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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여래형 지권인 도상의 성립

기자명 주수완

한국 미술사 대표 난제, 비로자나불 ‘지권인’ 수인 도상 논쟁

▲ 장흥 보림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 국보 117호. 높이 251㎝. 859년.

불상은 그 수인(手印, 손 모습)으로 존명을 판단한다. 항마촉지인은 석가모니불, 구품인은 아미타불, 약함을 들고 있으면 약사불 등으로 읽히는 것이 대표적이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눈에 띠는 수인은 비로자나불의 지권인(智拳印)이다. 왼손은 주먹을 쥔 상태에서 마치 ‘하나’를 의미하듯 검지를 세우고, 이 검지를 오른손이 움켜쥔 듯한 모습이다. 비로자나불은 흔히 ‘화엄경’에서 가장 중요하게 등장하는 부처로 알려져 있는데, 화엄사상이 이야기하는 ‘일즉다 다즉일’, 즉 하나가 모든 것으로 확산하고, 모든 것이 하나로 수렴한다는 개념을 표현한 것처럼 보인다.

지권인 수인 한 비로자나 불상
통일신라 9세기 중반 다수 제작
금강계 밀교 영향으로 인식돼

1980년대 내원암 불상 연구서
8세기 이미 제작된 사실 확인
세계서 가장 이른 시기 유물로

지권인 시기·원류 인식 변화
밀교 영향 vs 한국 창안 쟁점

왜냐하면 지권인에서 왼손의 곧추세운 검지를 감싼 오른손의 엄지 손가락 끝을 왼손 검지 끝에 맞댄 다음 나머지 손가락을 말아쥔 형태이므로, 이는 ‘하나’를 상징하는 왼손이 오른손 엄지와 만나 다른 모든 손가락으로 확산되는 것을 암시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혹은 하나로 수렴되는 화엄의 진리를 오른 손으로 비밀스럽게 감싼 것이라고 봐도 되겠다. 원래 이 수인은 인도의 밀교에서 비롯되었으니 그럴만하다.

이 도상은 특히 통일신라시대 9세기 중반 무렵에 많이 만들어졌다. 연대가 확실한 가장 이른 시기의 작품은 장흥 보림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으로 알려져 왔는데, 명문이 남아있어 859년에 완성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아울러 이러한 지권인 비로자나불들은 철조로 조성된 사례가 많고, 경주가 아닌 지방의 선종 사찰에서 유행한 성향이 있어서 지방 호족들의 후원을 받던 새로운 사상적 흐름이 중국으로부터 전래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특히 지권인은 금강계 밀교에서 중요하게 등장하는 수인이기 때문에 당시 통일신라에 전래된 밀교사상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으로 풀이되었다.

▲ 산청 내원사 석남암사지 석조 비로자나불좌상. 보물 1021호. 높이 108㎝. 766년.

그런데 1980년대 초반에 중요한 논문이 발표되었다. 당시 부산시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던 영태2년(766)명 사리호의 출처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이것이 지리산 산청 내원사 석조비로자나불상의 대좌에서 출토된 것이라는 사실을 밝힌 것이다. 더불어 이 불상은 원래 근처 보선암이라는 곳에 봉안되어 있었던 것을 옮겨온 것으로, 운반을 편하게 하기 위해 불상의 머리를 절단하고, 등과 다리 부분을 쪼아내어 무게를 줄였다는 증언도 입수했다(그 바람에 불신은 납작해지고, 하체는 비약하게 축소되었다). 이 과정에서 보선암에 남아있는 대좌의 중대석에서 나온 사리호가 여러 손을 거쳐 결국 부산시립박물관에 입수된 경위를 밝힐 수 있었다.

▲ 중국 서안 비림박물관 소장의 당나라 시기 비상에 새겨진 비로자불좌상.

이와 함께 조선시대 지방사료에 의하면 원래 이 절의 명칭은 석남사였을 가능성이 높아서, 영태2년명 사리호에 등장하는 ‘석남암’이 바로 보선암임이 확인되었다. 이 발견으로 인해 766년에 만들어진 내원암 석조비로자나불상은 우리나라 뿐 아니라 동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지권인 불상으로서의 가치를 지니게 되었다. 비록 755년에 황룡사에서 제작된 ‘대방광불화엄경변상도’가 더 빠르기는 하지만, 많이 손상되어 있어서 지권인을 결한 상이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이 됨에도 불구하고 지권인 부분은 남아있지 않다. 또한 ‘대방광불화엄경변상도’와 내원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의 중요한 차이점 중의 하나는 ‘대방광불화엄경변상도’에 등장하는 비로자나불은 보살형 비로자나불이고, 내원사 비로자나불상은 일반적인 여래형 비로자나불상이라는 점이다. ‘보살형 비로자나불’이란 존상이 부처, 즉 여래임에도 불구하고 겉모습은 마치 보살처럼 보관과 팔찌 등의 장엄을 걸치고 있는 형식인데,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보살의 모습을 한 여래가 흔하지 않지만 중국에서는 오히려 지권인을 결한 불상은 대부분 보관을 쓴 보살형 비로자나불로 더 많이 등장한다는 것이 특이하다.

▲ 대구 동화사 비로암 3층석탑 출토 금동제 사리함에 새겨진 보살형 지권인 비로자나불 삼존상. 863년.

이 새로운 발견으로 우리나라 지권인 불상에 대한 기존의 견해가 수정될 수 밖에 없었다. 더불어 새로운 견해도 제시되었다. 우선, 당시까지는 9세기 중반에 이르러서야 우리나라에 유행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던 지권인 불상이 이미 8세기 중반에 등장했던 것에 대한 설명이 필요했다. 이에 대해 통일신라의 여래형 지권인 비로자나불상은 중국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우리나라 독자의 도상으로서 당시까지 밀교도상으로부터 유래된 것으로 보던 시각에서 화엄종의 시각으로 보려는 주장이 제기됐다. 특히 통일신라에서는 밀교가 크게 유행하지 않았고 신라의 통일 이후로 점차 화엄종이 성행했으므로, 766년 제작된 내원사 석조비로자나불상은 밀교의 보살형 비로자나불과는 다른 계통의, 즉 화엄계통의 비로자나불임을 드러내기 위해 여래형 비로자나불로 창안된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이에 대한 재반론도 있었다. 우선 여래형 지권인 도상이 중국에서 흔하지는 않지만, 8세기 중엽에는 충분히 만들어지고 있었을 가능성이다. 문헌에 의하면 지권인 도상을 중심으로 하는 금강계 밀교를 중국에서 확립한 불공삼장(不空三藏, 705~774)은 그의 스승인 금강지(金剛智, 671~741)가 입적한 후 인도에서 유학하고 돌아와 산서성 오대산에 766~767년에 걸쳐 금각사(金閣寺)를 세웠는데, 이 때 3층 전각의 2층에는 ‘금강정유가오불상’을, 3층에는 ‘정륜왕유가회오불금상’을 봉안했다고 한다. 이곳을 9세기 중반 실제로 방문한 일본의 승려 엔닌(圓仁, 794~864)은 “2층과 3층의 불상과 보살의 수인과 얼굴 모습이 다르다”고 했는데, 이는 같은 비로자나불이라고 하더라도 둘 중의 하나는 여래형일 가능성을 암시한다고 의미를 부여한 것이다. 이렇듯 오대산 등 특정지역을 중심으로 제작되었던 여래형 지권인 불상은 불교가 탄압되었던 회창(會昌) 폐불기(845~847)에 파괴되어 현존하는 사례가 많지 않고, 이 때 폐불을 피해 많은 불교 인사들이 통일신라로 건너와 지권인 도상을 유행시키는 계기가 되었다는 해석도 덧붙였다.

현존하는 중국의 여래형 비로자나불상의 예는 광원 천불애, 서안 비림박물관 비상(碑像) 및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천보3년(744)명 비상 등에 유사한 도상이 새겨진 것이 있고, 대동 상·하화엄사의 요·금대 비로자나불상 등도 여래형 지권인 불좌상이다. 이들은 우리나라 내원사상과 비교해 연대가 비슷하거나 내려오는 시기의 작품이지만, 중국에도 여래형 비로자나불상의 전통이 없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이어 지권인 도상의 원류인 인도의 상황도 고려해야한다는 주장이 새롭게 주창되었다. 여래형 지권인 도상은 인도에서도 발견되고 있는데, 대표적인 사례는 인도 오릿사 지역 랄리타기리(Lalitagiri) 출토의 8세기경 작품을 들 수 있다. 따라서 여래형 지권인 도상이 우리나라의 창안이라고만 볼 수는 없다는 견해에 무게를 실어 주었다. 반면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인도에서도 보살형 지권인 도상은 드물고, 대부분 팔라시대 10세기 이후로 연대가 내려오기 때문에 보살형 지권인 도상의 유행은 중국에서의 특수한 상황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지적도 추가되었다.

사실 오래전부터 간다라 미술에 등장하는 마치 지권인처럼 보이는 수인을 하고 있는 설법인 도상이 지권인의 원형적 형태라는 추정은 있어왔다. 물론 그렇다고 이러한 유형의 도상이 직접 비로자나불을 의미한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석가모니와 구분하여 보편적·초월적 존재로서의 불성, 혹은 법신을 표현하기 위해 고안된 도상일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그리고 그 법신이 바로 비로자나불로 발전된 것으로 볼 수 있겠다. 이를 인정한다면 여래형 지권인 도상의 연원은 보다 더 오래전으로 올라가게 된다.

▲ 인도네시아 족자카르타 소노부도요 박물관 소장 금동 비로나자불좌상.

나아가 스리랑카, 동남아시아에서도 보살형 지권인 도상이 종종 발견되고 있다. 이를 통해 같은 밀교계 지권인 도상이라 하더라도 태장계, 금강계의 계통에 따라 중앙아시아 실크로드를 통한 도상의 전래와 동남아시아 바닷길을 통한 전래가 서로 달랐을 가능성도 제기되었다. 이는 중국에 밀교를 전한 인도 승려들의 이동경로를 통해 보더라도 반드시 고려되어야 할 지적이다. 어쩌면 복잡하게 얽힌 지권인 도상의 전개과정에서 동남아시아의 지권인 불상들은 하나의 열쇠일지도 모른다.

▲ 파키스탄 라호르 박물관 소장 불설법부조의 본존불. 간다라 시대. 지권인과 매우 유사하여 그 원류로 추정되고 있다.

이러한 논쟁의 저변에는 한국의 여래형 지권인 불상이 번잡한 장식 대신 보다 단순함을 추구하는 한국적 미감을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인도, 중국과의 교류 속에서 화엄, 밀교, 선이 상호 연관하여 발전하는 가운데 등장한 국제적 도상으로 볼 것인가의 시각차이로 정리할 수 있지 않을까. 특히 이와 유사한 문제는 항마촉지인 도상에도 해당하는데, 우리나라는 석굴암의 본존불 도상처럼 항마촉지인 도상이 여래형으로만 나타나지만, 중국, 혹은 인도 팔라시대의 조각에서는 보관을 쓴 보살형 항마촉지인상이 유행하여 지권인 도상과 유사한 양상을 보인다.

아직도 이 문제는 한국미술사 난제 중의 하나이지만, 확실한 것은 보살형이건 여래형이건 지권인 도상에 관한한 세계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현존 유물이 한국에서 확인된다는 것이다. 결국 지권인 도상에 관한 가장 중요한 두 패를 우리가 지니고 있는 셈이다.

주수완 고려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  indijoo@hanmail.net

[1308호 / 2015년 9월 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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