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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엄기준 국제포교사

“부처님 법 안에서 살아가는 지금이 인생 황금기”

▲ 엄기준 국제포교사는 “힘이 들 때마다 20여년 전 네팔 안나푸르나를 트레킹했던 일을 떠올린다. 그곳에서 만난 티베탄들은 먹을거리는커녕 숨조차 쉬기 힘든 그 곳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았다. 부처님 법에 의지해 부처님 법 안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라 했다”고 말했다.

도전은 가슴 뛰는 일이다. 세상에 쉬운 일이 없다고 하지만 스스로 좋아서 하는 일은 아무리 힘이 들어도 끝까지 할 수 있다.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자신만의 목표를 향해 나아간다는 것은 참으로 행복한 일이다. 온몸 온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울림이 있다. 두려움을 떨쳐내고 당당히 맞서 도전하는 사람은 남들이 경험하지 못한 그 무엇인가를 맛볼 수 있다. 도전을 청춘의 특권이라 한 이유도 거기에 있다. 설사 실패한다 해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기회와 시간이 있기 때문이다. 그만큼 나이를 먹을수록 새로움을 향한 도전의 첫 걸음을 떼기란 더 많은 결심과 결단이 요구된다. 때문에 노년의 도전은 청춘의 그것보다 몇 배 값지고 더욱 빛이 난다. 마치 북녘 하늘에 나 홀로 온전히 빛을 발하는 별처럼.

정년퇴임 앞두고 참가한 수련회
부처님 참 가르침 접하고 발심
진리 함께 나누고자 포교사 도전
전법위해 지금도 영어·불서 공부

이런 면에서 엄기준(법륜) 불자의 오늘은 항상 청춘보다 푸르고 빛난다. 날마다 새로운 도전을 통해 인생의 ‘황혼기’를 ‘황금기’로 만들어가기 때문이다. 정년퇴임을 즈음해 알게 된 부처님 가르침에 반해 불교공부를 시작했고, 70대 초반 포교사고시에 도전해 당당히 합격했다. 그것만으로도 대단하다는 주변의 칭찬이 자자했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도전은 계속됐다. 한국을 찾는 외국인들에게 한국불교의 역사와 전통, 문화를 올곧게 전하겠다는 발원을 세웠고, 영어공부를 시작해 4년 뒤 국제포교사가 됐다. 지금 이 시간에도 부처님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포교현장을 누비며 영어와 불교관련 서적을 잠시도 놓지 않는다.
말 그대로 가슴 뛰는 제2의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것. 그만큼 엄 포교사에 대한 교계의 평가도 넉넉하고 후했다. ‘열정’ ‘신심’ ‘희생’ ‘모범’ 등 그를 아는 사람들이 떠올리는 말들이다. 조계종 전 포교부장 계성 스님은 “늦은 출발이지만 그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부처님 가르침을 배워 포교사 그리고 국제포교사가 됐고, 그 가르침을 받들어 불자들과 함께 나누는 거사”라며 “어떤 자리에서도 솔선해 실천하고 활기찬 에너지를 불어 넣는다”고 말했다.

권영구 전 국제포교사회장은 인생을 아름답게 장엄하고 있다고 했다. ‘공부’와 ‘봉사’를 화두로 인생 후반기를 멋지게 색칠하는 도반이라고 자랑했다. 권 전 회장은 “열정과 성실, 신심에 있어서는 주변 어떤 분들과도 비교가 되지 않는다”며 “각종 문화행사와 사찰 외국인안내소를 비롯해 복지관에서 자원봉사자로 활동하면서 불자들의 모범적인 노년을 실천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엄지손가락을 세웠다.

그는 1934년 충청도 계룡산 기슭에 위치한 시골마을에서 태어났다. 60여 가구가 모여 살던 마을은 하루 종일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오르지 않는 집이 절반 이상이었다. 일제강점기와 6·25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굶주림은 일상이 됐다. 설상가상 보릿고개 때면 어려움은 극에 달했다. 말 그대로 초근목피(草根木皮)로 연명하던 시절이었다. 그럼에도 그의 어머니는 절에 행사가 있다면 뒤뜰 장독대 항아리 속에 고이 감추어둔 흰쌀을 하얀 광목자루에 담았다. 머리에 이고 동학사까지 20리 산길을 걸어 불단에 올렸다. 아버지 또한 돈독한 신심을 가진 불자였다. 새벽녘 잠에서 깬 아버지는 의관을 정제하고 ‘천수경’ 독경으로 하루를 열었다. 아버지의 ‘천수경’ 소리는 어린시절 꿈결 속에 노랫가락처럼 느껴졌고, 뜻도 모른 채 따라 부르기도 했다.

“독실한 신심의 부모님 덕에 부처님 마음은 이미 단단하게 자리 잡았던 게 아닌가 합니다. 그러나 그 마음이 발아해 싹을 틔운 것은 적지 않은 시간이 지난 뒤였습니다. 50여년이 지난 뒤니까요. 모든 것은 인연에 의해 이뤄진다는 부처님 가르침처럼 아직 부처님의 그 큰 가르침을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됐기 때문일 테지요.”

결혼 후 아내는 어머니의 대를 이어 독실한 불자가 됐다. 그러나 아내와 달리 그는 여느 ‘한국불교의 우바새(優婆塞)’ 그 모습이었다. 일 년에 몇 번, 큰 행사가 있는 날에만 나들이 삼아 가족들과 절에 가는 게 전부였다. 그런 그에게 시절인연은 예고하지 않고 불쑥 찾아왔다. 공직생활의 정년을 몇 달 앞둔 어느 여름날, 앞서 퇴직한 선배가 마지막 여름휴가를 함께 보내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다.

“정말 ‘불쑥’이라는 말밖에 달리 설명할 단어가 없었습니다. 화성 신흥사에서 성인을 대상으로 불교수련대회가 열리는데 함께 가보지 않겠느냐는 겁니다. 정년퇴임을 앞두고 앞으로의 삶을 생각해보고, 고즈넉한 산사에서의 휴가도 괜찮겠다는 생각에 흔쾌히 그러자고 대답했어요. 돌이켜 생각해보면 반세기만에 드디어 시절인연이 찾아온 겁니다.”

 
나흘간의 짧은 체험에 인생 후반기 삶의 목표가 세워졌다. 신흥사에서의 1분, 1초는 환희와 감동, 놀람과 기쁨의 연속이었다. 신흥사에서 경험한 불교는 그가 알아왔던 것과 달랐다. 그에게 불교는 원하는 것을 부처님께 엎드려 정성껏 기도하는 종교였다. 그러나 신흥사에서 본 불교는 마음의 변화를 살펴 나를 다스리고, 자신을 낮추며 남을 위해 사는 법이었다. 50여년간의 믿음이 단 4일의 경험만으로 산산이 조각난 것이다.

“불교는 곧 마음수양이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도, 기도를 하는 것도, 독경을 하는 것도 모두 사람이 사람답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 좋은 가르침을 옆에 두고도 눈이 어두워 알아보지 못했다는 사실이 어찌나 안타깝던지…. 깊은 아쉬움과 후회가 밀물처럼 밀려들었어요. 하지만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를 때라고 하지 않습니까. 결심을 했습니다. 남은 생 불교를 배우고 익히는데 온전히 걸어보겠다고….”
큰 불도 결국 작은 불씨에서 비롯되는 법. 그의 굳은 발심은 활화산처럼 활활 타올랐다. 매주 일요일 아침 서울에서 화성까지 차를 몰았다. 신흥사에서 열리는 일요법회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기왕 시작한 공부 제대로 해야 한다는 생각에 집 근처 구룡사 불교대학의 문을 두드렸다. 이마저도 만족할 수 없어 동산불교대학에 입학원서를 냈다. 이즈음 새로운 목표가 생겼다. 자신과 같은 우를 범하지 않도록 이 보물을 다른 이들과 나누겠다는 발원이었다. 그는 포교사고시에 응시했고, 단 한 번의 도전으로 당당히 ‘포교사단’의 일원이 됐다. 포교사를 품수한 그는 평상시 관심이 많았던 사찰문화분야에 지원했고, 담당사찰로 용주사를 배정받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다시 한 번 ‘불쑥’ 찾아온 시절인연을 만났다.

“용주사 효행박물관에서 관람객들에게 설명을 해주는 소임을 맡았습니다. 소임을 맡고 나니 큰 책임감이 생겨나 사람들에게 하나라도 더 알려주고 제대로 전하기 위해 나름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관련 강의도 찾아서 듣고, 불서도 탐독했어요. 그러던 어느 날 근처 기업에서 일하는 외국인 연구원들이 용주사를 단체로 방문한 거예요. 그런데 설명해줄 사람도, 자료도 변변치 않다보니 그저 공원 산책하듯 한 바퀴 휙 둘러보고 가려는 겁니다. 그 모습이 안타까워 부족한 실력이지만 나름 정성을 다해 열심히 설명해주었어요, 그랬더니 다들 너무 좋아하지 뭡니까. 예전에도 몇 번 방문한 적이 있는데 설명을 들은 것은 처음이라면서 몇 번이나 감사하다고 인사를 하는 겁니다.”

포교사로서 무엇을 해야 할 지 명확해졌다. 경험에 비추어 한국불교를 설명할 포교사는 많았지만 이방인들에게 영어로 설명해 줄 이들은 확실히 부족했다. 한국을 찾는 외국인들에게, 불교를 알고 싶어 하는 외국인들에게 부처님 가르침과 한국불교의 역사, 전통, 문화를 전하겠다고 발원하게 된 계기다.

도전은 시작됐다. 영자신문을 신청하고 사전을 펼쳤다. 이미 환갑마저 훌쩍 넘은 나이, 깨알 같은 글씨에 국문도 아닌 영문으로 된 신문을 읽는다는 건 여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신문 한 페이지 넘기는 게 이렇게 힘든 일이지 몰랐다. 그러나 포기할 순 없는 일. 부처님 그리고 스스로와 굳게 약속하지 않았던가. 국제포교사회에서 주관하는 ‘국제포교사 양성과정’도 신청했다. 포교사가 되기 위해 공부했던 내용들을 다시 영어로 익혀야 했기 때문이다. 그에 손에는 늘 영자신문과 영문불서가 쥐어있었다. 말 그대로 하루 24시간 영어와 불교에 매달렸다.

“3~4년 절실히 매달렸더니 조금씩 눈이 떠지기 시작했어요. 사실 학교를 졸업한 후 손 놓았던 영어입니다. 학창시절 이렇게 공부했다면 아마 영어박사가 됐을 거예요. 정말 치열하고 열정적으로 공부했다 자부합니다. 그 결과 2008년 제13기 국제포교사고시에 당당히 합격했습니다.”

국제포교사가 된 후 그는 용주사 효행박물관, 조계사 외국인안내소를 무대로 통역봉사에 나섰다. 또 복지관에서 어르신을 대상으로 한 영어교실 강사로도 활동했다. 이름도 제법 알려졌지만 그의 손에는 항상 영자신문과 영문불서가 쥐어있다. 포교현장에서 불교에 관한 해박한 지식을 가진 외국인들을 종종 만났기 때문이다. 명색이 부처님 법 전하는 공인된 ‘포교사’인데 ‘일반불자’보다 못하다는 소리를 들어선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평생도반인 아내가 3년 전부터 병환으로 혼자 지낼 수 없습니다. 예전만큼 포교현장에 다닐 수 없는 이유입니다. 그렇지만 부처님과의 약속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상황이 나아지면 다시 부처님 법 전하러 포교현장을 누빌 겁니다. 이를 위해 더 열심히 영어와 불교를 공부하고 있습니다. 아직 회향하지 못한 발원이 있기에 늘 공부하고 정진합니다. 여기에 나누고 나눠도 사라지지 않는 보물이 있으니 하루하루가 감사하고 행복할 뿐입니다.”

그는 힘이 들 때마다 20여년 전 네팔 안나푸르나를 트레킹했던 일을 떠올린다. 그곳에서 만난 티베탄들은 먹을거리는커녕 숨조차 쉬기 힘든 그 곳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았다. 부처님 법에 의지해 부처님 법 안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라 했다. 법정 스님은 ‘서있는 사람들’에서 “하루하루를 남의 인생처럼 아무렇게나 살아 버릴 것이 아니라 내 몫을 새롭고 소중하게 살려야 한다. 되풀이되는 범속한 일상을 새롭게 심화시키는 데서 좋은 날은 이루어진다”고 했다. 그의 하루는 부처님 가르침을 펴기 위한 새로운 도전이다. 그렇기에 웃을 수 있고, 날마다 좋은 날이다.

김현태 기자 meopit@beopbo.com

[1309호 / 2015년 9월 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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