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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식-상

대상 포착하는 ‘나’가 아닌 감각기관 개별의 인식

 

▲ 일러스트=김주대 문인화가·시인


식은 감각기관 가진 ‘나’라는
주체의 인식으로 알고 있지만
감각기관 개별 활동이 곧 ‘식’
감각기관이 없어도 식은 존재

“오직 식이 있을 뿐 대상은 없다(唯識無境)”고 주장하는 유식학(唯識學)이 아니어도, 불교에서 식(識)이란 말은 매우 근본적이고 중심적인 위상을 차지하고 있다. “무명을 조건으로 하여 행(行)이 있고, 행을 조건으로 하여 식(識)이 있고, 식을 조건으로 하여 명색(名色)이 있고…”라고 하며 이어지는 12연기의 설법에서도 일찍부터 식이 등장하고,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의 6식에 대해 말할 때도 식은 등장한다. 유식학은 이를 더 밀고 나가, 제7식과 제8식의 개념을 발전시켰고, 이러한 식의 작용을 통해서 무상한 세계 속에서 번뇌와 집착으로 물든 삶을, 그리고 그로부터 벗어난 삶을 설파했다.

‘식’이란 무언가를 포착하는 활동을 뜻하기도 하고, 그렇게 포착된 내용을 뜻하기도 한다. 그런데 나처럼 서양철학에 익숙한 이에게 이 ‘식’이라는 말은 약간 묘한 느낌을 준다. 그것은 분명 대상에 대한 인식활동을 지칭하지만 ‘인식’이라는 말과는 다르고, 포착된 어떤 인식내용을 지칭하지만 그런 의미의 ‘인식’이나 ‘지식’과도 다르다. 무엇보다 흔히 사용하는 ‘인식’이라는 말은 대상을 포착하는 주관적인 활동이나 그 결과를 뜻하기에, 근대에는 주로 ‘의식’과 상관적인 것으로 사용되었고, 인격적인 주관 전체를 통합하는 ‘정신’ 전체의 층위에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반면 불교에서 사용하는 ‘식’이란 말은 의식뿐 아니라, 안식, 이식 등 눈이나 귀의 활동, 혹은 그 활동의 결과를 뜻하는 것으로 사용된다.

그렇기에 서양철학에서 ‘내가 무엇을 인식한다’는 말은 흔히 쓰지만, 내 눈이 무엇을 인식한다는 식으로는 쓰지 않는다. 눈이나 감각기관을 통해 포착된 것은 그 자체로 따로 다루어지지 않고, 눈과 귀 등을 ‘기관(organ, 원래 ‘도구’란 뜻이다)’으로 사용하는 주관의 일부로만 다루어진다. 안식, 이식을 별도로 말한다는 것은 ‘나’라는 주관과 동일시되는 정신이나 의식의 ‘도구’가 아닌 눈이나 귀 등의 독자적인 ‘인식’이 있음을 함축하는 것 같다. 의식과 동렬에 놓인 눈, 귀의 ‘인식’이란 서양철학의 어법으로는 낯설고 생각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의식이나 정신, 영혼 같은 하나의 통합된 전체로 귀속되지 않는 눈, 귀, 코 등의 독자적인 ‘식’이 있다는 말은 깊이 생각해야 할 중요한 요소를 갖고 있다. 눈이나 귀가, 혹은 그게 포착한 것이 ‘나’라는 인식주관의 의식이나 영혼이 생각하고 판단하는데 필요한 부분적인 ‘도구’나 재료라는 생각은, 생물학적으로는 유기체중심주의적인 것이고, 철학적으로는 인간중심적인 것이다. 인식이란 언제나 유기체인 인간을 뜻하는 인식주관의 활동에 귀속된다는 생각이 어느새 전제되어 있는 것이다.

이와 달리 불교에서 말하는 식은, 영혼이나 정신 같은 유기적 통일체를 상정하지 않고 눈과 귀 등의 독자적인 활동이 독자적인 결과물을 얻는다고 하는 발상을 담고 있는 것 같다. 의식이란 안식, 이식, 비식 등과 동렬에 놓이는, 여섯 가지 식의 하나일 뿐, 그 모두를 통합하고 지휘하는 특권적 전체가 아닌 것이다. 눈은 눈대로 인식하고, 귀는 귀대로 인식한다. 코와 혀, 몸과 의식 또한 그러하다. 이는 인격적인 주관 없이는 ‘인식’에 대해 생각할 수 없고, 정신이나 영혼 없이는 사고나 인식 같은 활동을 생각할 수 없다는 오래된 통념을 근본에서 뒤집을 수 있는 자원을 제공해준다. 들뢰즈라면, 유기체에 대한 6근의 반란이라고 했을지도 모른다.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이라고 말할 때, 인간의 사고능력에 대해 말할 때, 그것은 무엇보다 의식이나 ‘정신’ 같은 개념을 상정하고 있다. 따라서 의식이나 정신이 없는 것, 가령 식물이 생각한다는 생각은 어불성설이라고 간주되었다(데카르트는 동물이 생각한다는 주장조차 강하게 비판한다). 그러나 눈이나 귀, 코가 의식과 마찬가지로 나름의 ‘식’을 갖는다는 것은, 의식이나 정신 같은 걸 가정하지 않아도 인식활동이나 그 결과에 대해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인식이 아니라 식을, 의식이 아니라 안식과 이식 등의 6식을 말하는 것은 이런 의미에서 인식뿐 아니라 인간과 동물, 식물에 대해 근본적으로 다르게 생각하도록 해준다.

그런데 식 개념이 담고 있는 잠재력은 이것 이상이다. 이런 발상을 좀 더 밀고 가보면, 식이란 눈이나 귀 같은 기관이 꼭 있어야한 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건 역으로 눈은 대체 어떻게 안식을 얻을 수 있는 걸까를 탐색해보면 분명해진다. 인간의 눈과 시각에 대한 연구는, 안식이란 세포나 단백질 수준에서 발생하는 것임을 보여준다. 예컨대 인간의 눈의 망막에는 다섯 가지 광수용체가 있다. 빛의 강도에 민감한 간상체(로돕신)와 빨강, 노랑, 파랑의 세 가지 색을 구별하는 세 개의 추상체(포톱신), 그리고 생체시계를 조절하는 크립토크롬이란 광수용체가 그것이다. 이러한 광수용체가 일정한 파장과 진폭을 갖는 빛에 반응하며 그것을 포착할 대안식이 발생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눈동자를 통과한 빛을 망막을 이루고 있는 광수용체가 자신이 흡수할 수 있는 특정 파장의 빛을 받아들이고, 이 신호를 뇌로 보내 시각적인 상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안식 전체의 형성에는 뇌가 관여하지만, 안식이라고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식은 빛과 광수용체의 만남으로 형성되는 것이다. 즉 눈이란 기관이 아니라 세포적인 수준에서 빛과 결부된 ‘식’이 형성되는 것이고, 이것이 종합되어 ‘눈’의 식을 구성하게 되는 것이다. 동물의 눈도 그렇게 작동한다. 따라서 빛에 반응하는 광수용체가 있다면 반드시 ‘눈’이라는 동물적인 기관의 형태를 갖지 않는다고 해도 ‘안식’을 가질 수 있다. 세포적인 수준에서 안식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귀나 코, 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눈과 귀, 코, 혀, 몸, 의식의 6근보다 더 아래로 내려간 수준에서 식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식이란 개념이 주는 낯설고 묘한 느낌은 아직 제대로 펼쳐지지 않은 이런 새로운 사유에 기인하는 것이 아닐까?

이런 관점에서 보면 식물은 명백하게 안식을 갖는다고 말할 수 있다. 인간과 마찬가지로 식물은 광수용체를 갖고 있다. 가령 애기장대 같은 아주 ‘단순한’ 식물조차 11개(인간은 5개였다!)의 광수용체를 갖고 있으며, 인간과 마찬가지로 생체시계를 조절하는 크립토크롬도 갖고 있다. 그렇기에 식물은 눈이란 기관은 없지만 빛과 색채를 구별하고 지각하는 능력을 갖고 있다. 빛이 거의 없을 때와 한낮일 때, 지평선으로 해가 질 때를 구별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밤낮의 길이를 알 수 있고 청색, 적색 같은 색상을 구별하기도 한다. 청색광으로 몸을 구부릴 방향을 찾고, 적색광으로 밤의 길이를 잰다. 또한 적색광과 초적색광(빨강보다 조금 더 파장이 긴 빛)을 구별할 뿐 아니라, 마지막으로 지각한 빛을 기억하여 반응한다. 나아가 인간의 시각보다 훨씬 더 복잡한 방식으로 빛을 지각하고 식별한다. 그래서 가령 적외선과 자외선을 ‘본다’. 그 이외의 것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식물들이 빛을 향해 몸을 움직이고 변형시키며, 계절의 변화를 감지해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며 잎을 떨어뜨리는 것은 이런 인식능력의 작동을 통해 이루어지는 현상이다. 겉으로 보면 무슨 ‘조건반사’나 ‘기계적 반응’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이 현상들은 매우 복잡하고 섬세한 세포적이고 분자적인 식들의 작용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식물은 눈이 없지만 ‘안식’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덧붙이면 식물은 동물의 후각처럼 냄새에 반응하는 수용체를 갖고 있으며, 냄새에 반응하고 또 냄새를 이용하기도 한다. 접촉을 지각하는 촉각도, 나아가 기억력도 갖고 있다고 한다. 다만 식물이 소리를 듣는지 여부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으며, 혀 없이 맛을 느끼는지 여부는 별로 실험되지 않은 듯하다.

이진경 서울과학기술대 교수 solaris0@daum.net
 

[1310호 / 2015년 9월 1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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