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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석지암(釋智巖)

기자명 성재헌

개과천선(改過遷善)이란 쉽지 않다. ‘이건 아닌데’ 하면서도 어쩌지 못하고 그냥저냥 살아가는 게 우리네 보통사람들의 삶이다. 하지만 크게 실망할 것도 없다. 이보다 못한 부류도 수두룩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매우 드물긴 하지만 ‘아니다’ 싶으면 당장 고치는 이들도 있다. 이런 부류는 불법을 배우기가 매우 용이하다. 그래서 상근기라 칭한다. 누가 상근기일까? 자신의 전부를 던질 용기가 없다면 감히 상근기라 자부할 수 없을 것이다.

20년 세월 전장서 보내다
보월선사 만나 자신 돌아봐
백성들 도륙한 과거 참회
지위·명예 버리고 출가발심

수나라 말엽 당나라 초기에 지암(智巖) 스님이란 분이 계셨다. 그는 본래 무인(武人)이었다. 대업(大業) 말년,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 약탈을 일삼자 그는 분연히 떨치고 일어섰다.

“미약한 힘이지만 백성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데 쓰리라.”

그는 황국공(黃國公) 이애(李靄)의 휘하에 들어가 호분중랑장(虎賁中郞將)이 되었다. 각지를 누비며 펼친 활력으로 그의 명성은 하늘을 찔렀다. 그렇게 20년의 세월을 전장에서 보내다가 서주(舒州) 완공산에서 우연히 보월선사(寶月禪師)를 만났다. 그는 보월의 가르침을 통해 비로소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

본래 칼을 들었던 뜻은 백성들의 생명을 보호하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한 일이라고는 살육뿐이었다. 그가 지나간 자리는 폐허의 연기로 사라졌고, 슬픔에 찌든 백성들의 눈물만이 그 빈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온몸에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현재의 자신은 권세를 좇는 한 마리 아귀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갑옷과 무기를 황국공에게 바치고 곧바로 서주 완공산으로 보월선사를 찾아갔다. 보월선사는 그에게 지암(智巖)이란 법명을 내리고, 선정을 닦도록 권하였다.

승냥이와 범들이 오가는 깊은 산 속에서 선정에 매진하였다. 모든 것을 버린 그에게 추위나 굶주림쯤은 장애도 아니었다. 그리고 어느 날 문득 “모든 것이 허깨비와 같고 꿈과 같다”는 말씀을 진심으로 수긍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맑은 날 골짜기에 앉아 좌선하였는데, 다음날 비가 내렸다. 하지만 그의 선정은 이어졌다. 그 다음날 비가 그치고 마을의 사냥꾼이 지암을 발견하게 되었다. 골짜기 물이 불어 목까지 잠긴 상태였다. 사냥꾼은 부랴부랴 지암을 끌어내고 호통을 쳤다.

“죽으려고 환장을 했나!”

선정에서 깨어난 지암은 별 일 아니라는 듯 태연했다.

“태어난 적도 없는데 죽을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사냥꾼이 타이르듯 말했다.

“이 사람아, 몸과 목숨보다 소중한 것은 없다네.”

지암이 사냥꾼에게 정중히 대답하였다.

“목숨이 소중하다는 걸 그리 잘 알면서 왜 당신은 산목숨들을 잡아 죽이고 먹습니까?”

말이 떨어지자마자 사냥꾼은 손아귀에 틀어쥐었던 새와 짐승을 내려놓았다. 맑고 투명한 눈빛이 그의 마음을 뒤흔들었기 때문이다. 사냥꾼의 입을 통해 곧 지암에 대한 소문이 퍼졌고, 그의 친구들이 산으로 찾아왔다. 화려한 비단옷을 걸친 친구들은 지암을 보고 혀를 찼다.

“자네 미쳤나?”

지암이 껄껄대며 웃다가 말했다.

“나는 다행히 미치광이에서 깨어나고 있다네. 하지만 자네들은 미친 증세가 제대로 도지고 있지. 이렇게 말해 줘도 자네들은 이해 못할 거야. 자네들은 지위와 명예를 자부하며 더 높은 지위와 명예를 좇고 있지. 하지만 그건 하루아침에 사라지는 이슬과 같은 거야. 그걸 모르고 죽자 사자 덤벼들고 있으니, 그게 미친 짓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이후 지암은 백성을 살리는 삶을 살겠다던 맹세를 지키기 위해 산을 내려왔다. 그리고 어디서건 누구에게나 부처님 말씀을 전하였다. 눈물과 상처가 가득한 곳이 그의 발길이 머무는 곳이었다. 석두성(石頭城)에서 문둥병이 창궐하자 지암은 곧장 그곳으로 향했다. 세상에 버림받은 자들이 그의 벗이었다. 지암은 고름을 빨아주고 옷을 빨아주며 부처님의 말씀으로 그들의 마음을 위로하였다. 그가 지나는 마을에서는 사라졌던 웃음꽃이 다시 피어났다.

지암은 그렇게 나머지 생을 문둥병 환자들과 생활하며 보냈다. 그리고 자신도 문둥병에 걸려 78세의 나이로 생을 마쳤다. 단정히 앉아 열반한 그의 얼굴엔 미소가 가득했고, 그가 머물던 방에서는 열흘 동안 기이한 향기가 풍겼다고 한다.

성재헌 동국역경원 역경위원 tjdwogjs@hanmail.net

[1310호 / 2015년 9월 1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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