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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푸티상사의 지상법문] 19. 각오의 기점(1)

기자명 법보신문
  • 법공양
  • 입력 2015.09.15 16:15
  • 수정 2016.01.05 16:08
  • 댓글 0

사람 몸 받아 불법 만난 이 기회는 다시 오지 않는다

 
우리가 가장 정성스러운 마음, 가장 공경하는 마음, 가장 경건한 마음으로 불보살의 명호나 다라니를 염송할 때 그 효과는 비교적 큽니다. 염송 수행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 비결은 공경과 정성입니다. 이전에도 늘 정성과 진심을 말했는데 오늘은 ‘공경’을 더 추가합니다. 그 이유는 바로 인과의 개념입니다. 공경이 없는데 정성이 있을 수 있을까요? 정성을 다한다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내가 모든 일반인을 정성으로 대하는 이유는 마음에 번뇌가 없고 속이려는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중생을 가족처럼 사랑하면 속이려는 마음 또한 없습니다.

공경·정성이 염불 핵심
중생 가족처럼 사랑하면
속이려는 마음 또한 없어

타인에게 상처 주고도
모르는 것이 진정한 무명

세세생생 윤회 거듭하며
수 많은 생명 헤친 죄업
한 번 선행으로 덮지 못해

우리는 다른 사람을 나쁜 생각 없이 아주 평온하게 진심으로 대하긴 하지만 깊이 공경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더 강한 에너지를 얻고 더 큰 지혜, 더 큰 법력과 가장 원만한 성취를 얻으려면 혼자만의 힘으로 역부족입니다. 왜 우리의 인생을 바꾸려면 발심과 혼자의 힘만으로 부족할까요? 아주 간단합니다. 우리 인류의 누세 이래, 자신의 누세 이래 저지른 잘못, 타인에게 준 상해를 우리는 다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이생에서는 좋은 일을 얼마나 했나요? 넘어진 노인을 부축했다고 어떤 사람이 이야기하는데, 좋아요. 이것도 선행입니다. 그렇다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타인에게 준 상처는요? 사람들은 상처를 주고도 모릅니다. 보통 사람에게 가장 골칫거리는 타인에게 상처를 주고도 자신은 모르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무명이고 어리석음입니다. 이것은 누구나 저지를 수 있는 일입니다. 가장 큰 무명은 잘못을 저질러 타인에게 상처를 주고도 자신은 모르는 것입니다. 심지어 상해를 공덕으로 여깁니다. 누세 이래 우리의 잘못으로 쌓인 부정적인 것은 적을 때는 느끼지 못하지만 많으면 문제가 됩니다.

요즘 세상을 한번 보세요. 비닐 봉투를 함부로 버립니다. 과거에는 일회용 도시락을 마음대로 버렸습니다. 그래서 바람이 불면 흰색 도시락이나 주머니가 바람에 나뒹굽니다. 오늘 이 집에서 연탄난로를 쓰고, 내일 저 집에서 가스난로를 사용합니다. 가스를 사용하는 난로, 마력이 큰 고성능 자동차는 화학적 오염을 일으킵니다. 사람들은 오염을 좋아합니다. 색을 좋아하니까요. 듣기 거북하지만, 색을 밝힙니다. 사실 여자들이 더 심합니다. 염색한 수행자가 몇 명인지 보세요. 손톱에 그림도 그립니다. 사람마다 오염을 피하려고 하면서 또한 스스로 오염을 찾습니다. 염색이 오염일까요? 염(染)이잖아요. 오염이 아니라 나만의 색을 물들였다고 하는데 스스로 특정 오염 색을 찾은 겁니다. 환경은 이렇게 점차 오염됩니다. 오늘날 중국을 보세요. 북쪽 지역의 베이징 근교, 베이징, 난징에 이르기까지 맑은 하늘이 없습니다. 요즘 말로 스모그현상이라고 합니다. 중국의 남에서 북에 이르기까지 하늘이 맑게 보이는 곳이 없습니다. 사진을 찍어보면 어항 속의 흐린 물 같습니다. 사진이나 영화를 보면 공기가 맑지 않고 혼탁합니다. 모두가 환경을 오염시킨 결과, 오늘날의 인과를 낳았고 그것이 바로 스모그현상입니다. 계속 오염시키면 우리는 많은 질병에 걸리게 됩니다. 호흡기관이 깨끗할까요? 엑스레이촬영을 하면 폐가 맑고 깨끗할까요? 호흡 계통이 오염되면 어디에 영향을 줄까요? 신장은 영향을 받지 않을까요? 심장은 영향을 받지 않을까요? 천식에 걸리지 않을까요? 뇌의 산소 부족이나 뇌 중독이 발생하지 않을까요? 해괴한 감기가 유행하지 않을까요? 어른과 아이의 지능을 떨어뜨리지 않을까요? 나는 다 가능하다고 봅니다. 많은 질병을 유발합니다. 이렇게 우리가 모두 조금씩 오염시키면 결국 온 세상이 오염됩니다.

그럼 우리가 누세에 걸쳐 이번 생에 몇 사람을 죽이고, 소 몇십 마리, 양 몇천 마리를 죽였다고 합시다. 100번 세상을 살면서 당신이 살생한 중생을 모두 대지에 펼쳐 놓아보면 한 사람이 100번을 사는 동안 살해한 중생은 타이완 전체를 덮을 것입니다. 곳곳에 널린 시체는 모두 당신이 죽였습니다. 그와 그들의 자녀에게 준 고통과 공포가 얼마나 크겠습니까? 그 죄악이 작을 수 있습니까? 당신의 이렇게 큰 죄악을 목숨으로 갚아야 한다면, 한목숨에 한 번 총살하거나 한 번 목을 베어야 한다면, 당신을 십만 번 죽여도 마땅합니다. 그래서 죄업은 무겁습니다. 이렇게 큰 죄업을 혼자 갚을 수 있을까요?

“오늘 염불 한 번 했습니다. 심지어 10만 위안(약 1,800만 원)을 공양했는데 병이 왜 아직 낫지 않을까요?”
“오늘 만난 사부든, 활불이든, 법왕이든, 왜 나를 칭찬하지 않을까요? 저 사람은 발심하거나 수행도 하지 않고 못생긴데다가 돈도 없는데 늘 칭찬해 주고 왜 나는 칭찬을 받지 못할까요?”

인연과 과보가 다릅니다. 즉 죄악의 정도가 다릅니다. 오늘 우리가 얼마나 큰 발심을 했든, 우리의 죄악과 비교해 가늠할 때 우리 죄악의 천만 분의 일도 줄이지 못합니다. 그 죄악을 덮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평등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마음의 죄악감에서 죄악을 없애려 하지만 아직 업력이 있습니다. 우리의 허영심, 질투심은 다시 죄를 범하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불법을 닦을 때 ‘금강경’을 배워야 합니다. ‘금강경’ 첫 머리의 개경게를 읽어보겠습니다.

무상심심미묘법(無上甚深微妙法)
백천만겁난조우(百千萬劫難遭遇)
아금견문득수지(我今見聞得受持)
원해여래진실의(愿解如來眞實義)

불경을 너무 많이 읽어 대수롭지 않을 수 있습니다. 마치 어릴 때 모모 주석의 어록을 외우는 것처럼 뜻도 모르고 선생님이 외우라고 하면 외웠습니다. 우리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 선생님은 늘 우리에게 말했습니다.

“인민을 위해 일하자.”
“누구를 위해 일하라는 거예요?“

인민이 누구인지 물으면 선생님은 습관처럼 모른다고 했습니다. 독경을 많이 한 사람은 깊이 이해하거나 아니면 습관적으로 그냥 스쳐 지나갈 수도 있습니다.

‘위 없이 깊고 미묘한 법(無上甚深微妙法)’.

위 없다는 것은 좋은 점을 말합니다. 우리에 대한 이익과 우리에게 주는 도움은 아주 소중합니다. 형용할 수 없이 소중한 것을 위 없다고 합니다. ‘위 없다’고 정말 위가 없거나 크고 작음이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정말 아주 고상하여 ‘위 없다’는 어휘를 썼습니다. 아주 심오하다는 것은 이 법이 바로 해탈의 법이며 미묘하다는 것은 불가사의하여 이해하기 쉽지 않다는 뜻입니다. 첫 번째 ‘위 없다’는 것은 존귀함, 소중함을 대표합니다.

‘심심미묘법(甚深微妙法)’은 이미 아주 명백하게 말했지만 ‘불가사의하고 이해하기 쉽지 않다’는 뜻입니다. 아주 쉽게 이해할 수 있다면 모든 사람이 벌써 깨달았을 것입니다. 이런 철학적이거나 철학을 벗어난 개념은 우리가 쉽게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럴수록 시간을 내어 문자를 파고들어 이런 문자를 자기 마음과 서로 호응하게 하는데 힘써야 합니다.

‘백천만겁난조우(百千萬劫難遭遇)’는 범어가 아닌 알아듣기 쉬운 말이어서 여러분 모두 알아들었죠? 즉 아주 소중한 기회를 만났다는 뜻입니다. 나 자신을 예로 들면 나는 병 때문에 불법을 만났습니다. 질병은 내가 불법을 듣고 불법을 배우게 한 인연이고 기회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좋은 직업을 찾기 위해서고 어떤 사람은 대사가 비바람을 부르고 거침없이 사람의 병을 치료하는 것을 보고 이런 직업을 찾기 위해 왔다고 합니다. 이렇게 온 사람도 인연입니다.

‘아금견문득수지(我今見聞得受持)’. 무엇을 수지(受持)라고 합니까?

여러분의 이해가 나보다 더 진실할 겁니다. 나는 그냥 말할 뿐입니다. 나는 오늘 보고 얻고 들었습니다. 이 경전의 가장 진실하고 정확한 뜻을 이해했든 못 했든 본 사람은 혜택을 입고 들은 사람은 법을 얻으며 공양한 사람은 깨달음을 얻습니다. 바로 이러한 개념입니다.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두렵지 않습니다. 외면하는 것이 두렵습니다. 인연이 있어 보았다면 시간을 내서 읽고 예배하며 공경해야 합니다. 불상처럼 모셔도 됩니다. 우리는 불경을 부처님 몸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진짜로 입체의 불상 속에 일반적으로 경전을 넣습니다. 예불(禮佛)은 예경(禮經)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경전에 예배하는 것도 아주 좋습니다.
가장 진실한 뜻에 대한 이해 여부를 떠나 우리가 단지 경전을 가까이하거나 단지 독송만 하거나 단지 보기만 해도 덕을 입을 수 있습니다. 불경이니까요. 부처님이 중생을 근본적으로 깨닫게 하는 경전이므로 그 불가사의함은 바로 진심이 닿으면 당신이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불경 자체가 당신을 이해하게 합니다. 즉, 아주 우둔하여 이 글자를 몰라도 괜찮습니다. 진심이 닿으면 이 경전을 스스로 통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경전을 가까이하여 공양하고 염송하면 덕을 입습니다. 이것을 수지(受持)라고 합니다.

‘원해여래진실의(愿解如來眞實義)’. 이 소원은 만약 당신이 진정으로 끊임없이 불광의 덕을 입으며 이 경전을 수지하면 천천히 새로운 생각이 들도록 합니다. 그 생각이 소원이거나 혹은 소원과 관계없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내가 이야기하는 불법을 들으면서 부처님의 가장 지혜로운 경전 속의 말씀에서 깨달음을 얻고 싶다는 소원이 있으면 부처님은 당신이 깨닫도록 대지혜와 서로 호응하게 하여 마음에서 기도하고 바라는 바를 당신에게 줍니다.

‘관세음보살 보문품’에서 보살님의 소원은 ‘당신이 정말 괴롭고 위급하고 어려운 일에 처해 필요할 때 나는 곧 찾아온다.’입니다. 당신이 깨닫고 싶다는 소원이 있을 때 이런 지혜는 자연히 당신의 생명 속에 들어올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불법을 배울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이런 기회를 소중히 여기는 것입니다. 이런 기회는 아주 소중합니다. 그래서 백천만겁난조우(百千萬劫難遭遇)라고 합니다. 백천만 겁만에 만났는데 ‘왜 그걸 믿어? 나는 출근할 거야.’ ‘아르바이트하러 갈 거야.‘ ‘연애하러 갈 거야.’ ‘내가 다시 오는데 설마 영원한 시간이 필요하겠어?‘라고 외면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사실 ‘아주 오래’가 아니고 ‘영원히’입니다. 그래서 백천만 겁이라 합니다. 불교 지식에서 일 겁은 몇 년입니까? 만약 일 겁이 천만 년이라면 백천만 겁, 즉 무수한 겁은 몇억만 년 후에 이런 기회와 인연이 있어야 다시 배울 수 있습니다.

깨달음의 귀중함을 드러내려고 일부러 이렇게 말할까요? 아닙니다. 부처님은 사람을 속이지 않습니다. 왜 백천만 겁이라 하는지 나도 생각해보았습니다. 인류의 몸을 분해하면 지구 상의 몇 가지 원소로 이루어졌습니다. 만약 이번에 기회가 없으면 죽은 후 육체는 분해됩니다. 불에 태워져 기체로 변하든 한 줌의 재로 남아 비료가 되든 땅속에서 자연히 썩든 예를 들어 10분의 1이 기체로 변하여 구름과 안개, 물이 되어 돼지, 개, 소, 양이 마십니다. 그래서 당신의 1만 분의 1 분자만 사람의 몸에 이르고 젖소의 젖으로 되며 악귀의 잇새에 끼고 과일에 들어가 이미 분산되어 사람의 형상이 완전히 없어져 찾을 수 없습니다. 하나하나의 원소로 되는데 너무 작아 눈으로 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불경에서 부처님께서 말씀하다시피 이 세상의 중생은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로 이루어졌습니다. 이 몇 가지 물질이 한 사람을 구성하면 오늘은 사람을 구성하고 내세에는 소를 구성하며 또 다음 내세에는 돼지를 만들고 그다음 내세에는 작은 나무를 구성하거나 나무에 달린 한 개의 과일밖에 구성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분해와 재생을 반복하면서 어느 생에 사람이 되고 사람이 됐을 때 불법을 만난다면 백천만 겁에 만나는 것이 정상입니다. 당신이 다시 돌아올 때 지구는 이미 지구가 아닙니다. 우리가 다시 만나는 곳은 화성일 수 있습니다. 모두가 화성인이라면 가는 목에 큰 머리, 짧은 다리에 서너 개의 긴 꼬리가 자라나 아주 보기 좋을 수 있겠죠.

그래서 이런 기회는 얻기 어렵습니다. 얻기 어려운 것은 소중합니다. 이고득락하기 때문에 소중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2013년 4월3일 타이완 타이베이
번역:정금주
제공:보리선수 약사선원(T.1661-0803)
 

[1310호 / 2015년 9월 1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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