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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가평 현등사 함허득통 탑과 석등

기자명 신대현

고려·조선 전환기, 전통양식과 변화 공존시킨 융합의 미덕

▲ 함허득통탑과 석등.

예술의 양식(Style)은 늘 그 시대의 기억을 담고 있다. 특히 한창 전성기에 만들어진 작품은 당대의 정신과 문화를 어떠한 기록보다도 더 잘 대변해준다. 그래서 예술은 곧 사료(史料)이기도 하다. 그런데 한 시대에서 다른 시대로 넘어갈 때 만들어진 작품은 어떨까? 이른바 전환기 또는 과도기에 만들어진 미술에는 늘 둘 사이의 접점과 경계에 섰던 고뇌의 흔적이 묻어 있기 마련이다. 지금까지는 이런 과도기 작품에 그다지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완성된 아름다움을 위주로 미술사를 보려는 경향 때문이다.

신라·고려 미술 전통양식인
팔각원당형 부도 형식 근간
지대석·기단부 건축양식은
조선 전기 특징 반영해 눈길

지붕 기울기·처마엔 기교 자제
조선 초기 양식 정착 과정 담겨
묘탑·석등 함께 장엄한 것도
새롭게 나타난 형식으로 주목

그러나 사실 사람도 성장통을 겪고 좌절이나 방황도 해봐야 인생의 참맛을 제대로 알듯이 예술도 이런 질곡과 주저(躊躇)의 과정을 겪어야 진정한 멋을 꽃피운다. 이런 어려움을 보내야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아름다움을 만들어낼 수 있으니, 이를 ‘머뭇거림의 미(美)’라고 해야할까.

시대가 바뀌는 전환기에 앞에서부터 내려온 전통의 한 자락을 속으로 잘 간직하고 있는 동시에 새로운 양식의 싹을 틔우고 있는 대표적인 작품이 가평 현등사의 ‘함허득통탑과 석등’이다. 함허득통탑과 석등은 고려 말에 태어나 조선시대 초기에 활동한 고승 함허 득통(1376~1433) 스님의 묘탑(부도)과 그 앞에 장엄된 석등이다. 묘탑과 석등은 서로 다른 장르지만, 둘을 한데 장엄하는 새로운 형식을 선뵌 것이므로 한 유적으로 살펴야 작품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 함허득통탑.

이 탑과 석등은 현등사 경내에서 서쪽으로 200m쯤 떨어진 능선에 자리한다. 나지막하게 마련된 석축 2단에 각각 묘탑과 석등이 일렬로 배치되어 있다. 먼저 묘탑을 설명하면, 9세기부터 유행해 고려시대까지 이어져온 이른바 ‘팔각원당형(八角圓堂形) 부도’를 근간으로 하고 있다. 팔각원당형 부도는 지면과 맞닿는 바닥돌인 지대석과 기단부는 팔각형이고 탑신이 둥근 형태의 부도를 말한다. 이 양식에서는 특히 팔각이 강조되고 있는데 팔각은 신라와 고려 미술에서 거의 빠짐없이 들어가던 주요 장식이었다. 하지만 조선시대 묘탑에서는 팔각에 대한 선호도가 점차 옅어지고 대신 둥근 원형이 그 자리를 차지하는 모습으로 변한다. 교종에서 선종으로 넘어가는 당시의 시대상을 반영한 것이 아닌가 싶다. 다시 말해서 원은 원공(圓空)이라는 선적(禪的) 의미를 상징하는 장엄으로 보이는 것이다. 현등사 묘탑에 여전히 팔각이 남아있는 것을 통해 앞선 시대 전통의 가치가 아직도 존중되는 사회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또 높이가 266cm로, 기단부가 대폭 축소되면서 키가 대부분 2m를 넘지 않는 조선시대 묘탑들과 비교하면 결코 작지 않은 편이니, 이 역시 장대한 미술을 좋아했던 과거의 전통이 숨 쉬는 부분이다. 작품성에서 크기가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기리려는 대상(여기서는 득통 스님)에 대한 존숭의 마음이 그만큼 크게 표현하려 한 것으로 볼 수는 있다.

이 묘탑에서는 지대석과 기단이 흥미롭다. 건축수법은 먼저 지면 위에 팔각형으로 디자인된 지대석을 놓고 그 위에 역시 팔각형의 기단을 2단으로 올렸다. 그래서 얼핏 보면 전체가 마치 3단인 것처럼 보이지만 맨 아래 한 단은 지대석, 그 위 두 단은 기단부에 해당한다. 지대석은 지면과 붙어있어서 대체로 잘 눈에 띄지 않는데 비해 여기서는 기단부와 거의 비슷한 모양과 크기로 강조한 점이 특징이다. 아마도 불상의 대좌가 상중하 3단으로 처리되는 것과 같은 효과를 주기 위해서였던 것 같다. 지대석과 기단부의 이런 모습은 법주사 복천암의 수암화상탑(1480년)과 학조등곡화상탑(1514년) 등 조선 전기 묘탑의 특징인데, 현등사의 이 묘탑은 그런 유형의 작품 중에서 가장 시기가 빠른 작품이라는 데 의미가 있다. 새로운 양식의 선구를 보이는 것이다. 상층에 있는 기단 위는 탑신석을 올려놓기 위해 안쪽으로 원형 홈을 파고 그 위에 둥근 탑신석을 올려놓아 흔들리지 않고 단단하게 자리 잡도록 했다.

탑신은 공처럼 둥글고 중앙이 다소 볼록하게 나온 모습인데 한가운데에 묘탑의 주인공을 알려주는 ‘함허무준(涵虛無準)’ 당호(堂號)가 아래위 세로로 쓴 전서(篆書)로 음각했다. 탑신은 이 당호 외에 다른 글자나 무늬는 없다. 이렇게 별다른 꾸밈을 가하지 않은 것을 두고 장식성이 없다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보다는 소박하고 간결함을 미의 핵심으로 여겼던 조선시대 미의식이 본격적으로 반영된 것으로 이해하고 싶다. 탑신은 그 자체로 하나의 독립된 집을 상징하므로 탑신 위에는 지붕 모양의 옥개석이 놓이게 마련이다. 전제적으로 소박한 이 묘탑 중에서 가장 조각이 많고 장식성이 풍부한 곳이 바로 이 옥개석일 것 같다. 추녀와 사래도 표현했고, 지붕이 겹치는 부분에는 우동(隅棟, 내림마루)도 새기는 등 옥개석 아래위로 목조 건축의 일부를 조각으로 나타냄으로써 장식성을 더하고 있다. 지붕 모습은 여덟모가 진 이른바 팔모지붕이다. 이런 형태는 사모나 육모보다 모가 많다보니 그만큼 크기도 커질 수밖에 없어서 마치 커다란 갓을 씌운 것처럼 보여 삿갓지붕이라고도 한다. 옥개석 위에 얹힌 상륜부는 석탑의 그것과 큰 차이가 없고, 노반과 복발, 보륜과 보주가 각각 한 돌로 만들어졌다.

이 석등에서 지붕의 기울기, 곧 물매가 꽤 급한데다가 지붕선이 처마 끝까지 그대로 이어지는 점도 새로운 양식이 정착되어 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통일신라의 부도는 물매도 완만하고 처마도 끝에서 위로 한번 탁 쳐올려주는 게 보통인데, 이런 멋을 고려 후기부터는 별로 많이 구사하지 않았다. 현등사 묘탑에서 이런 기교가 극도로 자제된 것도 역시 조선이라는 새로운 세상의 풍조가 담겨서 그리 된 것 같다. 이 묘탑은 함허 스님이 입적한 1433년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보이므로 이 같은 장식과 기법은 곧 조선시대 초기의 양식이 정착되어 가는 과정을 살펴보는데 중요한 자료로 삼을 만하다.

▲ 함허득통탑 앞 석등.

묘탑 앞에 있는 석등은 높이 120cm로 자그마한 편이다. 얼핏 보면 묘탑 앞에 석등이 있는 배열이 낯설어 서로 다른 짝이 놓여 있는 것인가도 싶지만, 이 둘은 본래부터 같이 놓이도록 만들어졌다. 고려 말까지만 해도 석등은 석탑 앞에 세우는 게 보통이었지만 고려 말에서 조선 초 무렵이 되면서 이런 습관도 바뀌어 묘탑 앞에도 석등이 세워지기 시작한 것이다. 고승의 존재가치가 그만큼 높이 평가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고려 말인 1379년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사리탑과 조선 건국 직후인 1407년 양주 회암사 무학대사부도와 쌍사자석등이 그런 대표적 예이고, 그 밖에 나옹선사 부도와 석등, 지공선사부도와 석등 등의 예도 있다. 그래서 이 현등사 석등은 이런 새로운 경향이 완전히 자리 잡았음을 알려주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석등 몸체에 ‘涵虛’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는데 마멸이 심해 지금은 잘 알아보기가 어렵다.

석등은 기단부, 기둥인 간주석, 불을 놓는 자리인 화사석, 지붕에 해당하는 옥개석 그리고 그 위의 상륜부 등으로 구분된다. 이 석등도 옥개석 위에 받침이 마련되어 있는 걸로 볼 때 본래 보주 같은 상륜부가 있었던 것 같지만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기단부는 납작하지만 맨 아래에 받침도 있고 위는 곡선으로 다듬어 꾸몄다. 기단은 평면 사각형으로 하여 이중으로 되었는데 위쪽 기단 네 모서리를 활처럼 부드럽게 휘어놓고 그 위에 높은 받침을 두어 거기에 간주석을 받칠 수 있게 했다. 기단부의 이런 모습은 이후 조선시대 석등에 변함없이 나타나는 방식이며, 이와 비슷한 수법이 회암사 지공선사 및 선각왕사 석등에서도 나타난다. 사각형 화사석은 사방에 화창(火窓)을 뚫어 불빛이 새어나가게 했고, 그 위 옥개석은 아래에 넓은 받침을 두고 모서리를 약간 치켜 올린 후 귀마루를 활 모양으로 휘고 두툼하게 표현했다.

이 석등은 신라와 고려 석등의 큼직하고 늘씬한 모습에 익숙한 사람에게는 왜소하고 모양도 단순해 멋과는 거리가 멀어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미술품은 만들어진 당시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게 중요하다. 조선시대 불교는 여러 가지 면에서 제약을 받아 이전까지 내려오던 관습이나 전통을 그대로 유지하기에는 매우 버거운 시대상황을 맞았다. 새로운 변화가 필요했다. 미술에서도 그런 변화의 움직임이 나타나는데 이 석등이 그 한 예라고 할 수 있다. 전대인 고려의 화려한 모습을 과감히 버리고 새 시대인 조선의 담백한 시대상과 간결함의 가치관을 작품에 반영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크고 섬세한 기존 석등의 양식을 놓아버리고 왕릉이나 관청에서 사용하던 등기구인 다소 장명등(長明燈)의 형식을 취함으로써 사회에 등지지 않고 서로 맞춰나가려는 융합의 몸짓을 먼저 보였다. 이후 만들어진 사찰 석등 대부분 이런 모습을 기본으로 채택한 것을 보면 이런 시도는 어느 정도 성공한 것 같다.

현등사의 함허득통탑과 석등에는 고려에서 조선으로 바뀌는 격동의 시대에서 양자의 가치와 미를 절충하고 융합시키는 역할을 하려 했던 당시 사람들의 고뇌가 읽힌다. ‘중간’은 늘 힘들고 어정쩡할 수밖에 없고, 커다란 변화 앞에서 머뭇거림이 없을 수 없다. 그래도 그 시대의 분위기를 허세 없이 있는 그대로 잘 표현해낸 미덕은 결코 작은 것이 아니다. 지난 세월의 흔적을 곰삭아 여기에 새로 펼쳐질 시대에 어울리는 양식을 길러내는 일은 마치 진주조개가 진주를 품어내는 것처럼 힘들고 귀한 일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런 작품은 오히려 오늘날 잘 전하지 않아 쉽게 보기 힘들다. 사람이나 미술이나 겸손함은 드러나지 않아서 그런 모양일까. 이런 점에서도 함허득통탑과 석등은 우리가 소중하게 여겨야 할 문화재일 것이다.

신대현 사찰문화연구원  연구위원  buam0915@hanmail.net

[1309호 / 2015년 9월 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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