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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철불 조성의 배경 문제

철불 특유의 그로테스크한 조형 양식에 담긴 사상적 가치

▲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철조불좌상, 높이 150㎝. 8세기부터 후삼국시대까지 다양한 편년이 시도됐다.

철불(鐵佛), 즉 철로 주조한 불상은 금동불상의 주재료인 구리와 달리 철이라는 소재를 녹여 만들었다는 뜻이지만, 단순히 재료의 차이만 있는 것이 아니라 철불만의 고유한 표현 감각을 지니고 있다. 철불은 금동불에 비해 주조기법이 투박하고, 불상의 표현 자체도 거칠며 그로테스크한 느낌이 강하다. 철이 구리에 비해 녹는점이 높기 때문에 보다 높은 화력이 필요하기는 하지만, 조각적 표현기법의 기초가 되는 원형을 만드는 방식이나 이에 맞는 외형 거푸집을 만드는 방법 등은 금동불 제작기법과 대체로 동일하다. 일단 녹이기만 하면, 주입하는 쇳물이 철인가 구리인가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고유한 표현 감각 지닌 철불
통일신라말~고려 중반 집중

국박 소장 철불 연대 논쟁은
미술사학계 쟁점으로 지속돼

지권인 비로자나불 다수 존재
재료 특성에 따른 배경 유추에
선종·풍수지리적 해석도 제기

실제로 중국의 철불은 그 형태상 금동불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 그런데 유독 우리나라의 철불은 마치 스스로 철불이라는 것을 강조하기라도 하는 듯 투박하고 거친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나라 철불의 역사가 지닌 첫 번째 특이점이다.

우리나라 철불의 두 번째 특징은 주로 통일신라말~고려시대 중반기에 집중되어 있다는 점이다. 현재 연대가 정확히 밝혀진 철불로서 가장 이른 시기의 것은 859년에 제작된 장흥 보림사의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이다. 물론 연대가 밝혀지지 않은 철불 중에는 이보다 연대가 더 이른 작품도 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 대표적인 예가 충남 서산군 운산면에서 출토되었다고 전하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철불좌상인데, 아마도 항마촉지인을 결하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 철불은 고려 광종 즉위년인 949년에 탄문 스님(坦文, 900~975)이 보원사에 봉안한 불상으로 추정되기도 하였으나, 지금은 마찬가지로 보원사지 출토라고 전하는 또다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대형철불좌상이 탄문 스님의 불상이고, 이 철불좌상은 별개의 것이라는 견해가 제기되었다. 이에 따라 새로이 8세기 제작으로 보는 설, 9세기 설, 후삼국시대 설 등 다양한 학설이 제기되어 역시 미술사학계의 쟁점이 되고 있다. 만약 8세기라면 석굴암이 조성되던 시기나 그 직후 정도로 추정되어 우리나라 철불 중에서 가장 이른 작품이 될 수도 있다.

이렇게 연대를 올려보는 견해는 아무래도 이 철불은 다른 철불과 달리 거의 유일하게 금동불과 유사한 표현양식을 보이고 있고, 머리와 신체의 비례, 옷자락의 유연한 처리 등이 통일신라시대 전성기 금동불, 혹은 석불양식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9세기로 보는 설은 일전에 논쟁이 되었던 불국사 금동 아미타·비로자나불 좌상처럼 8세기의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다소 경직된 경향을 보이는 9세기 불상들과 더 유사한 점이 많다고 설명하고 있다.

▲ 실상사 철불좌상. 보물 제41호. 높이 269㎝. ‘괴이하다’는 매우 적절한 표현이다.

한편 가장 나중에 등장하는 철불은 고려말~조선초기의 작품으로서 대구 동화사 철불좌상이나 남장사 철불좌상이 있으나, 그 수는 많지 않다. 따라서 철불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사례들, 예를 들어 보림사상 외에 도피안사 철불좌상(865년), 실상사 철불좌상(860년대), 한천사 철불좌상 등은 모두 9세기 중후반에 모여있고, 증심사 철조비로자나불 좌상 및 장곡사에 봉안된 세 구의 철조 약사불·아미타불·비로자나불 좌상,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경기도 광주 하사창동 출토 철불좌상, 傳보원사지 출토 철불좌상 등 대다수의 철불은 10세기 초반 후삼국시대~고려초기의 작품으로 추정되고 있다.

▲ 도피안사 철불좌상. 국보 제63호. 865년. 91㎝.

그 출토지 혹은 발견지가 경주를 제외하고 넓은 지역에 퍼져있는 점도 특징이다. 특히 통일신라시대 구산선문 관련 사찰에서 철불이 많이 제작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현존하는 철불 외에 문헌으로만 남아있는 철불에 관한 기록 중에도 구산선문과 관련된 사례가 자주 보이는데, 희양산문의 지증대사 도헌(道憲, 824~882)이 원주 거돈사에 봉안한 철불 등이 대표적이며, 실제 거돈사지에는 거대한 철불을 받쳤던 대좌가 아직도 남아있어 그 위용을 짐작할 수 있다. 아울러 구산선문과 연관된 사찰들에서 발굴을 통해 철불편이 발견되는 경우도 종종 있어서, 성주산문을 개창한 무염(無染, 801~888)의 성주사지에서 출토된 철불편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 원주 출토 철불좌상. 傳보원사지 철불좌상과 매우 흡사하나 크기만 작다.

우리나라 철불의 세 번째 특징은 연대를 지닌 가장 이른 보림사 철불에서 보이다시피 지권인 비로자나불 좌상이 다수 조성되었다는 점이다. 물론 지권인보다 전통적인 도상인 항마촉지인의 불상도 많이 만들어졌지만, 새로운 경향이던 지권인 불상을 철불로 많이 제작했다는 것은 지권인이라는 새로운 도상을 유행하게끔 했던 어떤 배경과 ‘철’이라는 재료로 불상을 만드는 새로운 유행이 서로 연장선상에 있었음을 암시하는 듯하다.

이러한 현상을 학자들은 다양한 시선으로 해석했다. 앞서 지난 글에서는 지권인 비로자나불 도상이 구산선문과 연관되었을 가능성에 대해 잠시 언급했었는데, 일정 부분은 철불의 분포 범위와도 겹치는 셈이다. 어떻게 보면 지권인이라는 도상, 구산선문이라는 사상이 당시 중국에서의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면서 통일신라로 가져온 새로운 경향이라면, 철불 제작의 풍조 역시 당시의 중국으로부터 받은 영향일 것이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특히 통일신라에서 철불이 유행하기 직전 중국 당은 무종(武宗)의 회창 연간(會昌, 841~846)에 폐불(廢佛)의 수난을 겪었는데, 이 시기에 매우 귀한 재료인 구리로 만든 불상은 수탈의 대상이 되었으므로, 이를 피해 철과 같은 보다 덜 귀한 재료로 불상을 만드는 시도가 있었던 것이 아닐까 추정되기도 했다.

이런 재료에 관한 문제는 비록 통일신라에서는 폐불이 없었지만, 구산선문의 사찰들이 호족들의 후원을 받고 있었던 상황에서 왕실보다 저렴한 비용으로 대형 불상을 주조하려고 했던 호족들의 요구와 철이라는 재료가 맞아떨어졌다고 보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지방호족들의 군사력이 강해지면서 그들의 무기를 조달하는데 사용했던 제철기술이 자연스럽게 불상조성에 응용되었다는 설도 있으며, 무기를 제작하는데 쓰이는 철이라는 소재 자체가 호족들의 취향에 잘 맞았다는 해석도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지방호족과 연관되어 해석하는 견해들은 사실상 구산선문이 호족들만을 위한 사상적 배경이 되었던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중앙 왕실과 밀접한 연관이 있었다는 새로운 주장이 제기되고 그것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게 되면서 다소 힘을 잃게 되었다. 또한 중국에서부터의 급작스런 영향이라는 설도 왜 철불을 중국과는 달리 금동불과는 전혀 다른 조형성으로 만들었던 것이지는 설명해주지 못했다.

그에 따라 우리나라 철불의 다소 그로테스크한 성격을 재료상의, 혹은 주조기법상의 문제가 아니라, 변화된 미의식의 경향으로 보려는 해석이 시도되었다. 즉, 구산선문과 같은 선종에서는 기존의 인간적 풍취가 느껴지는 불상보다는 보다 파격적인 미를 추구했다는 것이다. 선종은 명상에 있어 언어적 제약을 탈피하여 보다 직관적인 방식으로 깨달음에 이르고자 하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기존의 화려한 사실주의적 불상양식을 교종에서의 수행방법에 비유한다면, 철불의 거친 조형성은 선종의 화두를 닮아있다.

이러한 설명은 철불이 지니는 독특한 성향이 단지 중앙 왕실보다 뒤떨어진 지방 기술자들이 제작한 상이기 때문이라거나, 아니면 철에 의한 주조기법의 후진성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 의도된, 고도의 파격적 미를 의도한 것으로 해석했다는 점에서 새로운 의미의 부여라고 하겠다.

선종과 결부된 이러한 해석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철불이 우리나라 특유의 풍수지리 사상인 비보(裨補)사상과 연관되어 있다는 해석도 많은 지지를 받고 있다. 즉, 우리나라의 풍수는 좋은 자리만 선별하는 것이 아니라, 다소 부족한 지리적 여건을 가진 자리라 하더라도 이를 인위적으로 보완하여 보다 좋은 자리로 변화시킬 수 있다는 점에 특징이 있다. 도선국사(道詵國師, 827~898)에 의해 시작되었다고 하는데, 이에 의하면 예를 들어 기운이 너무 센 지형은 무거운 것으로 눌러 그 기운의 균형을 맞춰야 한다고 했다. 이러한 지형에 절을 지을 경우 그 무거운 역할을 했던 것이 철불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철이라는 재료 자체가 이미 무겁지만, 불상 자체를 보다 무거운 존재감을 느낄 수 있는 양식으로 표현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설명은 광주철불, 전 보원사지철불과 같은 2m가 넘는 대형 철불이 만들어진 이유를 설명해줄 수 있고, 풍수지리사상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에서 선종사찰과의 연관성도 설명해줄 수 있으며, 무엇보다 시각적 양식으로 물질적 무게감을 드러냈다고 하는 점에서 이들 조형성에 시대를 뛰어넘는 예술성을 부여하게 된다.

▲ 傳보원사지 출토 철조여래좌상. 높이259cm. 시각적으로 무거운 불상임을 드러내는 독특한 미감을 지녔다.

실제로 보원사지 철불은 그 겉모습만으로도 이미 이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부처님으로 보인다. 그래서일까, 그와 똑같이 생긴 철불들이 작은 크기로 제작되어 원주 지역에서 유통되었던 것을 보면 더 이상 불상이 거대하지 않아도, 단지 시각적·양식적 무게만으로도 그 거대함을 대신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주수완 고려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  indijoo@hanmail.net

[1310호 / 2015년 9월 1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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