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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작가미상, ‘청령포도’

기자명 조정육

격동의 현장 속으로 들어가 명작을 탄생시키다

▲ 작가미상, ‘청령포도’, 1820년대, 종이에 채색, 20.5×36cm,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기리에 사는 여인 희명의 아이가 태어난 지 5년 만에 갑자기 눈이 멀었다. 하루는 그 어머니가 아이를 안고 분황사 좌전 북벽에 그린 천수대비 앞에 나아가서 아이에게 노래를 지어 빌게 하였더니 마침내 눈을 떴다. 그 노래는 이러하다.

일연, 세상에 희망 주기 위해
인각사에서 ‘삼국유사’ 편찬
현장답사·자료수집으로 완성
한국 문화유산의 보고로 칭송

단종 유배지 그린 ‘청령포도’
슬픈 이야기 생생히 깃들어
이야기만 들은 후 그렸다면
결코 현장감 표현 못했을 것

“무릎을 꿇으며 두 손을 모아 천수관음 앞에 빌어 사뢰옵니다. 천 개의 손과 천 개의 눈을 가지셨사오니, 하나를 내어 하나를 덜어 주옵소서. 두 눈이 먼 아이오니 하나라도 고쳐 주옵소서. 아아, 나에게 주신다면 자비가 클 것입니다.”

‘삼국유사(三國遺事)’ ‘탑상’ 편에 나오는 얘기다. 불교의 가피란 이를 두고 한 말일 것이다.

선덕왕 덕만이 병에 걸려 오랫동안 낫지 않았다. 흥륜사의 승려 법척은 왕명에 따라 병을 치료하였으나 오래도록 효험이 없었다. 이때에 밀본(密本)법사가 덕행으로 나라에 소문났으므로 왕은 신하들의 청을 들어 밀본을 궁 안으로 맞이하였다. 밀본은 왕의 침실 밖에 있으면서 ‘약사경’을 읽었는데 경을 다 읽자마자 가지고 있던 육환장이 침실 안으로 들어가 늙은 여우 한 마리와 법척을 찔러 뜰 아래로 거꾸로 내던졌고, 왕의 병이 곧 나았다. 이때 밀본의 머리 위에 오색의 신비로운 빛이 비쳤는데 보는 사람이 모두 놀라워했다.

‘삼국유사’ ‘신주’ 편에 나오는 얘기다. 올바른 믿음과 수행이란 이를 두고 한 말일 것이다.

강주의 선사(善士) 수십 명이 서방정토를 구하려는 뜻으로 주의 경계에 미타사를 세우고 만일을 기약으로 계를 만들었다. 그때 아간 귀진의 집에 한 여종이 있었는데 이름은 욱면(郁面)이었다. 욱면은 주인을 따라 절에 가서 마당에 서서 스님을 따라 염불했다. 주인은 그녀가 직분에 어긋남을 미워하여 매번 곡식 두 섬을 주면서 하루 저녁에 찧게 하였다. 욱면은 오후 7시부터 9시까지 찧는 것을 마치고 절에 가서 염불하였는데 밤낮으로 게을리하지 않았다. 욱면은 마당의 좌우에 긴 말뚝을 세우고 두 손바닥을 뚫어 노끈으로 꿰고 말뚝 위에 매어 놓고 합장하였으며, 좌우로 움직이면서 격려했다. 그때 공중에서 하늘의 외침이 있어 “욱면 낭자는 법당에 들어가서 염불하라”고 했다. 절의 무리가 그것을 듣고 여종에게 권하여 법당에 들어가 예에 따라 정진하게 했다. 오래지 않아 천상의 음악이 서쪽부터 들려오는데 여종이 솟구쳐 집의 들보를 뚫고 나갔다. 서쪽으로 가고 교외에 이르더니 육신을 버리고 부처의 몸으로 변해 나타났다. 연화좌에 앉더니 큰 광명을 발하면서 천천히 떠났는데 공중에서 음악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그 법당에는 지금도 구멍이 뚫어진 곳이 있다고 한다.

‘삼국유사’ ‘감통’ 편에 나오는 얘기다. 서방극락정토 발원염불이란 이를 두고 한 말일 것이다.

월면 스님은 일찍이 죽은 누이동생을 위하여 재를 올리고 향가를 지어 제사를 지냈는데, 갑자기 회오리바람이 일어나더니 종이돈을 불어서 서쪽 방향으로 날려 사라지게 했다. 향가인 제망매가는 다음과 같다.

“생사는 예 있으매 머뭇거리고, 나는 간다는 말도 못다 이르고 어찌 갑니까. 어느 가을 이른 바람에, 이에 저에 떨어질 낙엽처럼 한 가지에 나고서 가는 곳 모르는구나. 아아. 미타찰에서 만날 나, 도 닦으며 기다리겠노라.”

‘삼국유사’ ‘감통’ 편에 나오는 얘기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얘기는 이뿐만이 아니다. 우리 민족의 시조인 단군왕검에 대한 신화를 최초로 수록한 책이 ‘삼국유사’다. 원효대사와 의상대사의 구법활동, 김대성이 전생의 부모와 현생의 부모를 위해 석굴암과 불국사를 지은 사연, 항상 아미타불을 염불한 염불스님 등 불교와 관련된 내용이 무궁무진하게 들어있다. 진평왕이 하늘로부터 얻었다는 천사옥대, 황룡사장륙삼존불상, 황룡사9층목탑 등의 신라3보(新羅三寶)와 소리로 천하를 다스린다는 만파식적 얘기도 들어있다. 어디 그뿐인가. 한 노옹이 수로부인에게 꽃을 바치며 노래를 불렀다는 헌화가, 자신의 아내를 범한 역신을 용서하며 춤을 춘 처용의 아름다운 사연도 들어 있다. 향득이라는 사람이 흉년에 아버지가 굶어죽게 되자 자신의 다리 살을 베어 봉양했다는 내용과 품팔이하는 손순이 자신의 어린 아이가 늙은 어머니의 음식을 뺏어 먹자 아이를 묻으려했다는 내용도 들어 있다. 고조선에서 후삼국까지의 흥미진진한 역사를 57개의 항목으로 정리한 ‘삼국유사’의 저자가 일연(一然,1206~1289) 스님이다.

일연 스님은 자가 회연(晦然), 호가 목암(睦庵)으로 초기의 법명은 견명(見明)이었다. 9세에 불문에 들어 가지산문을 거친 후 나중에 국존(國尊)으로 추대되었다. 그는 임제선(臨濟禪)의 영향을 받은 간화선(看話禪)에 심취했으나 특정 종파에 얽매이지 않고 여러 종류의 불교 서적을 편수했다. 특히 79세에 인각사(麟角寺)에서 편찬한 ‘삼국유사’는 몽고침입 아래에서 신음하는 백성들에게 희망과 자부심을 주기 위한 목적으로 집필되었다. 그는 이곳저곳에 흩어진 수많은 자료를 수집하고 현장을 답사한 후 자신이 평생 수행한 경험과 지혜를 더해 ‘삼국유사’를 완성했다.

일연 스님이 쓴 ‘삼국유사’는 김부식(金富軾)이 쓴 ‘삼국사기’와 함께 한국고대사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역사서다. 그러나 ‘삼국유사’와 ‘삼국사기’는 글의 체계나 서술방식이 전혀 다르다. ‘삼국사기’가 인물과 왕조 중심의 기전체 서술이라면 ‘삼국유사’는 사건경과를 중요시하는 기사본말체 서술이다. 책을 집필한 의식의 차이도 명확하다. ‘삼국사기’가 중국 중심적이고 유교적이라면 ‘삼국유사’는 민족적인 자주의식을 바탕으로 우리의 전통문화를 계승하려는 측면이 더 강하다. 일연은 정사(正史)의 성격을 지닌 딱딱한 ‘삼국사기’와는 달리 자신의 관심을 끄는 인물이나 내용을 자유롭게 서술했다. 향가와 이두는 물론 불교에서의 신이한 감통과 민간 설화 등이 담긴 것도 그 이유 때문이다. 그래서 ‘삼국유사’는 한국 고대 문화와 역사를 알 수 있는 총체적인 문화유산의 보고로 평가받고 있다. 지금까지 필자가 연재한 한국 편 스님들 이야기도 원 바탕은 모두 ‘삼국유사’에서 발췌했다. 알고 보면 필자는 그저 일연 스님이 써 놓은 글을 편집한 것에 불과하다.

힘없는 어린 왕 단종(端宗,1441~1457)이 강원도 영월에 유배된 것은 그의 나이 16세 때인 1457년 6월이었다. 왕의 신분이 아니라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된 몸이었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11살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라야 했듯 영월에 유배 온 것도 자신의 뜻이 아니었다. 작은아버지인 수양대군의 엄명 때문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호랑이처럼 무서운 작은아버지의 눈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작은아버지의 눈길은 어린 노산군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무섭고 두려웠다. 노산군은 세 면이 강으로 가로막힌 청령포(淸?浦)에 갇혀 한양에 두고 온 아내를 생각했다. 아내가 너무 그리울 때는 높은 소나무 위에 올라가 한양 쪽을 바라보며 눈물을 삼켰다. 언젠가는 만날 수 있겠지. 날마다 그 기대감으로 하루하루를 견뎠다. 그러나 세상은 노산군을 그냥 내버려두지 않았다. 유배 온 지 석 달이 되던 9월에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들렸다. 경상도로 유배 간 숙부 금성대군이 단종 복위를 꾀하다 발각되었다는 소식이었다. 한 달 뒤인 10월에 노산군은 서인으로 강봉되어 영월 관아인 관풍헌(觀風軒)에서 사약을 받았다.

단종의 시신은 강물에 버려졌다. 죄인의 시신을 거두는 자는 죽음을 각오해야 했다. 모두 어린 왕의 시신을 외면했다. 그러나 죽이겠다고 위협해도 죽음을 무릎 쓰고서라도 의로운 행동을 하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영월의 하급 관리였던 엄흥도(嚴興道)가 가엾은 왕 단종의 시신을 수습하여 정중하게 장사를 치렀다. 그는 벼슬을 내려놓고 아들을 데리고 숨어 살았다. 단종을 모시던 시종들은 낙화암(洛花巖)에 올라가 강물에 몸을 던졌다. 한양에서는 수양대군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은 사육신의 죽음이 뒤따랐다.

세월이 흘러 숙종 때부터 단종을 추숭하기 위한 복원 사업이 시작되었다. 영월에 남겨진 단종의 유적지는 단정하게 정비되었다. 엄흥도가 몰래 꾸민 단종의 무덤은 장릉(莊陵)으로 격을 갖추었고 엄흥도는 사육신과 함께 창절사(彰節祠)에 배향되었다. 영, 정조 시대에는 단종과 충신들의 자취가 서린 곳을 8폭 기록화로 남겼다. 이것이 ‘월중도(越中圖)’다. ‘월중도’는 청록산수화풍으로 그린 회화식(繪畵式) 지도다. 땅의 형세와 건물 등을 지도의 형식을 빌려 그린 실경산수화다. ‘월중도’에는 단종의 능인 ‘장릉도’, 유배지 ‘청령포도’, 숨을 거둔 ‘관풍헌도’, 유배의 시름을 달랜  ‘자규루도’, 충신들의 사당인 ‘창절사도’, 시종들이 순절한 ‘낙화암도’를 비롯해 영월부 행정기관이 있던 ‘읍치도’와 영월부 형세를 그린 ‘영월도’가 들어있다.

그 중 ‘청령포도’는 단종이 유배되어 눈물로 세월을 보낸 장소다. 그마저도 겨우 석달 동안 목숨을 연명한 장소였다. 그런데 무슨 그림이 이럴까. 이 그림은 실제 장소를 가보지 않으면 결코 이해되지 않는 그림이다. 청령포는 뒤로는 험준한 산이 둘러 쳐져 있고 세 면이 모두 강으로 막힌, 하늘이 만든 유배지다. 그림에서 보듯 청령포를 휘감고 도는 강물이 갈고리처럼 단종의 마음을 찍어놓은 듯하다. 작가는 ‘청령포도’를 그리면서 두 가지 시점(視點)을 혼재해서 썼다. 원을 그리며 흐르는 강물은 위에서 내려다본 부감법으로 그린 반면 울뚝불뚝 선 험준한 바위와 집과 토산은 측면에서 본 시각으로 그렸다. 이런 혼재된 시점은 옛 지도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기법이다. ‘청령포도’를 비롯한 ‘월중도’는 왕이 보는 어람용으로 제작된 듯 뛰어난 화원의 솜씨를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다. 얘기만 들어서는 알 수 없던 단종의 애사(哀史)가 생생하게 그려지는 물증이다. 일연의 ‘삼국유사’가 없었더라면 결코 알 수 없었던 우리 고대사처럼 ‘월중도’도 그러하다. ‘삼국유사’나 ‘월중도’나 모두 현장을 답사하고 고민하는 가운데 탄생된 명작이기 때문에 더욱 감동을 줄 것이다.

끝으로 ‘삼국유사’ 전체에서 필자가 가장 감명 깊게 읽은 내용을 소개하겠다. ‘감통’ 편에 나오는 정수(正秀) 스님 얘기다. 애장왕(재위 800~809) 때였다. 정수 스님이 황룡사에 머물고 있었다. 한겨울이었다. 발이 푹푹 빠질 정도로 눈이 깊이 쌓였는데 날은 이미 저물었다. 삼랑사에서 돌아오는 길에 천엄사 문 밖을 지나다 뜻밖의 광경을 목격하고 자기 눈을 의심했다. 한 거지 여인이 눈 속에서 아이를 낳고는 추위에 얼어 죽었는지 꼼짝도 하지 않고 누워 있었다. 깜짝 놀란 스님이 달려가 보니 여인은 아직 숨이 붙어 있었다. 스님은 측은한 생각이 들어 의식을 잃고 사경을 헤매는 여인을 품에 안고 몸을 따뜻하게 해 주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죽음의 문턱을 넘은 듯이 보였던 여인이 가까스로 눈을 뜨고 정신을 차렸다. 비로소 스님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스님은 자신이 입고 있던 옷을 벗어 여인을 덮어 주었다. 그리고는 맨몸으로 황룡사로 돌아가 거적을 덮고 밤을 보냈다.

일연 스님이 ‘삼국유사’를 집필한 이유가 이런 삶을 지향했기 때문이 아닐까. 어쩌면 ‘삼국유사’를 읽는 사람 모두가 정수 스님 같은 보살행을 실천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붓을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조정육 sixgardn@hanmail.net

[1310호 / 2015년 9월 1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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