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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투파 유적 물으니 폭탄 터지는 흉내 내며 ‘아무것도 없다’”

기자명 권오민
  • 기고
  • 입력 2015.09.04 10:58
  • 수정 2015.09.04 15:50
  • 댓글 2

[권오민 교수 특별기고] 간다라 불교유적이 사라지고 있다
7월12일~8월13일 파키스탄 현지 답사, 본지 단독 제공

7월 12일~8월 13일에 걸쳐 인도 캬슈미르 지역과 파키스탄 간다라지역의 불교 자취를 답사하고 지난 8월25일 귀국한 권오민 경상대 교수가 현지에서 벌어지고 있는 불교 유적 훼손의 참상을 전했다. 특히 마르단의 아쇼카 왕의 법칙이나 페샤와르와 칠라스, 밍고라 인근의 불교유적은 역사적 의미와 함께 높은 예술성을 지녔음에도 국제사회의 무관심 속에 심각한 파괴에 무방비로 노출돼 있다. 법보신문은 권오민 교수가 현지에서 촬영한 사진과 글의 전문을 게재한다. <편집자 주>

필자는 지난 여름방학 한 달 여 동안 인도 카슈미르 지역과, 우리에게 ‘간다라’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파키스탄 서북부 지방(Khyber Pakhtunkhwa, 통상 KPK)을 답사 여행하였다. 이는 초기 인도불교를 공부한 이로서 오랜 꿈이었지만,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위험하다는 이유에서 지금 끝 미루어 왔었다. 그곳은 불교학의 산실과 같은 곳이다. 카슈미르는 ‘아육왕전’이나‘부법장인연전’에서 가섭-아난에 이어 제3조로 기록된 말전지(末田地, Madhyāntika)에 의해 ‘개교(開敎)한 이래 대천(大天)의 오사송(五事頌)에 반대한 상좌부(설일체유부)의 본향이었다.

협(脇) 존자의 발의와, 2세기 중앙아시아와 인도를 제패한 쿠샨왕조의 카니시카 왕의 후원, 그리고 세우(世友)의 주재 하에 인도불교사에서 ‘제4결집’으로 일컬어지는 불교성전 편찬(티베트 전승에 의하면 제3결집)이 여기서 이루어졌으며, ‘대비바사론’을 비롯한 아비달마의 각종 주석서도 여기서 제작되었다. 이는 중관·유식·여래장으로 이어지는 불교학의 정초였다. 5세기 이전의 카슈미르·간다라 불교는 인도불교가 교리적 혁신을 이루게 된 원천이었고, 이로 인해 카슈미르 비바사사(毘婆沙師)는 인도불교 4대 학파 중의 첫 번째로 손꼽히게 되었다.(나머지 셋은 경량부와 대승의 중관·유식)

간다라 또한 우리는 대개 불교미술의 원류 정도로만 알고 있지만, 현장은 이곳을 불교논사들의 고향이라 하였다. 무착, 세친, 법구, 여의, 협존자 등은 모두 간다라 출신이었다. ‘간다라 논사’라는 말은 이미 ‘대비바사론’에서 ‘카슈미르 비바사사’에 대응하는 술어로 사용되고 있다. 현장에 의하면 세친은 ‘구사론’을 푸루샤푸르(현 페샤와르)의 카니시카 가람에서 저술하였고, 법구는 이것의 모본이 된 ‘잡아비담심론’을 인근의 푸시칼라바티(현 차르사다)에서 저술하였으며, 중현은 카슈미르(현 스리나가르) 남쪽 40여리의 한 승원(현 아반티포라로 추정)에서 ‘구사론’의 광박한 비판서인 ‘순정리론’을 저술하였다. 이에 현장은 카슈미르에 2년간 머물면서 ‘구사론’과 ‘순정리론’을 학습하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중국 초기불교사를 장식한 역경승들 중 많은 이가 카슈미르 출신이거나 이곳으로 유학하였고, 법현·현장·혜초 등의 구법승 또한 이곳을 통해 인도로 들어가고 나갔다. 현장(629~645년 인도여행)은 오늘날 아프가니스탄에서 간다라(페샤와르)-오장나(밍고라)-탁샤실라(탁실라)-카슈미르-책가(시알코트)-치나북티(암리차르 일대)를 거쳐 중인도로 들어갔고, 해로로 입국한 혜초는 치나북티-책가-카슈미르-간다라를 거쳐 출국하였다.

이렇듯 카슈미르와 간다라는 불교학의 고향일 뿐 아니라 동아시아불교의 전초기지와 같은 곳이었지만, 오늘날 그곳 현실에는 불교가 없다. 오늘날 그곳은 이슬람의 세계로, 불교는 다만 박물관이나 파괴된 유적, 구법승들의 여행기나 불교 논서 상에 존재할 뿐이다. 불교는 과거 아득한 시간 저편에 존재하였을 뿐이다. 출입 또한 자유롭지 못하다. 인도와 파키스탄에 걸쳐 있는 카슈미르는 세계 주요 분쟁지역 중의 한 곳으로, 우리네 휴전선과 같은 정전선으로 갈라져 같은 종교의 이웃임에도 서로 넘나들 수 없다. 간다라 역시 아프가니스탄과의 접경지대로 탈레반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는 지역이다.

해서 이곳 산야에 산재한 불교유적 역시 그들의 영향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들은 이미 2001년 아프가니스탄 바미안의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최대의 불상을 로켓탄으로 폭파하여 세계를 경악시키기도 하였다. 필자는 이번 답사여행에서 최근 자행되었음직한 다수의 불교유적의 훼손 파괴현장을 목격하였다.

아쇼카 왕 칙령 새긴 암각법칙
‘아쇼카 붓다’ 이름 덕에 수난
수 백점 산재한 칠라스 암각화
부서진 바위파편 뿐 흔적도 없어
남은 유적엔 낙서, 쪼아낸 상처만
“탈레반 세력 소행 추정” 증언도

페샤와르 인근도시인 마르단 동쪽 12km 지점에 위치한 마을인 샤바즈가리는 고대 간다라 무역로의 교차로였다. 사마르칸트 등 중앙아시아에서 힌두쿠시(예컨대 카이버 패스)를 넘어오는 길, 인도에서 탁실라를 거쳐 올라오는 길, 중국에서 파미르고원(쿤자랍 패스 등)과 스와트를 거쳐 들어오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다. 이 마을 초입의 산자락에 아쇼카 왕의 암각법칙(岩刻法勅, rock edict)이 있다. 주지하는 대로 아쇼카 왕은 인도를 무력으로 통일한 후 법(法)의 정치를 표방하여 14개 조문으로 된 칙령을 바위와 석주에 새겨 영내 주요지점에 세웠는데, 샤바즈가리의 법칙은 동쪽 만세라의 그것과 함께 마우리야 제국의 서북변경 지역(오늘날 파키스탄의 KPK)에 위치한 것이었다.

샤바즈가리의 암각법칙은 50m 여 쯤 떨어진 상하 두 개의 바위 돌에 새겨져 있었다. 위의 것은 길이가 5m, 폭 3m 정도의 보다 큰 바위였는데, 심각하게 훼손되어 있었다. 전면은 흰 회칠에 잿빛 진흙이 덧칠되어 글자(고대 카로스티 문자)는 물론이고 그 밑이 어떤 상태인지 전혀 식별할 수 없는 지경이었고(사진1), 뒷면은 쓰다 남은 듯한 흰색의 회칠 반죽으로 더렵혀져 있었다(사진2). 진흙이 손에 묻어나는 것으로 볼 때 필자가 답사한 당일 자행된 일 같았다. 2000년하고도 300년 전 위대한 대왕의 암각법칙을 잿빛 진흙으로 덮어버린 것이다. 뒷면은 회반죽을 그냥 쏟아 부었지만, 전면은 상당히 공을 들여 빈틈없이 칠해진 것 같았다. 너무 깔끔하여 처음에는 보존을 위한 조치가 아닐까 생각하기도 하였다.
 

▲ <사진1>샤바즈가리의 아쇼카 왕 암각법칙. 문자가 새겨져있던 바위 전면에 진흙이 발라져있다.
▲ <사진2> 샤바즈가리의 아쇼카 왕 암각법칙 뒷면. 회반죽을 뿌려 훼손했다.
▲ 샤바즈가리에 남아있는 또 하나의 아쇼카 왕 암각법칙. 비교적 보존 상태가 양호한 이 바위엔 아쇼카 왕의 칙령을 새긴 문자가 선명하다.

말이 잘 통하지 않았지만 관리인에게 누구의 소행인지를 묻자, 그는 몰려든 아이들을 가리키며 저들이 매일 더럽히고 자신은 매일 청소한다고 하였다. 아이들이 한 짓 같지는 않다는 표정을 짓자 또 다른 어떤 이가 쉬쉬하며 “테러리스트의 소행”이라 한다. “탈레반?”하니 고개를 끄덕인다. 왜 불교유적도 아닌 아쇼카 왕의 암각법칙을 훼손하였을까? 짐작컨대 동네에서는 이 바위를 ‘아쇼카 붓다’라고 부르기에 이를 불교유적으로 이해하였을 것이다.

그날 오후 마르단 박물관에 들린 김에 그곳 직원에게 훼손된 사진을 보여주었더니 페샤와르 박물관 관할이기 때문에 그곳에 직접 말하라 하였고, 며칠 후 밍고라의 스와트 박물관의 학예관에게도 사진을 보여주었지만 심각한 훼손이라 하면서도 관할이 페샤와르 박물관이라고만 하였다.

파키스탄 서북 변방지역은 어딜 가나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아마 오랫동안 외부세계와 단절되어 낯선 이방인 모습이 신기하였나보다. 몰려든 마을 사람들에게 다음 방문지인 인근의 차나카데리(흰 코끼리 마을)의 불교 승원터와 그 북쪽의 메카산다 산의 위치를 물었다. 그곳은 다름 아닌 ‘태자 수다나경’의 배경이 된 곳, 나라의 보배인 흰 코끼리를 적국에 보시하여 부왕에게 내쫓긴 수다나 태자가 사람들과 작별을 고한 곳, 두 자식까지 바라문에게 보시하고 은거생활을 하였던 단특산으로, 이 산 정상의 스투파는 아쇼카 왕이 세웠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곳에 아무 것도 없다면서 ‘붐’하는 단발음의 포탄 터지는 소리를 낸다. 그곳 역시 테러리스트들이 파괴하였단다. 그 터라도 찾고 싶었다. 그러나 메카산다 산 어귀에서 맞닥뜨린 무장경찰이 페샤와르로 돌아갈 것을 강력히 요구하였다. 사실 이 지역의 여행허가증(NOC)도 갖고 있지 않았다. 돌아가는 척하다 다시 되돌아올까도 생각하였지만, 정말이지 찌는 듯한 무더운 날씨에 메카산다의 바위산을 오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로 생각되었다.

급진 이슬람주의자들이 불교유적, 그 중에서도 특히 불상을 파괴한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은 불교 암각화로 유명한 칠라스에서였다. 이곳은 베삼에서 길기트를 거쳐 파미르의 쿤자랍 패스를 넘어가는 카라코람 하이웨이 상에 위치한 인더스 강변 마을로, 필자는 20년 전에도 이곳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당시 마을 북쪽 1Km 지점 도로 아래 위에 널 부러진 검은 빛깔의 바위에는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의 많은 불상·스투파·공양 상과 법륜 등의 각종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그것들은 모두 7세기 이전에 제작된 것이다. 너무나도 놀랍고 흥분되어 이삼십 분 동안 두 롤 이상의 필름을 찍고 저녁에 다시 찾은 기억이 있다.

▲ <사진3> 칠라스의 암각화. 불상의 눈 부분을 쪼아 훼손했다.

그러나 이번에 찾은 그곳에는 암각화가 없었다. 아니 수없이 널 부러져 있었던 2~3m 크기의 바위 자체가 없어져 버렸다. 땅 속 깊히 박혀있을 큰 바위에 새겨진 두세 점의 불상과 너 댓 점의 스투파 암각화가 고작이었다. 그것도 불상은 어김없이 얼굴 부분이 돌로 쪼아져 있거나(사진3) 낙서로 훼손되어 있었다.(사진4) 택시운전사는 거듭하여 말하였다. 이곳에 암각화는 이것밖에 없다고. 그 많던 암각화는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카라코람 하이웨이는 항상 산사태로 도로가 유실되니 보수용 골재로 사용된 것일까?

 

 

▲ <사진4>낙서로 훼손된 칠라스 암각화.

▲ 고려대학교 한국사연구소가 2013년 현지에서 촬영한 칠라스 암각화.

택시 운전사를 조르고 달래어 다른 곳을 안내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는 우리를 인더스 강 건너로 데려 갔고, 거기서 다시 300m 여를 걸어 산 중턱으로 올라갔다. 그곳에 20년 전에 본 것과 같은 선명한 형태의 스투파 암각화 서너 점(사진5)과 한 점의 불상 암각화가 있었다. 운전사는 칠라스의 암각화는 이것이 전부라고 하였다. 그런데 불상 암각화는 정으로 돌의 결을 쪼아 머리 부분의 돌 자체가 떨어져나간 것이었다.(사진6) 일부러 떼어낸 흔적이 역력하였다. 주위를 살펴보니 바위 밑에 떨어져나간 파편이 잡석과 섞여 있었다. 마치 어제 파괴된 것처럼 보였다. 마음이 아팠다. 시간만 충분하다면 그것들을 모두 수습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석양이 지고 있었다. 이곳 역시 외국인이, 그것도 혼자서 돌아다닐 수 없는 지역이다. 택시 운전사도 돌아가자고 하였다. 한 무리의 동네사람들이 강을 건너 걸어오고 있었다. 두려움이 일었다.

▲ <사진5> 칠라스 암각화 중 스투파. 암각화의 원형을 살펴볼 수 있다.

▲ <사진6> 암각화의 불두 부분을 일부러 쪼아낸 흔적이 역력하다.

불상 파괴 현장은 밍고라 인근 자하나바드에서도 목격되었다. 마을 뒷산 중턱의 거대한 암괴를 지붕삼아 이고 있는 좀 더 작은 바위에 양각된 4미터 크기의 불상은 저 멀리 옛 오장나국(烏仗那國, Uddiyana)의 수도였던 몽게리성(오늘날 망글러)과 1400여 가람을 적셨다는 스와트 강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부처님의 두 눈은 진흙으로 가려져 있었다.(사진7) 무슨 일인지 의아하였다. 의문이 풀린 것은 스와트 박물관에서였다. 테러리스트들이 총을 쏘아 파괴한 것을 최근 박물관에서 진흙으로 땜질을 해 놓았단다. 이른 아침 무장군인의 호위를 받으며 찾은 그곳은 외견상으로는 평화로워보였다. 그러나 산으로 접어드는 길목 벙커에 매복하고 있는 초병은 그곳이 결코 평화로운 지역이 아님을 말해주고 있었다.

파키스탄 여행 가이드북에 나오는 스와트 강변의 불상은 거의 대개 파괴된 것이었다. 고그다라 마을의 불상이 그러하였고, 갈리가이의 불상이 그러하였다. 콜린즈의 가이드북에 의하면 이는 대개 마을사람들의 소행이라 한다. 그렇다면 이같이 급진 이슬람권의 불교유적을 탐방하는 것 자체가 불적의 파괴를 촉진시킬지도 모른다는 어처구니없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이방의 불교신자가 참배하러 왔다는 소식이 필경 그들 귀에 들어갈 것이고, 이것이 그들을 자극하여 더욱 철저한 파괴를 자행할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 <사진7>테러리스트들의 총격으로 불두의 눈 부분이 집중적으로 훼손된 자하나바드 불상. 스와트박물관 측 임시 복구를 위해 훼손된 부분에 진흙을 발라놓았다.
▲ 훼손 전의 자하나바드 불상.

탈레반은 “불상(형상)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이슬람에 대한 모독이기 때문에 제거해야 한다”는 그들의 최고 지도자 무함마드 오마르의 교시에 따라 바미안 석굴의 불상을 파괴하였다고 한다. 그들이 훼손한 아쇼카 왕의 암각법칙 제12조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자신의 종교를 빛내기 위해 다른 종교를 비방하는 것은 도리어 자신의 종교를 훼손시키는 것이기에 서로를 존중하라는 것이었다. 이슬람은 자비와 관용의 종교라고 들었고, 실제 페샤와르나 밍고라에서 만난 무슬림들은 긴 구레나룻의 강렬한 인상이었지만 불적을 찾는 이방인에게 매우 친절하였다.

현지서 만난 주민들 친절했지만
원리주의자들 왜곡된 종교 인식
스스로의 교리 훼손하는 우 범해
이슬람권에 남겨진 간다라 불적
조사·보존은 동아시아 불교계 몫

파키스탄은 세계 주요 문명 발생지이고, 동서의 문화가 교차한 간다라왕국의 옛 땅이다. 그곳은 동아시아불교의 고향이다. 페샤와르 관광 홍보물에서 간다라 불교성지를 참배하러 온 한국 순례단의 사진을 보았다. 대개는 박물관이나 잘 꾸며진 조형물을 배경으로 한 것이었다. 그들은 ‘대당서역기’의 간다라 편이라도 한번 읽어보았을까? 론리프래닛 등의 가이드북에 언급된 불교유적지의 안내문이라도 챙겨보았을까? 수다나 태자의 보시행이나 가리 왕에게 사지와 몸을 절단당한 인욕선인의 전설이 깃든 메카산다나 망글러에는 가보았을까? 최근 국내 한 대학 연구소에서 행한 ‘간다라 불교유적 조사’ 또한 카라코람 하이웨이 관광 사진첩 이상이 아니었다.

앞서 말한 대로 오늘날 간다라는 이슬람의 세계이다. 파키스탄 정부와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아시아 제국의 불교승단에서 어떤 식으로든 관심을 쏟지 않는다면 간다라 전역에 산재한 불교유적지는 다음 시대 그 흔적도 찾기 어려울지 모른다. 이미 북위시대 ‘낙양가람기’를 통해 서역 최고의 탑으로 이름을 떨쳤고, 법현도 현장도 혜초도 찾아 예배하였던, 인도미술사는 물론이고 인도불교사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카니시카 왕이 세운 스투파(대탑)는 1909년 영국의 고고학자 스푸너(D. B. Spooner)에 의해 페샤와르의 샤지키데리라는 마을에서 발굴되었는데, 여기서 그 유명한 카니시카 명문의 청동 사리호가 발견되었다. 오늘날의 그곳은 페샤와르 시민들 중 아는 이 아무도 없는, 샤지키데리 사람들조차 알지 못하는, 마을 오수로 악취를 풍기는 공동묘지였다. 그곳을 찾아가는데 거의 하루가 걸렸다.

글=권오민 / 사진촬영=권기준
 

[1309호 / 2015년 9월 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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