가장 잘 계승하고 있습니다. 저 같은 사람은 금생에 원효 스님을 뵙지 못한 것이 한스러울 뿐입니다. 부디 원효 스님께 최고의 시호를 내려주십시오. 더한 바람이 없을 것입니다.”

의천의 건의대로 숙종은 원효대사를 대성화쟁국사(大聖和諍國師)로 추봉해 분황사에 비석을 세우도록 했다. 평생 화해(和解)와 회통(會通)에 진력한 원효대사에게 딱 어울리는 시호였다. 이로써 원효대사는 입적한 지 400여년 만에 의천에 의해 눈부시게 되살아났다. 의천이 아니었더라면 값진 보석이 보석인줄도 모른 채 흙 속에 묻혀 있을 뻔 했다. 평생 교종의 통합에 진력한 의천은 47세의 나이로 눈을 감았다. 의천에게는 대각국사(大覺國師)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큰 깨우침(大覺)을 얻은 나라의 스승이란 뜻이다.
 
힘차다. 거침없다. 농묵으로 단숨에 그린 듯 호쾌하다. 두건을 쓴 보리달마(菩提達磨)는 초승달 같은 눈과 주먹코에서 서역인의 풍모가 역력하다. 단독반신상의 좌측에는 ‘蓮潭(연담)’이라는 관지가 쓰여 있다. 그 아래로 ‘蓮潭’ ‘金氏明國(김씨명국)’이라는 주문방인(朱文方印:글씨가 붉은 색인 네모난 도장)이 찍혀 있다. 작가가 김명국(金明國, 17세기 중반 활동)임을 알 수 있다. 그가 그린 ‘달마도(達磨圖)’는 현존하는 달마도 중 달마대사의 정신세계를 가장 잘 표현한 선종화(禪宗畵)다. 수염을 제외하면 총 30획의 붓질로 한 인물의 응축된 내면세계를 드러낸 감필법(減筆法)의 전형이다. 감필법은 필선의 수를 극도로 생략해 최소한의 붓질로 대상의 정수를 표현하는 동양화 기법이다. 두건과 가사는 농묵으로 힘차게 그린 반면 얼굴은 담묵으로 섬세하게 표현했다. 자유분방하면서도 재빠른 필법과 간략하되 더 이상 보탤 것이 없는 필치로 인물의 정신세계를 함축적으로 드러낸 사의(寫意)적 인물화의 본보기다. 제작 시기는 김명국이 통신사행(通信使行)의 수행화원으로 일본으로 건너갔던 1636(丙子)년과 1643(癸未)년 중 어느 한 해일 것으로 추정된다. 일본에서 그곳 사람들의 요청에 의해 그려 준 수응화(酬應畵)로 추정된다.

조선에서는 억불숭유(抑佛崇儒) 정책으로 선종화가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다. 반면 일본에서는 막부(幕府,1192~1868)가 집권한 중세부터 선종화가 일세를 풍미했다. 남송(南宋)의 양해(梁楷), 목계(牧溪)에 의해 발전된 선종화는 일본에 건너가 막부 시대에 크게 유행했다. 셋슈 토오요오(雪舟等楊,1420~1502)같은 선종화의 대가가 탄생하게 된 것도 이런 배경에서였다. 김명국이 일본에 간 에도(江戶,1603~1867)시대에는 선종화가 선승(禪僧)들의 전유물을 벗어나 일반인들도 즐겨 그릴 만큼 저변화되어 있었다. 그러나 에도시대의 달마도는 순수성을 잃고 그 의미가 상당히 변질되어 있었다. 선수행을 하는 수행자들을 깨달음의 세계로 인도하는 선종의 초조(初祖)로서의 상징성은 흐릿해졌다. 대신 수복(壽福) 안녕을 바라는 세속적 의미가 강조되고 부각되었다. 달마도는 과장적이면서 장식적인 그림으로 전락했다. 그런 상황에서 조선에서 건너간 김명국이 ‘달마도’를 선보였다. 일본인들은 열광했다. 김명국의 ‘달마도’에는 절제된 붓질 속에 엄숙하면서도 인간적인 풍모를 지닌 선종의 개조가 생생하게 살아 있었다. 그들은 김명국의 ‘달마도’에서 자신들이 잊고 지낸 달마대사를 새롭게 만났다. ‘전도몽상(顚倒夢想)’에서 깨어날 수 있었다.

김명국은 일본에서 여러 점의 달마도를 그렸다. 두건을 쓴 달마도와 함께 두건을 쓰지 않는 승려형의 달마도도 함께 그렸다. 달마대사가 갈대를 타고 양자강을 건넌 일화를 그린 노엽달마(蘆葉達磨)도 그렸다. 김명국이 일본에 가서 그린 선종화는 현재 15점이 남아 있다. 그 중 3분의 1이 달마도다. 가히 김명국을 달마도의 화가로 부를 만하다. 선종화에 열광한 일본에서 그의 인기는 대단했다. 얼마나 인기가 많았던지 잠을 잘 틈도 주지 않고 그림을 요청하는 사람들 때문에 울려고 할 정도였다. 이긍익(李肯翊,1736~1806)은 ‘연려실기술’에서 ‘김명국 신드롬’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명국이 통신사를 따라서 일본에 갔더니 온 나라가 물결이 일 듯 떠들썩하여 명국의 그림이라면 한 조각의 종이도 큰 구슬을 얻은 것처럼 여겼다.’ 조선 문화에 대한 동경과 우호적인 감정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김명국의 인기가 상당했음을 보여준다.

이렇게 유명한 김명국의 본관은 안산(安山)으로 자는 천여(千汝)다. 생몰연대는 알려져 있지 않다. 1636년 도일(渡日) 당시 그의 호는 연담(蓮潭, 연꽃 핀 못)이며, 1643년 호는 취옹(醉翁, 취한 늙은이)이다. 연꽃이 핀 연못과 취한 늙은이 사이에 그의 그림 세계가 놓여 있다. 그는 1636년 도일 당시 나라에서 금지한 인삼을 밀매하려다 적발되어 그 죄를 처벌받았다. 당연히 조선 정부에서는 다음 연행에 그를 보낼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그의 그림에 반한 일본 정부에서는 김명국이 다시 일본에 오기를 희망했다. 일본의 외교 관련 문서를 정리한 ‘통항일람(通航一?)’에 의하면 다음 통신사행에 ‘연담과 같은 자가 오기를 희망한다’고 적혀 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김명국은 1643년 계미(癸未)년에 다시 한 번 도일하게 된다. 두 차례의 사행 이후에도 김명국의 인기는 사그라질 줄을 몰랐다. 왜관 관련 자료인 ‘왜인구청등록(倭人求請謄錄)’ 1662년 3월13일자에는 일본 정부가 조선 측에 다음과 같이 요청했다고 적혀 있다. ‘구체적으로 8폭의 팔선인도(八仙人圖)와 산수, 인물이 포함된 춘하추동 사계절을 8폭으로 나눠 그려 보내 줄 것.’ 여전히 그의 그림을 원하는 일본팬들이 많았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달마대사를 만나본 적이 없다. 그저 글을 통해 그의 행적을 짐작할 뿐이다. 때론 풍문으로 들은 기이한 행적을 떠올리며 신비화하기도 한다. 이럴 때 달마대사의 형상을 그린 김명국의 ‘달마도’는 마치 그의 실제 얼굴을 본 듯 반갑다. 선미(禪味)가 넘쳐나는 작품이라 더욱 실감난다. 김명국은 달마대사의 얼굴을 모르는 우리들에게 그의 초상화를 넘겨준 작가다. 그가 그린 달마대사의 얼굴이 실제 얼굴과 같은가 다른가는 중요하지 않다. 그가 해석한 달마대사라는 게 중요하다. 그는 불교 신자가 아니었다. 달마대사를 흠모했다는 기록도 발견되지 않는다. 그러나 달마대사를 그리기 위해 그의 행적을 찾고 형식을 고민하고 표현방법을 고민해 작품을 그렸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가 달마라는 인물을 그리기 위해 깊은 삼매 속에서 만난 달마대사는 형상 너머의 진짜 달마대사다. 삼매라는 말을 너무 함부로 썼다고 생각한다면 삼매 대신 몰입이라고 해도 좋다. 모든 예술가는 자기 나름의 삼매와 몰입을 통해 자신이 도달하고자 한 경지에 도달한다. 그리고 자신이 보고 듣고 깨달은 경지를 대중에게 아낌없이 회향한다. 김명국이 그린 ‘달마도’가 그렇고 의천이 복원한 원효대사가 그렇다. 이것이 화가가 그림을 그려야 하는 이유다. 시인이 시를 써야 하고 조각가가 망치를 들어야 하는 이유다. 우리가 복원해야 할 인물이 어디 달마대사와 원효스님뿐이겠는가. 더 많은 의천과 김명국이 나타나 이차돈과 방울대사와 월명 스님을 되살려야 한다. 사료를 모으고 업적을 정리하고 재평가작업을 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혼자만 알고 있기 아까운 내용이 있다면 주변 사람에게 널리 알려주어야 한다. 말재주가 없어서, 글재주가 없어서라고 핑계대지 말고 자신이 할 수 있는 만큼 전해주면 된다. 내가 하다 부족하면 부족한 내 것을 바탕으로 그 다음 사람이 나머지를 보충할 것이다. 그저 나는 내가 할 일만 하면 된다. 그것이 전등(傳燈)의 역사다. 캄캄한 밤에 어둠을 밝히는 등불을 켜는 작업이다.
  
조정육 sixgardn@hanmail.net

[1308호 / 2015년 9월 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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