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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응 스님의 ‘깨달음과 역사, 그 이후’ 발제 전문

기자명 법보신문
  • 기고
  • 입력 2015.09.07 14:22
  • 수정 2015.09.24 1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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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과 역사', 그 이후

다시 ‘깨달음’에 대해

깨달음을 얻기 위해 한국불교는 열심히 수행 중이다. 조계종단은 약 2000여명의 스님들이 여름과 겨울 각 3개월씩 1년에 6개월간 깨달음을 얻기 위해 선원에서 안거수행을 한다. 재가불자들도 깨달음을 얻기 위해 참선수행에 참여하곤 한다.

깨달음을 위한 수행은 조계종단에서 평생에 걸친 과업이다. 깨달음을 위한 노력은 3개월, 6개월 정도로는 언급조차 할 수 없다. 여러 해가 지나고 수십 년 이상을 참선수행 하는 것은 보통이다. 그런데 수십 년을 투자해도 현실적으로는 깨달았다고 하는 사람을 보기 힘 든다.

선불교에서는 깨달음은 세수하다 코 만지기보다 쉽다고도 한다. 하지만 이를 믿는 사람도 없고 그렇게 한 사람도 볼 수가 없다.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은 도대체 어떤 것이 길래 평생을 노력해도 성취할 수 없는가? ‘돈오(頓悟)’란 말이 민망하다.

깨달음은 불교도에게 선결과제이자 기본요건이기 때문에 깨달음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다른 문제에는 진지한 관심을 기울이기 힘 든다.

한국불교가(특히 조계종단이) 안고 있는 중요한 문제이다. 다시 근본적인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현재 한국불교에서는 대개 묵시적으로 깨달음이란 ‘마음을 확실히 깨닫는 것’ ‘몸과 마음의 완성된 경지이자 모든 번뇌를 끊고 고매한 인격을 이룬 높은 경지’라고 본다. 이러한 깨달음은 ‘궁극적 깨달음’ ‘확철대오’ 등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이러한 관점은 불교계에서 조계종단이 이끌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정의하는 깨달음은 내용이 추상적이며 구체적인 것은 아니다. 마음을 깨닫는다는 말은 부정확하다. 마음을 깨닫는다 할 때의 그 마음이 무엇인지 명확히 밝히지 않기 때문이다. 마음이 무엇인지 아직은 알 수 없지만 알 수 없는 그 마음을 깨닫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는 뜻인가?

‘깨닫다’는 말은 또 무슨 뜻인가? 이해(understanding)의 뜻으로 말한 것 같지는 않다. 그보다 훨씬 높은 경지에 도달한 수준 높은 이해인가? 아니면 깨달음이라는 표현을 쓰긴 하지만 주관계와 객관계를 아우른 그 어떤 이해를 뜻하는가? 주관계와 객관계를 아우른 이해의 상태는 구체적으로 어떤 상태인가?

이 또한 이해(understanding)의 일종인가? 그렇지 않으면 이런 따위의 의문은 번뇌망상일 뿐이고 깨달음을 얻는 노력에 장애가 되니, 믿는 마음으로 무조건 ‘이 마음이 무엇인가?’ ‘참 나가 무엇인가?’를 반복적으로 성찰하다보면 ‘마음’과 ‘참 나’를 알게 된다는 것인가?

어쨌든 깨달음이란 것을 이렇게 모호하게 설정해서는 이를 얻기 위한 노력의 방법도 불분명하고, 깨달음의 성취 또한 어느 수준의 어떤 것을 말하는지 제대로 알 수 없다. 평생을 노력해도 깨달았다는 확신을 얻지 못하는 것이 무리가 아니다.

‘깨달음’이 과연 무엇을 말하는지 다시 살펴보자. 소급하고 또 소급하여 부처님의 성도(成道)장면과 초기의 설법내용으로 돌아가 보자.

부처님의 보리수 아래의 깨달음과 그 내용을 서술한 것으로는 아마 마하박가(大品律藏) 가 가장 원형이라 할 것이다. 마하박가는 율장의 하나이다. 율장은 경장보다 먼저 송출해 결집했다. 마하박가는 그 내용으로 보면 여러 율장 가운데서도 가장 먼저 송출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마하박가야 말로 가장 앞선 시기에 결집된 것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마하박가는 성도(成道) 직후 깨달음의 내용을 정리하는 부처님의 생각과 첫 설법(초전법륜) 과정을 서술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마하박가에서 서술한 내용에 의하면 부처님께서는 보리수 아래서 깨달음을 얻으신 직후 그 내용을 여러 가지 방식으로 음미하면서 점검하는데, 그 내용은 삶의 괴로움을 연기(緣起)의 관점, 즉 원인, 조건, 결과, 생성, 소멸의 관점으로 파악하는 것이었다. 마하박가는 그렇게 통찰하고 이해하는 내용이 바로 부처님의 깨달음이라고 서술했다.

이어서 다섯 수행승들에게 첫 설법하는 내용을 서술하는데 그 내용은 연기의 관점으로 괴로움의 발생, 원인, 소멸, 소멸로 이끄는 방법을 말하는 것이며, 앎과 지혜와 봄에 대한 것이었다.

한마디로 부처님이 각자(覺者)라 할 때 그 깨달음은 ‘연기관(緣起觀)의 이해를 확립함이며, 삶의 괴로움의 문제를 이러한 통찰과 이해로서 해결하는 것’이라 하겠다.

이러한 마하박가의 서술은 오늘날 한국불교에서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깨달음을 ‘몸과 마음의 고준한 경지’라는 엄청나게 높은 단계의 목표로 설정한 것과는 전혀 다르다.

부처님은 깨달음을 고도로 수련된 높은 정신세계를 이루는 것이라 하지 않았다. 깨달음은 ‘잘 이해하는 것’이라고 하셨다.

깨달음이란 ‘잘 이해하는 것(understanding)’ 이라 말하면 수준이 떨어지는가? 깨달음을 ‘~에 대한 이해(understanding)’로 볼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몸과 마음의 완성된 그 어떤 경지’로 볼 것인가에 따라 깨달음을 이루고자 하는 방법도 크게 달라질 것이다. 깨달음을 얻는데 소요되는 시간이나 기간은 말할 것 없이 크게 차이날 것이다.

만일 깨달음을 ‘올바른 이해’라고 한다면 그러한 깨달음을 얻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 부처님 자신도 고행을 통해서도 아니요 선정을 통해서도 아닌, 논리적인 사유와 성찰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었다. 부처님이 녹야원의 첫 설법에서 다섯 수행자에게 당신의 깨달음의 세계를 설명하고 납득시키는데 걸린 시간은 불과 며칠이 걸렸을 뿐이다. 그리고 ‘납득시킨다’는 말을 썼듯이 깨달음은 이해의 영역이라는 것이다. 납득시키는 방법도 선정삼매를 통한 것이 아니라 밤낮 없는 대화와 토론이었다.

녹야원의 첫 설법의 다섯 제자들은 이미 깨달음을 얻은 선배이자 스승인 부처님의 적극적인 설명과 토론을 통해 단시간에 깨달음을 얻었다. 그리고 경전은 부처님을 포함하여 ‘이해로서의 깨달음’을 얻은 다섯 수행자를 모두 아라한이라고 호칭했다.

부처님은 다섯 수행자에 이어 55명의 제자를 얻게 되는데 이들도 단기간에 깨달음을 얻었다. 시간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부처님은 보시, 지계, 생천, 공덕, 맑은 마음가짐, 연기의 눈으로 살펴보는 괴로움의 발생과 소멸, 그 방법에 대해 설법을 하셨고 그들은 이내 그 뜻을 이해하여 깨달았다. 경전에서는 이 모두가 아라한이 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이들은 한 결 같이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깨달음을 얻고는 “세존이시여, 훌륭하십니다. 넘어진 것을 일으켜 세우듯, 가려진 것을 열어보이듯, 어리석은 자에게 길을 가리켜 주듯, 눈 있는 자는 형상을 보라고 어둠 속에 등불을 가져오듯,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진리를 밝혀주셨습니다.”라고 찬탄을 하기도 했다.

다른 경전에서는 부처님과 다섯 제자들이 새로 생긴 55명의 제자들과 여름 우안거(雨安居)를 같이 보냈다고 서술하기도 한다. 그 기간 중에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55명의 제자들도 깨달아 아라한이 되었다고 한다. 아마 그 우안거 기간 중에 부처님을 포함한 61명은 집중적인 설법과 토론을 했다고 짐작이 된다. 그리고 토론내용에 대한 깊은 사유를 했을 것이다. 부처님이 설법과 토론을 주도하고 먼저 깨달음을 얻은 다섯 제자들도 부처님을 도와서 토론에 적극 참여하여 후배 50명 제자들을 적극 이끌었을 것이다.

(이 최초의 우안거 장면은 1968년 해인사에서 해인총림을 처음 개설하던 첫 동안거 기간에 행했던 방장 성철스님의 100일 법문하던 시절과 겹쳐져 연상된다.)

이처럼 깨달음은 이해의 영역이었기 때문에 설법, 토론, 대화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이었다. 부처님은 가르침을 청할 때 삼매와 선정을 통해 수련하라고 지도하지는 않았다. 설법을 했으며 듣는 이는 질문과 대화를 통해 마침내 깨달음에 이르곤 했다. 그리고 대화와 토론을 위해선 자기생각이 정리가 되어야 하니 이를 위한 사유행위가 뒷받침 되었을 것이다.

초기 경전이든 대승경전이든 불경이 설법, 문답과 대화체로 구성되어 있음은 이러한 까닭이다.

깨달음을 얻는 방법의 변천

설법과 사띠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부처님 당시의 초기에는 깨달음을 얻기 위한 방법은 부처님의 직접적인 설법과 그에 따른 질의응답, 대화와 토론을 통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설법내용에 대한 사유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부처님은 깨달은 제자들이 60명에 이르자, 이들에게 각기 다른 지역으로 흩어져 전도를 하라고 당부했다. 다른 지역으로 간 제자들은 부처님의 설법내용을 잘 기억하는 것이 중요했을 것이다. 기억한 내용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설법하기 위해서다. 최초 다섯 비구 중 한명인 마승(앗사지)비구가 부처님에게 들었던 설법내용을 기억하고 있다가 사리불에게 전해주어 그를 승단에 입문시킨 일은 유명하다.

‘잘 기억하여 그 내용을 사유하는 일’을 경전에서는 ‘사띠(念, 憶念)’라 표현했다. 사띠의 사전적 의미는 ‘기억’이다. 8정도의 정념(正念)도 바로 이 사띠이다. 이때의 인도는 아직 기록문화가 생기기 전이며, 종이도 책도 없었다. 기록이 없던 시대에 공부하는 방법은 사띠(기억하여 사유함) 외엔 달리 없었을지 모른다.

부처님 제자인 비구스님들을 성문제자(聲聞弟子)라 부른 것은 가르침을 기억으로 수행하면서 이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승하는 사람임을 특징지어 표현하는 말일 것이다. 이렇게 기억의 양이 많은 제자 중 으뜸은 아난존자였으며, 결국 아난존자의 기억에 의해 부처님 가르침이 후대에 전해지게 된다.

사띠도 점차 변화했다. 변화한 사띠는 부처님의 설법의 양이 점점 더 많아지면서 나타났다. 이 많은 설법 내용을 어떻게 다 기억하겠는가? 뭔가 방법이 없을까? 그래서 테마별로 기억하는 요령이 생겨났을 것이다. 사념처(四念處)가 그것이다. 신(身), 수(受), 심(心), 법(法)의 네 가지 테마로 부처님의 설법내용을 정리해서 좀 더 요령있게 기억하면서 사유하는 방식이다. 37조도품에서 말하는 염근(念根), 염력(念力), 염각지(念覺支)도 모두 이러한 기억과 사유의 뜻을 가진 사띠를 지칭한 것이다.

그러나 이후 이러한 사띠는 부처님의 설법내용을 기억하고 사유하는 방식에서 특정한 주제나 내용으로 재정리하여 이 것들을 삼매(선정)와 결합한 위파사나 방식으로 성찰하는 식으로 변화해 갔다. 부처님의 이상적인 모습과 18공덕상을 염관(念觀)하는 염불(念佛) 수행도 나타났다. 염불은 더욱 다양한 방식으로 진화하여 아시아 전역을 휩쓸기도 했다. 원래의 사띠에다 삼매와 선정이 결합하는 집중적 수행법이 대두된 것이다.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이라는 층위가 생겼고, 그 기준에 사선(四禪), 팔정(八定), 구차제정(九次第定) 등 선정의 수준정도가 적용되기도 했다.

불교는 ‘이해하는 깨달음’에서 ‘이루는 깨달음’으로 변화해 갔다. 왜 사띠가 이렇게 변화되었는지 그 까닭은 좀 더 연구되어야 할 것이다.

중국 선불교의 간화선(看話禪)

중국 선불교의 선사(禪師)들이 수행했던 간화선도 인도의 사띠와 거의 같은 성격으로 태동되고 변화되었다. 당나라 때의 육조 혜능스님과 그의 제자들에 의해 전개된 이른바 조사선(祖師禪) 불교는 당시 중국 전역을 풍미했다. 조사선은 스승과 제자들의 문답, 대화, 여러 가지 제스처와 자극적인 행동을 통해 깨달음을 얻고자 했다. 그 대화와 행동의 사상적 기반은 반야(공, 연기적 통찰)나 불성(여래장) 등 대승불교 사상이었고, 표현과 행동양식은 은유, 파격, 역설을 넘나들었다.

중국은 인도의 각종 불경들을 약 500년의 시간을 들여서 거의 모두 한문으로 번역하는 대작불사를 이뤘다. 그 과정에서 중국불교는 법상종, 화엄종, 천태종 등 매우 높은 수준의 다양한 불교학파를 이루어 경쟁적으로 자파의 교학을 탐구하고 선양했다.

중국불교는 심오하지만 난해한 교리를 전개하는 학자들의 불교가 되고 말았다. 보다 대중적인 불교도 필요했을 것이다.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인도인들의 용어들과 개념, 게다가 번역된 한문 자체가 어려운 문자였기 때문에 한문으로 된 불교경전들과 주석서는 불교이해의 큰 장벽이었다.

마침내 ‘불립문자(不立文字)’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이라는 선불교의 슬로건이 등장했다.

나까무라 하지메가 <중국인의 사유방식>에서 적절히 표현하고 분석했듯이 중국옷을 입은 선불교가 탄생한 것이다.

조사선은 간화선 방법으로 깨달음을 얻고자 했다. 간화선의 ‘간(看)’은 잘 살펴보다의 뜻이며, ‘화(話)’는 이야기, 또는 대화라는 뜻이다. 즉 간화선은 ‘이야기, 또는 대화를 잘 살펴보는 선’이다. 어떤 이야기고 대화인가? 뛰어난 조사스님들이 설법한 이야기거나 주고받은 대화이다.

결국 간화선은 조사스님들의 설법이야기나 주고받은 대화들을 잘 기억하였다가 수시로 사유하는 수행이다. 책이 필요 없는 공부방법이기도 하다. 번역된 그 어려운 한문불경을 탐독할 필요가 없다. 책이 필요 없는 불교는 그 자체로 자유로운 면이 있다. 홀홀단신 떠돌아다니는 운수납자(雲水衲子)라는 자유로운 출가수행자상은 중국에서 이때 비로소 출현한 것이 아닐까 싶다.

불교의 요체를 깨달은 조사스님들이 중국인의 사유방식에 맞는 감각으로 파격적이면서 은유적으로, 그리고 때로는 직설적으로 표현하는 설법과 메시지는 사람들을 매료시키기 충분했다.

언하대오(言下大悟)! 조사스님과의 만남에서 설법 중에도, 대화 중에도 깨닫는 사람들이 무수히 나왔다. 깨달음으로 이끈 설법이야기나 대화들은 곧바로 소문이 났고, 이 이야기들은 기억하기 적당한 형태의 길이로 정리되어 전파되었다. 그냥 시중의 잡다한 이야기나 대화가 아니라 깨달음으로 이끄는 조사들의 이야기이다. 이런 이야기를 기억해두었다가 수시로 떠올려서 음미하고 성찰하는 것이다. 이야기는 다양할수록 좋았다. 깨달음으로 이끄는 훌륭한 이야기는 달리 ‘칙(則)’ ‘공안(公案)’이라고 불리기도 했으며, 모음집을 편찬하기도 했다. <무문관 48칙> <송고백칙> <벽암록> 등이 그것이다. 이런 책들은 참선하는 스님들의 기억을 보좌해 주는 한권짜리 공부책자이기도 했다.

대혜스님도 늘 깨달음으로 이끄는 여러 가지의 이야기를 복수로 예시하면서 이 이야기들을 잘 살펴보라고 주문했다. 간화선 시대가 열린 것이다.

이런 선불교의 간화선은 인도의 사띠수행의 중국적 변용이라 할 것이다. 다만 같은 점은 사띠든 간화선이든 둘다 설법내용이나 대화를 늘 기억하여 성찰하는 방법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인도의 사띠수행이 그랬듯이 중국의 간화선도 무수한 불교적 깨달음을 이루는데 기여하였다. 그리고 초기의 간화선은 선정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에 행주좌와나 일상생활에서도 가능했다.

한편 이러한 원래의 간화선 방법은 송나라 말기를 지나 원나라 시대에 가면 큰 변화가 생긴다. ‘이야기(화두)’ 속의 특별한 구절이나 단어 한 글자에다 마음을 집중하거나, 의심하거나, 성찰하면서 선정에 깊이 드는 방식으로 변했다. 이때부터 선, 또는 간화선은 외형적으로는 좌선을 중시하는 앉아있는 불교가 되고 말았다.(정작 조계종풍을 펼쳤던 혜능스님은 좌선을 배격했다는 점에서 아이러니하다)

원나라 때의 몽산선사가 특히 이런 선정위주의 간화선을 제창한 것으로 유명하며, 우리나라의 서산대사의 선가귀감에서 말하는 선도 몽산선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은유, 파격, 역설의 선적(禪的)인 이야기를 평소 기억하고 있으면서 그 이야기를 반복적으로 음미하며 그 의도와 핵심을 포착하고자 하는 것이 기존의 간화선 방식이라면, 특정한 어귀(語句)에 집중하여 선정에 깊이 드는 것을 강조하는 선(禪)은 그 성격과 패러다임이 전혀 다르다.

선정을 강조하는 간화선은 마침내 동정일여, 몽중일여, 오매일여, 숙면일여 등의 경지를 이뤘는지 여부를 깨달음의 기준으로 제시하기도 한다.

인도의 본래적 사띠, 즉 말씀을 기억하여 사유하는 수행이 훗날 삼매와 결합한 위파사나 수행으로 변모하였듯이, 중국 선불교도 조사스님들의 이야기와 대화를 탐구하는 본래의 간화선 또한 선정에 집중하는 선정 위주의 간화선으로 변화하였다는 그 유사점은 대단히 흥미로운 점이다.

시간의 여유가 많고, 고요한 환경과 집중적인 수련을 할 수 있는 선실(禪室)을 가진 출가 승려의 수행여건과 관련되는 것은 아닌지 추측해 본다.

선정위주의 참선을 조계선이나 간화선이라 호칭하는 것은 부정확한 표현이라 생각된다. 오늘날 한국불교가 자랑스럽게 선양하는 간화선은 몽산선의 성격을 강하게 띠는 후기 간화선이라 할 만 하다.

결국 부처님 당시의 사띠(念)나 중국 선불교의 간화선은 모두 깨달음을 이루기 위한 수행법이다. 이러한 수행은 연기(공)의 가르침을 파악하고 이해하는데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띠와 간화선을 통해 짧은 시간에 연기의 이치를 깨닫고, 반야의 이치를 깨달았다. 조사선 시대의 선사들은 스스로 ‘반야를 배우는 보살’이라 자칭하기도 했다.

부처님 당시의 사띠나 초기의 간화선이 이루고자하는 본래의 깨달음의 성격은 ‘잘 이해하는 것’이며, 이해하는 내용은 신(身), 수(受), 심(心), 법(法)이라는 존재 일반들이 연기나 공의 양태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그런데 깨달음을 몸과 마음의 어떤 경지로 설정하는 순간, 그에 이르는 방법 또한 삼매와 선정을 도입하면서 고도의 정신적 단련과 순숙(純熟)을 지향하게 된다. 이것이 후기 사띠와 후기 간화선이 이루고자 하는 목표가 아니었는지 싶다.

이는 명백히 ‘이해하는 깨달음’에서 ‘이루는 깨달음’으로 변한 것이라 본다.

선정과 삼매로서 마음을 닦아 깨달은 마음으로 만들려 하는 것은 각종 화학적 재료를 섞거나 변용하여 금을 만들려 하는 연금술을 닮았다. 선정과 삼매를 닦아 깨달은 마음으로 만들려 하는 사람은 ‘마음의 연금술사’라 지칭할 수 있다.

사람들은 이제 연금술을 믿지 않거나 그 효용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무협지에 나오는 장풍, 경공술, 화려하고 심오한 무공들은 비현실적이라서 올림픽이나 격투기 경기에서는 활용될 수 없지만 영화, 게임, 소설 등에서 모든 사람들이 선망하는 환타지를 얻는데 유효하게 사용된다.

마음의 연금술 또한 도인을 염원하는 사람들의 환타지가 될 수 있지만, 그러기에는 치르는 대가가 너무 크다.

현대사회에서 깨달음을 얻기 위한 방법은?

깨달음이 모든 존재들의 연기성(緣起性)과 공성(空性)을 잘 이해하는 것이라면, 즉 이해의 수준이라면 여러 가지 의문이 많이 들 수밖에 없다.

- 이해하는 것이 깨달음이라면 그리 오래 시간이 걸리지 않아야 할텐데, 과거에도 그렇고 오늘날에도 평생을 수행한다고 애쓰는 스님들은 무엇 때문인가?

- 연기성과 공성을 잘 이해하는 것이 깨달음이라면, 어느 시대에나 동일한 수준의 이해인가?

- 오늘날 현대문명사회의 현대인이 잘 깨달으려면(이해하려면) 어떤 방법으로 노력해야 하나?

하나하나 짚어보자.

첫째, 이해하는 정도의 수준이 깨달음이라면 그리 오래 시간이 걸리지 않아야 할 텐데, 과거에도 그렇고 오늘날에도 평생을 수행한다고 애쓰는 스님들은 무엇 때문인가?

- 일단 평균이상의 지적인 수준(IQ 등)을 가진 사람의 경우로 전제한다. 이럴 경우에도 여러 가지의 가능성이 있을 것이다. 기본적인 지적인 수준을 가지고 있다 해도, 천년 이천년 전 농경사회, 왕조사회에 사는 사람이라면 소박한 형태의 세계관과 사회의식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는 충분히 연기성이나 공성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삶이란 무언지 괴로움과 행복이 무엇이며, 어떻게 감당하며 극복할 것인지 이해하고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정도로는 당사자도 주위사람도 깨달음이라 인정하지 못하는 사정이 있다. 당시의 사회적 통념은 우주나 자연현상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없는 상태라는 것과, 뛰어난 종교수행자는 자연, 세계, 우주에 대해 꿰뚫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신비한 능력과 탁월한 정신적 경지를 가진다고 믿고 있으며, 그래서 그에 의지하고자 하는 경향이 많았다.

당연히 수행자는 그러한 기대에 부응할 수밖에 없으며, 깨달음의 수준을 대폭 상향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깨달음의 본래성격을 대폭 깨뜨리면서까지 말이다.

대폭 상승된 깨달음의 모습은 모호하게 추상적인 용어로 표현되거나, 언어문자로 표현할 수없는 신비하고 불가지한 경지로 묘사된다. 철학적인 용어로 말하자면 반증할 수 없는 깨달음의 경지를 설정하는 것이다.(‘눈 있는 자는 형상을 보라고 어둠 속에 등불을 가져오듯,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진리를 밝혀주셨습니다’라고 찬탄한 부처님의 태도와 대조적이다)

이렇게 되는 순간 깨달음은 엄청난 도그마가 되어 이젠 수행자도, 그 집단들도 통제 불능한 권위가 되어 천년, 이천년을 흘러가는 것이다.

아마 불교의 수행자들이 평생을 걸쳐 수행해야 하거나, 그렇게 해도 대다수 ‘그런 깨달음’을 얻지 못하는 까닭은 깨달음이라는 그 내용을 잘못 설정한 까닭이 아닌가 생각한다.

둘째, 연기성과 공성을 잘 이해하는 것이 깨달음이라 할 때, 그 깨달음은 어느 시대에나 동일한 수준의 이해인가?

-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부처님도 최초에는 연기에 대해 ‘12연기’로 설명했고, ‘이것이 있음으로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음으로 이것이 있다. 이것이 생함으로 저것이 생하고, 이것이 멸함으로 저것이 멸한다’라는 가르침으로 설명했다. 첫 제자 중 한 사람인 마승(앗사지)비구는 ‘부처님께서는 모든 존재는 인연을 통해 생성되고, 인연을 통해 소멸한다는 가르침을 펼친다’라고 처음 만난 사리불에게 전해주기도 했다.

이러한 연기의 가르침으로 모든 존재성을 설명하는 사람은 부처님 이외는 그 때까지 없었다. 이러한 합리적인 연기의 가르침은 그 당시에는 혁명적인 내용이었지만, 정작 그 내용은 쉽게 받아들여지고 쉽게 이해할 수 있어 제자들이 크게 늘어났다.

최초에 연기의 가르침은 괴로움의 문제에 적용하여 그 소멸하는 방법을 말했고, 그 과정에서 12단계의 과정을 연기의 이치로서 설명했다. 그리고 신체에, 느낌에, 마음에, 법 등 다양한 존재일반에 적용하여 그 생성, 변화, 소멸하는 속성을 설명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연기의 가르침은 점차 세밀해지고 다양하게 설명되어졌다. 그 까닭은 연기의 가르침의 입증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사례에 대입하여 타당성을 설명해야 하는 일이 계속 생겨났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시대가 흘러 후대의 제자들은 연기의 가르침을 더 다양하게 적용하여 설명했다. 존재일반을 크게 다섯 가지로 분류한 75가지 존재항목에 대해 적용하기도 하고, 100가지 항목으로 확대하여 적용하기도 했다. 법계연기, 육상원융, 십현연기 등 고도로 철학화된 연기론도 생겨났다.

아마 이런 것들은 그 시대마다의 문화적 수준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또는 당대의 사상적 경쟁자들과 겨루는 과정에서 보다 정치하게 다듬어진 연기론이 필요했을 것이다.(물론 이렇게 변화되고 진화된 연기론들이 구체적으로 당시의 삶의 문제들에 어떻게 적용되어 문제해결에 도움을 주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즉 연기에 대한 내용은 시대가 변하면서 그에 적용하기 위해 계속 바뀌어왔다는 것이다. 부처님 시대부터 변화하며 발전해온 연기의 가르침은 그후 1500년이 지나도록 그 변화가 이어졌고, AD 7세기쯤에 그 변화를 멈춘 것으로 보인다.(중국불교의 화엄종, 천태종, 법상종 등의 전성기를 고려한 시점임)

하지만 이 1500년간의 기간은 농경사회요, 왕권시대다. 그리고 문화적 수준은 현대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낮은 수준이다. 즉 연기의 가르침은 지금으로부터 1400년 전 쯤에 머문 것은 아닌지 싶다.

멈춰 섰던 그 당시의 연기론을 가지고 현대사회와 현대인의 문제에 적용하여 도움을 받을 수 있을까? AD 7세기 이후 오늘날까지 1400년 동안 기존 연기론의 수준에만 머문 불교인들의 태만이 너무 크다고 생각한다.

과거의 불교인들은 그 시대마다 새로운 문제의식을 가지고 연기론을 다듬고 발전시켜왔다. 현대의 불교인들도 발달된 현대의 문명적 인지(人智)를 바탕으로 연기론을 현대문명을 비춰주는 거울로 만들기 위해 보다 다양한 적용과 해석을 내야 할 것이다.

부처님 초기의 연기론은 삶의 고(苦)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는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지만, 현대에는 ‘행복의 문제’ ‘다툼의 문제’나 ‘자유’ ‘평등’ ‘평화’ ‘선’ ‘악’ ‘정의’ ‘공정’ 등의 다양한 사회정치적 문제에도 연기와 공의 가르침을 적용해서 도움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미학이나, 사관(史觀), 자연과학의 영역에도 과감히 도전해야 할 것이다.

셋째, 오늘날 현대문명사회의 현대인이 잘 깨달으려면(이해하려면) 어떤 방법으로 노력해야 하나?

- 깨달음이란 ‘연기와 공에 대한 올바른 이해’이다. 연기론은 부처님 당대부터 꾸준히 시대에 적응하면서 진화해 왔다. 즉 연기론은 부처님 때부터 2600년이 흐른 지금까지 하나의 성격과 내용으로 변함없이 이어온 것이 아니다. 따라서 오늘날 현대인이 깨달음을 얻으려면 먼저 부처님 당시부터 진화되어왔던 다양한 모습의 연기론을 알기 위한 노력을 선행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요령 있게 습득하면 이해하는데 그리 많은 시간을 요하지 않을 것이다. 세세한 용어나 분류를 다 기억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큰 윤곽과 핵심을 알면 세부 용어나 분류, 개념들은 스마트폰 하나라도 금방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가장 좋은 것은 불교개론서를 통해 연기나 공에 대한 개념을 차분히 이해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다음 초기불교경전에 직접 도전하여 연기에 대한 부처님의 다양한 가르침을 직접 공부해 본다. 그리고 연기를 대승불교적으로 해석한 반야부 경전이나 중관사상에 대한 공부를 하면 금상첨화다. 공부하는 과정에서 연기와 공에 대한 개념에 대해 깊이 사유함은 필수다. 연기나 공에 대한 내용 자체가 워낙 합리적이고 과학적이라 어느 정도 지적인 능력만 면 그 개념을 파악하기가 어렵지 않다.

하지만 연기와 공의 개념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했다 하더라도 그 내용들을 오늘의 현대사회의 삶들의 문제에 바로 적용하여 만족을 얻기에는 미흡함을 느낄 것이다. 물론 그 가르침이 무려 2500년 전에 천명된 뛰어난 가르침이라는 점에서 경탄하기도 하겠지만.

그래서 오늘날의 문명적 수준에서 현대인의 삶의 문제의식으로 깊은 탐구와 사유를 하는 것이 필요하다. 자연과학적 지식과도 비교해보고, 생물학이나 진화론과 대비해 보기도 하고, 사회현상과 각종문제에도 연기론을 대입하여 사유해 보아야 한다.

과거에는 기억에 의존한 사띠와 간화선을 했지만, 이제는 기억을 대체하는 기록문화를 활용하는 것도 유용하다. 부처님과 제자들의 연기와 공의 가르침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책을 열람하면서 사유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다. 부처님의 가르침과 과거 고승들의 훌륭한 말씀은 이제 고스란히 책에 담겨 있다. 독서와 사유야 말로 이 현대사회의 사띠이자 간화선이다. 물론 이러한 책의 내용을 일차적으로 요령있게 알기위해선 훌륭한 강의와 설법이 필수적이겠다.

스마트폰의 검색 기능도 우리의 기억을 도와주고, 보지 못했던 자료나 내용도 곧바로 찾아 열람할 수 있게 해주고 있다. 우리는 버스나 지하철 등 여행 중에도 검색한 내용을 확인하거나 읽어볼 수 있고, 그 내용을 찬찬히 사유할 수 있다. 그렇다면 스마트폰 검색을 통한 사유도 현대인의 생활 속의 사띠기능의 한 부분을 담당할 수 있다. 그러기 때문에 생활 속에서도 틈틈이 공부가 가능하다.

검색으로 접하게 되는 문서정보가 엄정성을 담보하지 못하고, 부분적인 단편적 차원의 내용이라 지적할 수 있다. 하지만 초기의 사띠나 간화선에서 기억의 형태로 사유하는 ‘설법’ ‘이야기’ ‘대화’들도 기억하기 좋은 길이로 정리되어 있는 짤막한 것들이다.

부연하자면 화두(話頭)는 글자 그대로 ‘이야기’로서 ‘이야기하다(話)’라는 동사에다가 이를 명사화 시키는 ‘두(頭)’를 붙여 합성한 단어다. 그래서 간화선은 이야기(화두)를 살펴보는 선을 말하며, 화두선이라고도 한다. 화두(이야기)는 대개 마음속으로 읽으면 30초를 넘지 않는 짧은 내용이다. 심지어 한 구절, 한 단어인 화두도 있지 않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화두들은 우리들을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핵심적이고도 풍부한 음미꺼리로 가득 차 있다.

문제는 우리가 사유하는 내용이 길고 짧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평소에 가진 깊은 불교적 문제의식으로 그것들을 살피면서 어떻게 사유하느냐에 달렸다. 그렇다면 읽거나 검색하는 그 내용이 불서(佛書)이건, 문학서이건, 과학서나 일반적 철학서라도 불교적 문제의식으로 깊은 사유로 할 수 있으며, 기본적인 연기와 공의 생각을 현대적으로 심화시키고 확장할 수가 있는 것이다.

오늘날 현실적으로 시행되는 간화선은 초기의 간화선 방법과는 달리 좌선의 자세로 앉아서 선정삼매 속에서 무념의 참선경지를 이루거나, 특정 어구(語句)를 의심하는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다.

하지만 현대문명사회에서 현대인들이 잘 깨닫기(이해하기) 위해선 경전과 어록, 그리고 다양한 독서를 하면서 탐구하는 마음으로 사유하면서 읽는 것으로도 가능하다. 이 방법이 현대인들에게 보다 현실적이고도 적합한 사띠공부가 아닐까?

책을 읽을 여건이 아닐 때는 평소 기억하거나 생각하고 있는 특정 주제에 대해서 사유해도 좋다. 이 것 저 것 검색하다가 평소 관심가지고 있는 문제와 관련된 좋은 글을 보게 되면 이를 사유할 수도 있다. 과거 책 없었던 시절에는 짤막하거나 부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는 것을 의지해 공부하던 시절이 있었다. 이에 비해서는 얼마나 불교공부하기 좋은 시절인가?

읽다가는 중간에 생각하는 내용에 대해 상념에 빠져 시간이 흘러도 좋다. 끝없는 검증과 비판적 성찰이 필요하다.

연기, 공, 자비 등 불교적 문제의식을 가지는 것을 전제로 한다면 불교경전이 아닌 일반 자연과학이나 진화론 등 생물학과 뇌과학을 탐구하며 사유하는 것도 훌륭한 사띠일 것이다. 심리학, 뇌과학, 신경과학, 유전학, 사회학, 경제학, 물리학, 윤리학의 책들도 훌륭한 불교공부꺼리이다. 이들에 대한 공부는 불교의 연기와 공, 그리고 자비에 대한 이론을 대폭 확장시켜주고 구체화 시키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기독교 등 서양종교에 대한 내용을 살펴보는 것도 대승불교의 불보살신앙을 제대로 정립하여 펼치는데 참고가 될 것이다.

현대사회를 훌륭하게 비춰주고 작동하는 연기론을 만들기 위해서는 오늘의 시대의 여러 문제의 핵심을 알아야 할 것이다.

만들어가는 연기론이라는 말이 성립할 수 있다면, 깨달음도 시대마다 상황마다 사람마다 계속 만들어가는 것일 수도 있다. 따라서 깨달음은 완성태가 아닐 수도 있는 것이다.

나는 <깨달음과 역사>에서 ‘깨달음’과 ‘역사’가 서로 연계되어야 하지만 다른 차원의 영역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깨달음’은 연기를 잘 이해한다는 영역이고, ‘역사’는 방향과 내용을 선택하여 구체적으로 행위 하는 것을 말한다.

좀 전에 언급한 ‘윤리’ ‘정의’ ‘평화’ ‘공정’ ‘평화’등은 <깨달음과 역사>의 관점에서 말한다면 ‘역사’의 영역이다. 즉 불교에서 ‘지혜’와 대비되어 말하는 ‘자비’의 영역이다. 하지만 ‘역사’ ‘자비’의 영역이 깨달음과 다른 차원의 영역이라 하여, 깨달음과 역사라는 이 둘을 분리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다른 차원의 두 영역을 하나의 삶에 결합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주장이다. 예컨대 ‘보디(깨달음)’만 있고 ‘사트바(역사)’의 영역이 없으면 소승적 아라한일 뿐이다. 또한 보디가 없는 역사행은 범부중생의 삶일 뿐이다.

깨달음과 역사는 다른 차원의 영역이지만 이 둘을 결합하면 ‘보디사트바(보살)’가 된다. 연기와 공을 잘 이해하는 깨달음을 얻어 존재들의 변화성과 관계성을 통찰함으로서 실재의식으로부터 해탈한 자유정신을 얻은 자가 곧 아라한이다. 그리고 이러한 이해에 도달한 아라한이 그가 살고 있는 역사에 현실적으로 참여하고자 하는 의도적인 마음을 내어서 실제로 각종 바라밀행(다양한 방편행)을 하는 사람, 이를 일러 보살이라 한다.

이 글에서는 주로 깨달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하지만 깨달음을 얻은 자가 반드시 염두에 두어 도달해야 하는 역사(사트바)의 영역인 ‘자비’ ‘윤리’ ‘정의’ ‘평화’ 등을 곁들여 말한 것은 이러한 까닭이다.(‘역사’ ‘자비’의 영역을 뜻하는 불교의 사트바 이론에 대해서는 추후 다시 별론하고자 한다)

‘깨달음’의 문제는 필경 이러한 ‘역사’의 영역과 만나야 된다. 따라서 ‘역사’는 ‘깨달음’의 연장선에서 도달하는 깨달음의 다른 이름일지 모른다. 보살의 역사적 삶 밑바탕과 내용에는 깨달음(보디)이 깔려 있다.

‘깨달음’이란 시공도 없는 초월적인 우주적 공간이라 비유할 수 있다. 이러한 ‘깨달음’이 시간과 공간을 가진 삶의 영역인 지구의 대기권으로 진입한 것이 ‘역사’이다.

이것이 <깨달음과 역사>에서 주장한 ‘보디’+‘사트바’ 즉, 보디사트바(보살)의 개념이다. 보살은 역사성으로부터 해탈의 자유를 담보하면서, 동시에 역사 속에서 목표를 세워 행하는 삶이다. 이것이 보살의 머물지 않는 구체적인 자비행이다. 그렇지만 그 삶은 누구보다 더 뜨거울 수 있고, 적극적이고 유연하면서 풍부할 수 있다.

깨달음을 ‘이해(understanding)'라고 할 때 제기되는 질문들

“깨달음이란 이해(understanding)'다”라고 하면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질문이 제기될 수 있겠다.

첫째, 불교의 깨달음이란 것이 존재들의 속성을 잘 이해하는 정도의 것이라면, 불교는 일반적 사상이나 철학과 무엇이 다른가?

- 이해한다는 측면에선 별 차이가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해하는 그 내용이 무엇이냐가 관건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은 연기와 공의 관점이다. 사실 이러한 관점을 가지고 있는 학설이나 철학은 없다. 연기론에 입각하여 무아(無我), 무상(無常), 고(苦)의 관점을 도출한 것은 불교를 제외하고는 어떤 학설이나 철학에서도 있어본 적이 없다. 그런 점에서 연기와 공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한다는 불교의 깨달음은 그 무엇보다 소중하고 뛰어나다. 이 하나만 가지고도 불교는 일반적 사상이나 철학과는 다른 것이다.

불교의 입장에서는 세상의 모든 사상을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비실재론의 입장에 서는 불교의 연기론이 그 하나요, 또 하나는 실재론의 입장에 서있는 여타의 사상과 철학이다. 불교를 제외하고는 모든 사상과 종교들이 실재론에 서 있다는 점에서 불교는 독보적이며 독창적이다.

실재론은 객관적 실재론, 주관적 실재론, 일원론적 실재론, 이원론적 실재론, 다원론적 실재론, 물질적 실재론, 정신적 실재론 등 온갖 종류로 분류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이 실재론의 기초 위에 서 있는 한 불교와 근본적 패러다임이 다른 것이다.

신(神), 물질, 정신, 개념 등 어떠한 존재양태도 무아, 무상이라는 연기적 관점으로 보면 그 실재를 인정받지 못한다. 실재를 전재하지 않고도 세상을 존재양태를 설명할 수 있고,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을 불교 이외의 사상과 종교, 심지어 과학에서는 상상도 못한다.

이러한 연기에 대한 이해를 ‘보디(깨달음)’이라 하는데, 이러한 불교의 이해는 신비한 그 어떤 경지로 포장하지 않아도 세상에서 가장 독보적이고 뛰어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동안 세상은 갖가지의 실재론적인 생각과 이론으로 살아오고 발전해 왔다. 이제 비실재론적인 생각으로 여러 가지 난제들을 해결하고 세상을 크게 변화시키고 발전시켜나가야 할 시대에 이르렀는지 모른다. 사실 그동안 불교의 비실재론적 이론은 불교경전과 이론에서만 제시되었을 뿐, 실제 사회와 역사문제에 적용되어 꽃 피어본 적이 없었다.

둘째, 연기나 공을 잘 이해하면, 불교신자라 할 수 있나? 일반인도 사상적 호기심으로 연기나 공에 대해 관심을 기울일 수 있고, 그럴 경우 얼마든지 이해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심지어 다른 종교를 신앙하는 사람도 그러하지 않겠는가?

- 어떤 사람을 불교신자라 할 수 있는가라는 정의에 따라 구분될 수 있다. 불교신자는 삼귀의를 하고 오계 등 불교에서 강조하는 윤리적 규범을 준수하고자 하고, 사찰의 법회나 참석하기도 하며, 스스로 불자라고 자임하는 경우를 말한다고 정의하면 될 것이다.

하지만 불교신자가 아니더라도(심지어 다른 이교도라도) 불교의 연기론을 잘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연기론에 입각한 세계관과 보살행에 준하는 사회생활을 한다면 그를 불교적 과학자, 불교적 예술가, 불교적 정치인, 불교적 기독교인 등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당사자가 그렇게 불리기를 원하지 않을 수는 있겠지만.

셋째, 이해하는 정도의 깨달음을 가지고 과연 생사문제를 해결할 수 있나? 괴로움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나?

- ‘생(生)’ 이라는 것과 ‘사(死)’라는 것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이 문제의 해결은 달라질 수 있다. 연기론을 잘 이해하면 생과 사를 보는 관점이 달라진다. 어떤 것을 생이라고 보고, 어떤 것을 사라고 보느냐를 연기의 관점으로 비추어 보면 우리가 통념적으로 생각하는 생과 사는 그 실재성이 없음을 알게 될 것이다.(<불설노부인경>, ‘육조혜능과 영가스님과의 첫 만남의 대화’는 이 문제에 대한 대표적인 설법임)

앞서 말한 ‘이해하는 깨달음’과 ‘이루는 깨달음’의 경우로 살펴보면, ‘이해하는 깨달음’은 생사해탈을 실제로 태어나고 죽는 일이 없다는 뜻으로 말하지 않는다. 생과 사라는 것이 실재성이 없는 것임을 이해하는 것이며, 그를 통해 그것들에 대한 오해된 실재성으로부터 해탈하는 것을 말한다. 실제 현실에서는 외형적으로 아무런 변화가 차이가 없지만 이를 수용하는 마음과 자세가 달라지는 것이다.

반면 ‘이루는 깨달음’은 생사해탈을 실제로 태어나고 죽는 일이 없다는 뜻으로 말한다. 물론 그런 일이 있었는지, 가능한 일인지는 확인되거나 검증되지 않았다.

‘괴로움’의 문제도 그렇다. ‘이해하는 깨달음’은 괴로움을 연기의 관점으로 비춰보아 그 ‘실체성이 없음(연기성)’을 알아 그 괴로움으로부터 원천적인 해탈된 마음을 얻는다.(반야심경의 첫 구절의 내용도 이와 같음)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현실에서 나타나고 진행되고 있는 괴로움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그 현실적 유래와 형성과정을 살펴(이것은 연기를 현실적인 조건발생의 관점으로 살피는 일임) 현실 속에서 극복하는 노력을 별도로 해야 한다.

괴로움이라는 그 실체성으로부터 해탈한 이해와, 그에 따른 원천적인 자유의식을 획득했다 하더라도 현실사회에서 그 괴로움을 문제를 구체적으로 극복하는 문제는 또 다른 차원에서 노력해야 하는 일인 것이다. 이것은 존재의 연기성(공성)을 통찰해 잘 이해하는 것과 별도의 사트바(현실역사) 차원의 영역읜 문제다.

사트바 영역에서의 괴로움 문제에 대한 해결여부와 해결 정도는 현실적 여건과 역량에 좌우될 것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은 존재의 연기성(공성)을 잘 이해하여 존재성(역사성)으로부터 원천적인 해탈한 자유의식을 획득하는 것이요, 동시에 이런 자유의식을 획득한 자가 현실 속에서 괴로움 등의 문제를 구체적으로 해결하는 것은 또 다른 현실영역의 해결과제라는 것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과 ‘역사(사트바)’는 서로 다른 차원의 영역임을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이에 대한 몰이해와 그에 따른 혼란이 매우 크다.

설사 ‘이해하는 깨달음’을 얻은 사람이 현실역사에서 괴로움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더라도 그의 깨달음은 훼손 받지 않는다.

‘이루는 깨달음’을 얻은 사람은 실제현실에서 곧바로 스스로의 괴로움을 없애버리고, 모든 중생들의 괴로움도 없애버릴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경우를 보지도 못했고, 그런 깨달음을 이룬 사람이 있는지 잘 모르겠다.

[1310호 / 2015년 9월 1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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