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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퇴굴심

기자명 인경 스님

불성 믿지 않고 다른 가르침에 의지하는 것

퇴굴심(退屈心)이란 어떤 목표를 향하지 않고 자신감의 결여로 뒤로 물러나 스스로 굽히는 마음을 말한다. 다른 말로 말하면 장부로서의 기개가 보이지 않는 비굴한 자세를 말할 때 사용한다. 보조국사는 대승의 근기가 없어 스스로 불성이 갖추어졌음을 믿지 못하고 다른 가르침에 의지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다른 가르침이란 외부에 절대적인 존재를 상정하는 것이고, 금생이 아닌 다음 생을 기약하여 염불을 닦는 경우이고, 화두참구를 하면서 사량분별로 얻고자 하거나 반대로 깨달음을 기다리는 태도를 총칭하여 사용한다.

절대적 존재 상정하거나
다음 생 기약하며 닦거나
사량분별로 얻고자하거나
깨달음 구하는 태도 총칭

깨달음은 진리를 직접적으로 체험하는 스스로의 자질, 곧 지혜를 갖추었다는 믿음에 기반 한다. 그런데 자기보다는 외부의 절대적인 존재를 상정하고 그것에 의지하는 일은 스스로 본래적 자질을 과소평가하거나 부인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외적인 힘에 너무 의지함으로써 스스로의 자존감을 낮추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고정되고 불변의 신에 대한 믿음은 실체가 없어서 공허하다.

서방 극락정토를 전제하고 염불을 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퇴굴심의 일종이라고 본다. 깨끗한 땅이란 의미의 정토는 천국과 같은 외적인 어떤 대상이 아니다. 천국은 외부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청정함과 깨어있음이다. 정토는 본래의 우리 성품을 가리키는 말이다. 우리 자신을 떠나서 별도로 존재한 대상으로 여긴다면, 이것은 허공에 집을 짓는 것처럼 부질없는 짓이다. 이런 점에서 정토는 바로 자성정토(自性淨土)이다. 이런 관점에서 염불을 한다면, 이때의 염불은 마음의 고요함과 깨어있음으로 안내하는 명상이 된다.

‘수심결’에서 제시하는 화두는 ‘매일 아파하고 기뻐하고 배고프다 하고, 덥다 하고 춥다고 하는데, 이것은 필경 무엇인가?’ 이렇게 묻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에 대해 사량분별로 시험 보듯이 대답한다면, 그것은 언어적인 개념으로서 실상은 아니다. 이것 역시 퇴굴심이다. 언어적인 해답을 지식으로서 자신의 본질을 대신하는 것이기에 스스로 물러나서 타협하는 것이다. 언어적인 지식은 본질에 들어가지 못하고 그 주변을 계속적으로 맴돌고만 있다. 체험은 언어적인 접근으로는 도달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반대로 아무런 생각이 없는 상태를 유지하면서 진리를 깨닫기를 기다린다면, 이것 역시 문제가 된다. 이것은 바로 무기(無記)이기 때문이다. 진리는 대상화할 수가 없다. 그것은 생생하게 살아있는 경험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것을 대상화하여 기다리는 일을 정진한다고 하지만, 결국은 세월만 낭비하고 앉아있는 결과를 가져온다. 이것 역시 퇴굴심이다.

그러면 대상을 인연하여 정혜를 닦는다[隨相門定慧]고 하는 것은 역시 퇴굴심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생겨날 수가 있다. 왜냐면 자성에 본래 갖추어진 정혜라는 돈오와는 다르기 때문이다. 돈오점수의 점수는 돈오의 깨달음에 기반한 점수이기 때문에, 퇴굴이 아니라는 입장이다. 깨달음에 근거하여 인연을 따라서 정혜 닦는 것을 보조국사는 쇠를 두드려서 금으로 만드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우리의 세속적인 삶은 번거롭고 비좁고 이해관계에 늘 노출되어 있다. 만약에 이곳에서 그 대상을 따라서 혹은 인연의 흐름에 들어가서 깨달음을 성취한다면 쇠붙이를 금덩어리로 만드는 작업이 아닌가 한다. 사실 이런 일상의 현실을 떠나 별도로 수행을 하고 다른 곳에서 깨달음을 얻는다고 하면, 이것은 분명하게 공허하거나 종교적 신비주의에 사로잡히게 된다. 진리는 항상 바로 지금 여기에서 구현된다. 지금 여기의 실재를 떠나서 별도의 실체는 없다. 돈오의 깨달음은 곧 일상의 점수에서 이루어지고, 일상의 점수는 깨달음의 돈오에 의해서 완성이 된다. 이러는 한에서 우리는 일없는 사람이 된다.

인경 스님 명상상담연구원장 khim56@hanmail.net
 

[1308호 / 2015년 9월 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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