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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존 버거, 장 모르의 ‘행운아-어느 시골의사 이야기’

기자명 이미령

불행이 넘쳐나는 시대, 생각하며 사는 ‘행운아’가 되는 법

‘행운아-어느 시골의사 이야기’
존 버거, 장 모르
김현우 옮김
눈빛
‘사회지도층인사’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이 말에는 권력이나 금력이 아니라 그가 속한 시대의 정신적인 가치를 주도해나가는 인물이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이 사회지도층인사에는 나름 특정한 직업군이 포함되어 있는데 대체로 법조인, 교육자, 의사 등이 들어갑니다. 이들은 이권에 초연하고, 언제나 약자의 편에 서 있으며, 절망적인 처지에 놓였을 때 마지막 구원의 손길을 드리워주는 사람들이라고들 믿어왔습니다.

‘사회지도층’ 의미 되짚는 작품
영국 시골의사 ‘사샬’이 주인공
마을사람 삶까지 보듬는 자세
고통 알아주는 진정성 지녀

마을공동체 속 존경의 대상
자신을 ‘행운아’라 칭하지만
결국 스스로 만들어가는 과정
작가 존버거, 사샬 통해 현실 봐

그런데 이 사회지도층인사들이 오히려 보통 사람들보다 못한 윤리의식, 도덕관념을 지니고 있음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들에 대해 품었던 동경심은 결국 죄다 환상이요 허상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묘하게도 우리는 사회지도층인사들의 ‘타락’에 분개하고 신랄하게 비난하지만, 여전히 다급한 상황에 처하면 저들의 옷자락을 붙잡고 매달립니다. 그런 면에서 저들은 우리의 영원한 지도층인사인지도 모릅니다.

영국의 어느 시골마을에 살고 있는 존 사샬(John Sassall)이라는 의사 역시 그렇습니다. 존 사샬은 모든 것이 낙후되어 있는 시골마을의 개업의로서, 그 마을 사람 모두가 ‘고객’입니다. 자신들에 비해 고급지식을 무척 많이 배운 그를 향해 마을사람들은 “왜 그렇게 좋은 머리로…”라고 말합니다. 도시에 나가면 더 출세할 수도 있는데 그 좋은 조건들을 가지고 왜 시골구석에서 자기들 같은 가난하고 무지한 자들을 치료하는 일로 인생을 낭비하느냐는 것이지요. 이런 점에서 그는 마을사람들에 비해 특권을 누리고 있습니다. 아무튼 그는 그 마을에서 사회지도층인사입니다.

존 사샬에 대해서 조금 더 알아볼까요?

마을 사람들 가운데 젊은이 대부분은 그의 도움을 받아 태어났고, 늙은이들 대부분 역시 그의 마지막 왕진을 끝으로 이승을 떠나갑니다. 이렇게 그는 왕진을 자주 다니기 때문에 사람들의 집안 구석구석을 잘 알고 있고, 그들의 인간관계가 어떻게 얽히고설켜 있는지도 환합니다. 인간 개개인의 삶의 이력에 대해 환할 뿐만 아니라 그 한 개인의 가족구성원과의 관계까지도 그는 알고 있습니다. 이런 그의 직업이 ‘의사’라는 사실이 퍽이나 흥미롭습니다.

▲ 일러스트=강병호 화백

의사는 병만 고치면 되지 뭘 그런 것까지 다 알아야 하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존 사샬은 다릅니다. 그는 환자를 맞이할 때 그의 아픈 부위만 보는 의사가 아닙니다. 그는 환자와 날씨 이야기며 사는 이야기, 그리고 예전에 치료받았던 신체부위에 대한 후일담을 나눕니다. 그에게 환자는 병에 걸려서 의사를 돈 벌어주러 찾아온 ‘고객’이 아니라, 몸이든 마음이든 어떤 곳에 상처를 입어서 찾아온 어린아이입니다. 환자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왜 그가 ‘그런 부위’가 아픈지를 생각해보는 의사입니다.

문진이 끝나고 곧이어 아픈 부위에 대해 구체적인 진료가 시작됩니다. 환자의 몸에 주사바늘을 꽂는다거나 아픈 부위를 두드리며 그 반응을 세밀하게 살피는 순서입니다. 이럴 때 환자는 긴장하고, 또 아픔을 호소합니다.

“아, 아, 아파요.”

의사가 진찰하고 치료하느라 건드릴 때 환자는 이렇게 엄살을 부립니다. 어쩌면 우리가 자주 만나는 의사나 간호사들은 환자의 신음이나 비명소리를 무시하거나 “좀 아플 거예요. 참으세요.”라며 유난떨지 말라고 핀잔을 줄 겁니다.

존 사샬은 다릅니다. 그는 ‘아! 아파요. 거기는 제 목숨 같은 뎁니다. 바늘을 찔러 넣은 바로 거기요.’라는 환자의 하소연을 놓치지 않습니다. 그는 이렇게 응수합니다.

“압니다. 압니다. 기분이 어떤지 압니다. 나는 지금 눈 주위가 그래요. 거기 뭐가 닿으면 도저히 못 견디겠습니다. 나한테는 거기가 목숨 같은 자리인 셈이죠. 눈 바로 밑에 말입니다.”

작가 존 버거(Jonn Berger 1926~)는 영국 시골마을 의사 존 사샬의 이런 진료모습을 지켜보다 이렇게 정의내립니다.

‘알아줌’

그의 ‘알아줌’은 좀 특별하게 기능합니다. 그의 병원에는 의사가 그 한 사람밖에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는 다른 의료진들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가능하면 그는 모든 것을 혼자 힘으로 밝히고 싶어한다”고 존 버거는 정의내립니다. 사람의 질병을 부위별로 나누지 않고 종합적으로 살피려는 사람은 한 환자의 진료를 각 분야 전문가들에게 나눠주지 않고 혼자서 합니다. 그래서 존 사샬을 만나는 환자는 팔이 아픈 사람, 다리가 아픈 사람, 아이 낳으러 온 사람으로 존재하지 않고, 온전한 한 인간으로서 의사 앞에 존재합니다.

작가 존 버거는 세상이 병들고 인간이 소외되는 데에는 18세기 산업혁명과 함께 세상에 정착한 ‘노동분업’을 그 이유로 보고 있습니다. 노동분업은 사람을 컨베이어벨트 앞에서 자기 맡은 분야만 하게 했습니다. 자신이 만들어내는 사물을 전체적으로, 총체적으로, 유기적으로 살펴보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창조적 존재였던 인간은 이제 나사 밖에 돌리지 못하거나 반짝반짝 윤만 내거나 개수만 맞추는 노동자로 전락하게 되었습니다. 시계 초침소리에 맞춰 단 한 가지 노동에만 매달리며 목표 수치를 달성하도록 내몰린 인간들은 세상의 유기적 조화에서 내쳐지고, 쪼그라듭니다. 이런 불행은 의료행위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의사가 자기 앞에 고통의 문을 연 사람을 전체적으로 살피지 못하고, 아픈 부위만 들여다보는 것도 이와 다르지 않다는 생각입니다. 환자는 아픈 육체적 부위와 함께 아픈 삶을 의사에게 내보이는데, 의사는 그걸 보지 못합니다. 시골의사 존 사샬은 그래서 요즘 도시의 의사들과 다르다는 겁니다.

“진찰을 잘 하는 의사는 드문데, 이는 그 의사에게 의학지식이 부족해서라기보다는, 대부분의 의사들이 관련가능성이 있는 모든 사실들-단순히 신체적인 것뿐만 아니라 감정적, 역사적, 환경적인 것까지-고려할 만한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시골의사 존 사샬은 이처럼 환자를 온전한 하나의 인간으로 파악하기 때문에 그 역시 총체적인 인간이 되려고 노력합니다. “환자의 질병과 환자의 인간 전체를 분리하는 일이 없기 때문에” 모든 것을 전체적으로 잘 살필 수 있는 눈과 가슴을 가지려고 그는 노력하고 있으며, 그래서 그는 상식이라는 늪에 빠지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는 늘 사색하고, 시험해보고, 비교해보는 일을 멈추지 않습니다. 그에게 있어 매일 진료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환자들 중에 그 어떤 환자도 똑같은 증상을 가진 이는 없고, 똑같은 결론에 이르는 이도 없습니다. 이런 가운데 사샬은 자신이 알고 있다는 것이 과연 맞는 것인지, 그동안 상식으로 여겨지던 것들이 정말 옳은 것인지는 늘 의심하고 사색해봐야 한다고 말합니다.

존 사샬은 시골마을 한 곳에서 오랫동안 의사로 일해 왔기 때문에 그에게는 환자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속해서 살고 있는 ‘마을’이 남다릅니다. 그는 ‘마을’을 알아갑니다. ‘마을’을 진료하고, ‘마을’을 치료하고, ‘마을’을 관찰합니다. 마을에 회합이 있으면 그는 달려갑니다. 크고 작은 회의에 참석해서 의견을 내고 사람들의 말을 기록합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그를 그저 ‘의사’로만 여기지 않고 뭔가 자신들의 고통과 한계를 떠안고 운명이나 불행과 맞서 싸워줄 대리인으로 여깁니다. 이런 사람이기에 존 사샬은 그 마을의 ‘사회지도층인사’입니다.

그는 마을의 여느 사람들보다 부자입니다. 그는 좋은 집에 살고 있고, 좋은 양복을 입고 다니고, 자동차도 좋고, 또 그의 자식들은 좋은 학교에 다닙니다. 그의 부는 아픈 사람들이 가져다 준 돈에서 나왔습니다. 그는 이런 부를 정당하게 누립니다. 그리고 이런 의사의 부를 마을 사람들은 질투도 비난도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모임에서 ‘의사’라는 존재가 얼마나 귀하고 존경받아야 하는 인물인지는 두 말하면 잔소리입니다. 존 사샬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아 마땅하고, 돈을 잘 벌어도 당연합니다. 사람들을 알아주고 공감하고 그들의 처지를 개선하려고 노력하면서 자신의 행동과 판단에 늘 의심을 품는 그에게 보내는 마을사람들의 지지와 존경을 그는 수긍합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행운아’라고 부릅니다.

행운아, 다른 말로 하면 사회지도층 인사라는 말이 되겠지요. 이 말이 여전히 우습게 들리지만, 이런 존재는 필요합니다.

“인간의 삶을 허비하게 만들고, 인간 개개인의 위선을 심화시키며, 점진적으로 인간 자체를 황폐하고 공허하게 만드는 현대사회 속에서 과연‘총체적 인간’이란 존재할 수 있는가?”를 화두로 삼아온 작가 존 버거가 시골의사 존 사샬을 그런 전형적인 인물로 포착한 것은 참 잘 한 일인 것 같습니다.

이 책 ‘행운아(A Fortunate Man 1967)’는 아주 작은 책입니다. 하지만 이 책에는 참 많은 생각이 담겨 있습니다. 많은 이론이나 주장이 아니라 많은 ‘생각’이라 말했습니다.

우리는 ‘생각’을 하지 않고 삽니다.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생각하는 법도 잊어버렸습니다. 잡다한 생각들의 홍수에 떠밀려 다니지만 뭔가 하나를 사무치게 부여잡고 일관되게 밀고 나가지도 못합니다.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르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불행한 사람들이 넘쳐나는 이 시대, 좌절과 소외가 넘쳐나다 못해 인생에서 포기하는 항목들을 열거하다가 ‘엔포’까지 가버린 이 불행한 시기에, 생각하며 사는 시골의사 존 사샬은 인간이 행운아가 될 수 있는 길을 그의 직업에서 그걸 보여주었고, 작가 존 버거는 그의 글에서 그걸 보여주었습니다. 아하! 이 책에 실린 장 모르의 흑백사진들은 인간의 온전한 모습을 더할 나위 없이 제대로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도 빼놓으면 안 되겠군요.

이미령 cittalmr@naver.com

[1309호 / 2015년 9월 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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